< -- 간웅 16권 - 북벌의 시작. -- >이숭겸의 말에 정도전이 주변을 둘러봤다. 정말 책이 쓰레기처럼 너부러져 있고 자신은 그 책 속에 파묻혀 있었다."바람이라도 조금 쐬고 오시면 막힌 것이 풀릴지도 모르지요."이숭겸이 사람 좋게 웃었다.
마치 손자를 아끼는 노인처럼 그렇게 웃는 이숭겸이었다."시간이 없어."
"햇볕 쪼임도 좀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합하를 돕지요."
"날 이방에서 끌어낼 생각이군."
"벌써 이틀째입니다."
"알았네! 알았어."정도전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무거웠던 표정을 다 풀고 회생의 사택을 거닐었다. 그러다 그의 발걸음이 아담한 전각 앞에 멈췄다.타타타탁! 타타탁! 번쩍! 타타탁!순간 요란한 폭죽이 터지는 소리에 정도전이 놀라 높은 담을 노려봤다.
요란한 소리가 난 곳이 바로 저 담 너머였으나 폴짝 뛰어도 정도전은 담 안을 볼 수가 없었다."젠장! 키가 작은 것은 이리 몸을 불편하게 하는군."요란한 소리에 궁금증이 생긴 흥선이 투덜거렸다."저긴 귀녀가 기거하는 전각인데."그러고 보니 정도전도 아나스타샤를 귀녀라 말했다. 물론 흥선은 아나스타샤가 신라방 총방주 김승주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뭐지?"궁금증이 오늘 이 순간 인연을 만들고 있었다.
정도전은 아나스타샤의 아담한 전각으로 뛰었다. 그 뛰는 모습이 아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게 뛴 정도전은 아나스타샤의 전각으로 통하는 쪽문을 빠끔히 열고 그 안을 봤다.
타타탁! 타탁!정도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요란한 폭죽이 스스로 터지는 모습이었다. 짧은 불꽃과 요란한 소리를 정도전은 꽤나 흥미롭게 봤다.
물론 정도전이 폭죽을 못 본 건 아니다. 황궁의 연회에 종종 폭죽을 터트리는 경우가 있었다.
허나 그건 꽤나 귀한 것이라 이런 민가에서 볼 수가 없는 거였다.
“아이야! 이리와!”
쪽문에 기대여 안을 보고 있는 정도전을 누가 본다면 호기심에 가득한 아이처럼 보일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정도전을 보고 방끗 웃으며 정도전을 불렀다.
마치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이렇게 이 사택에 와 있는 듯 없는 듯 지낸 것도 벌써 몇 개월이 지났으니 아침에 나뭇가지에 앉은 새도 반가운 아나스타샤였고 정도전의 방문도 반갑기만 한 아나스타샤였다.
‘아이?’40이 훌쩍 넘은 정도전이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는 아이처럼 보였다.
“아이야! 이리와! 같이 이걸 가지고 놀자꾸나.”
마침 아나스타샤가 들고 있던 것에 궁금증을 느낀 정도전이라 정말 아이처럼 쭈삣거리며 아나스타샤에게 갔다.
“네 이름이 뭐니?”
“그건 뭐지?”
알면서 묻는다는 것은 다른 것이 궁금하기 때문일 거다.
“폭죽!”
“폭죽?”
“그래. 대륙인들이 만들 거지. 마음 부산할 때 이것만 한 것이 없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건 아마 정도전이 아이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여기다가 불을 붙이면 소리를 내며 불꽃을 만들어서 터져! 호호호!”
누군가와 말하는 자체가 즐거운 것인지 아나스타샤는 정도전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또 한 번 호기심이 가는 정도전이었다.
쿵쾅! 쿵쾅!정도전의 가슴이 뛰었다.이유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가슴이 뛴다는 것이 이 순간 중요했다.‘곱다!’정도전은 환하게 웃는 아나스타샤의 웃음으로 보며 그저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슬프다.’그도 그럴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처음 이곳에 올 때는 담보였고 지금은 볼모와 같은 존재이니 말이다.
“너 귀엽구나!”
아나스타샤는 정도전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흩트리듯 만졌고 정도전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지마!”
“호호호! 요거 성깔 있네.”
“이러지 말라니까.”
하지 말라면 더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일 거다. 아나스타샤는 더욱 정도전에게 장난을 걸었다.
“너 참 귀엽네. 이 누나가 예뻐해 줘야겠어.”
정도전은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병이 없었다면 자신을 놀리는 아나스타샤 정도의 딸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정도전이었다.
“너 이름이 뭐니?”
“낭자는?”
정도전의 물음에 아나스타샤는 피식 웃었다.
“낭자?”
“그래. 낭자의 이름은?”
“너 애늙은이구나! 뭐 이런 사택에 살면 다 그렇게 되겠지. 난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
정도전은 조용히 아나스타샤의 이름을 되뇌다. 하지만 이미 정도전의 가슴에는 아나스타샤의 이름은 꽃이 됐다.누군가가 불러준다면 여인이 꽃이 되듯 아나스타샤는 이 순간 운명처럼 정도전의 가슴에 피는 꽃이 됐다.이것은 멈췄던 정도전의 성장이 어느 순간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는 반증일 거다.
“난 정도전!”
자신을 밝힌 정도전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피식 웃었다.
“이거! 불 한번 붙여봐. 번잡한 마음이 터지듯 날아간다.”
아나스타샤는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폭죽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이처럼 보이는 정도전에게 폭죽을 내밀었다. 그 순간 정도전은 아나스타샤의 희고 고운 손에 들려 있는 폭죽을 뚫어지게 봤다.
‘요란하다! 터진다! 번쩍거린다! 말을 놀라게 할 건 이것만한 것이 없다.’정도전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급히 돌아섰다. 마치 부끄러운 아이처럼 뛰었다.
