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웅-287화 (287/620)

< -- 간웅 14권 --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앞에 여전히 임금 왕자 모양으로 놓여 있는 화살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내가 계획했던 모든 일들이 틀어진 순간이다.

‘야율강! 너를 통해 정말 인명은 제천이라는 것을 알았다.’난 손에 든 화살을 더욱 힘껏 쥐었다.

이것은 내 실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나 역시 김돈중과 망건을 비롯한 도천밀교도들이 이렇게 함정을 파고 고려를 전복시킬 거사를 실행에 옮기고 있었는지 견룡군을 이끌면서 감찰어사대의 감찰어사로 만조백관들을 사찰하며 고려의 모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도 몰랐다는 것이 실책일 것이다.

“소신이 부축하겠사옵니다.”

김돈중이 나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는 이제 마치 내 충신처럼 행동하고자 했다.

“그대는 제 아버님의 유일한 충신이셨지요.”

난 흥왕사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내 부친인 의종황제가 조금 더 김돈중의 간언에 귀를 기우렸다면 강화도에 유폐와 다름없는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무비에게 들었습니다.”

이 순간 언제 알았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고 또 지금 야율강이 알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제 야율강이 살아서 금으로 돌아간다면 이일을 크게 문제 삼을 것이고 종국에는 내 숙부인 명종황제도 내 존재를 알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나를 비롯한 내 부친이 되시는 의종황제까지 위험해지는 순간이었다.‘내 대망의 계획의 물고가 완벽하게 다른 방향으로 틀어졌다.

’난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송구하옵니다. 그때 말씀 올리지 못해서 이리 소신이 모든 일을 힘들게 만들었사옵니다.”

“제게 소명을 주기 위해 하늘이 내린 시련일 겁니다.”

난 내 충신이 될 김돈중에게 내가 누구보다 대범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주군이 부족하면 가신은 간악해지고 주군의 것을 노리게 되는 법이다. 그렇기에 사람을 다스리는 사람은 크게 보여야 하며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보여야 한다.‘그걸 현대에서는 카리스마라고 하지.’

“시련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지요. 시련이지요.”

내 말에 김돈중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사옵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다 이리되기 위해 그리 된 것입니다.”

“아버님의 충신이셨으니 이제 저의 충신이 되어주십시오.”

이미 뜻이 정해진 상태다. 난 김보당보다 더 문신의 거두인 김돈중을 내 옆에 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돈중이 내게 충성을 다한다면 지금까지는 무신들의 압력에 마지못해 따라왔던 문신들도 모두 나에게 머리를 조아릴 것이고 또한 내 힘이 되어줄 거라는 것을 난 잘 알고 있었다.‘두 장인만 잘 설득을 한다면 어렵지 않아.’내가 생각한 두 장인은 이의방과 강일천이다.

난 그런 생각을 하며 나를 복잡 미묘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 야율강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야율강은 내가 무슨 행동을 할지 잘 알고 있다는 듯 날 보며 웃고 있었다.이 순간에도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저놈이 난 밉다.

그도 따지고 보면 금의 간웅일 것이다. 거란족으로 금에 충성하며 금의 조정에서 실세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나만큼 수많은 권모술수를 쓰며 그 자리까지 왔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밉다.나 같아서.그리고 이제 그는 죽어야 한다.

“그리 고귀한 분이셨소? 이 사실을 명종황제께서도 아십니까? 그럼 어찌 되시는 것입니까? 고모를 아내로 맞이하신 것입니까?”

거란족 야율강이 나를 조롱하듯 말했다.

“나를 조롱하는 건가?”

“나 같아 여쭈는 것입니다.”

나 같다!야율강도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거였다.

“참으로 무서운 분이십니다. 어찌 그리도 자신을 그렇게 완벽하게 숨길 수 있습니까?”

“그러게.”

난 나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다시 지그시 야율강을 봤다.

“인명은 분명 제천일 것이다.”

“그러시오? 그렇기도 하군요. 화살 세대를 맞고 죽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분명 야율강은 이 순간 죽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리도 당당한 것은 그가 거란의 영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걸 거다. 허나 영웅도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두 가지 선택이 있다. 그 하나는,,,,,,,.”

“다시 내가 금을 배신하고 그대를 따르는 것이지요.”

나를 너무도 잘 파악하고 있는 야율강이었다. 이 순간 야율강이 내게 무릎을 꿇는다면 나는 도천밀군을 얻은 것보다 더 큰 것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 또 하나는 죽음이다.”

“내가 거란을 배신할 때 모두 다 나를 욕했소. 여진의 개가 된 거란의 오랑캐라고 허나 난 부끄럽지 않았소. 금이 대륙을 통일하는 순간 내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니 말이요.”

지금의 국제 정세는 금이 남송을 압박하여 조만간 대륙을 통일할 것 같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허나 그 허망한 꿈은 초원의 푸른 늑대들이 달려오면서 완벽하게 달라졌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왜 그대가 금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시오?”

“물론.”

내 말에 야율강이 피식 날 보며 웃었다.

“이제 너의 답을 듣고 싶다. 야율강! 이곳에서 네가 죽기에는 너의 사악한 머리가 너무나 아깝다.”

“답을 드리지요.”

“그래. 답을 다오.”

“내 답은 이렇습니다. 한번 서방을 배신한 계집이 두 번째 서방도 배신하지 못할 것은 없으나 두 번째 서방이 참으로 그 계집에게 잘해 주더이다.”

“그렇게 말하더냐?”

“그렇소. 계집이 그러더이다. 두 서방은 섬겼으나 세 번째 서방은 싫다 하더이다.”

한 마디로 죽겠다는 말이다.

“결정한 것인가?”

“그렇소. 단지 아쉬운 것은,,,,,,,,.”

야율강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쉬운 것은?”

“금에 두고 온 내 아들 초재를 품에 앉지 못한 것이 아쉽구려.”

야율초재!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는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 대제국의 한 귀퉁이에서 조용히 제국의 구석구석을 어루만졌던 불세출의 모략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야율초재였다.

아이러니하게 그는 자신의 부친인 야율강이 따르던 금을 오고타이를 수행하여 멸망시켰다.이 순간 야율강이 고려에서 죽게 되기에 야율초재의 운명도 파란만장하게 변하게 