물론 그가 뛰는 곳은 서책이 쓰레기처럼 쌓여 있는 자신의 처소였다.뛰는 모습이 귀엽다 생각이 들었는지 아나스타샤는 그런 정도전을 보며 다시 환하게 웃었다.
“또 놀러와! 이 누나가 예뻐해 줄게. 호호호!”
무거운 분위기가 감도는 중방.중방 상석에 내가 앉았고 그 좌우측으로 이의방과 이고가 앉았다. 그 옆으로 고려의 노장군들과 새롭게 창출된 내 정권에 동조하는 문신들이 앉았고 반대편에는 젊은 무장들로 대표되는 경대승과 허승을 비롯한 무장들이 앉았다. 그리고 또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기존의 문신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난 그들을 쭉 둘러봤다.충심으로 나를 따르는 자와 마지못해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이 명확하게 구분이 됐다.
마지못해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중에 내 숙청을 피한 자들은 그만큼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고 훗날 내가 옥좌에 오른 후에 이 고려를 안정하게 이끌 자들이기도 했다.‘검으로 장악할 수는 있으나 평정하지는 못한다.
’이것이 내 생각이었다.
“이제 명명백백하게 모든 것이 들어났소. 서경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을 고려의 섭정으로 완벽하게 진압할 것이요. 이 자리에서 서경정벌군의 진격을 섭정으로 명합니다.”
내 말에 모두 다 올 것이 왔다는 눈빛을 보였다.
“예. 합하! 응양군은 만반의 준비가 끝났사옵니다.”
대장군 한 섬이 나를 보며 말했다.
“용호군 역시 당장 진격할 수 있습니다. 합하!”
대장군이고도 당당히 말했다.
“난 이번 서경정벌을 통해 그동안 소외되었던 서경을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제 2의 황성으로 만들 참이요.”
내 말에 거의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지만 일부 문신들이 놀라 나를 봤다. 아마 묘청대사의 서경천도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하나 함부로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조금 전까지 피의 숙청을 보고 느꼈으니 말이다.‘꾸어다놓은 보릿자루가 따로 없군.’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의견이 있으면 말하시오.”
“황제폐하께서 곧 강화에서 오실 것입니다. 서경정벌과 같은 중차대한 일은 황제폐하와 함께 대전회의를 통해 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경계하고 견제를 하라고 문하시중을 시켜놓은 윤인첨이 나를 보며 말했다.
“옳은 말씀이요. 준비를 하고 기다릴 것이요. 이번 정벌은 황제폐하의 친정이 될 것입니다.”
아직은 어수선한 정국이다.내 부친이기는 하나 황제를 이 황궁에 두고 내가 서경으로 진격한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문제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폐하를 기다려야 합니다.”
윤인첨이 운을 떼자 문신들이 덩달아 입을 나불거렸다. 허나 저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들은 분명 아닐 것이다. 흥선이 지목해준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응양군과 용호군은 출정준비에 만전을 기하십시오.”
“예. 합하!”
“또한 내가 섭정이기는 하나 본래 주어진 직책은 고려의 상장군이니 직접 신수군을 통솔할 것이요. 부장은 그리 알라.”
“예. 합하! 명을 받잡습니다.”
내 부장은 경대승이다. 이건 어쩌면 경대승에게는 벼락출세와 같은 거였다.
“또한 대장군 경진을 황성을 수비하게 하고 그 직위를 대장군에서 승차시켜 상장군으로 명합니다.”
내 말에 경대승이 놀라 날 봤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경진을 베려고 했다. 또한 경대승을 베려고 했던 것을 경대승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신수군의 상장군의 부장이 되었고 자신의 아비는 상장군이 되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한 눈빛이었다.
‘품어야 한다면 완벽하게 품을 것이다.’나는 어쩌면 얼마 전까지 경대승을 시기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일깨워준 것이 정도전이었다.
“신! 경진! 신명을 다해 충심을 다할 것입니다.”
경진의 대답에 윤인첨과 문신들이 놀라 나와 경진을 봤다. 상장군이 되어 충심을 다해야 할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황제폐하일 거다. 그런데 지금 그는 내게 충심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가장 위험한 순간까지 떨어졌던 경진이다. 그리고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런 변화는 자신에게는 생각하지도 않은 순간에 찾아온 선물처럼 감격스러웠고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는 거였다.
“그 충심은 고려에 받쳐야 하지요.”
“물론이옵니다. 합하!”
경진의 말을 듣고 난 다시 모여 있는 위위경 이의방부터 이고 그리고 모든 대장군들을 봤다.
“합하!”
조심히 김원희가 나를 불렀다.
“왜 그러시오?”
김원희는 명종이 영립될 때 우중금으로 어가를 수종한 공이 있어 대교가 된 인물이다. 옥공의 자식이던 조원정이 장군의 반열에 오른 것에 비해 능력과 공을 인정받지 못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정도전은 그를 세심한 인물이라 내게 고했다. 또한 준비성이 있으나 그 준비성이 장점이면서 단점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난 누군가 한 번 내게 들려준 이야기를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능력이 있었다. 낮은 직급이기는 하나 이 중방 회의에 참석한 것은 내가 그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가? 김대교?”
“지금은 11월이옵니다.”
내가 서경정벌을 공표한 지금은 11월이다. 곧 삭풍이 몰려드는 겨울이 온다는 거였다.
“그런데?”
“적이 농성을 한다면 쉽게 서경을 취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곧 겨울이옵니다. 서경의 성 아래 진을 치게 되면 서경군이 적이 아니라 혹독한 추위가 적이 될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철수를 하게 될 것이옵니다.”
옳은 판단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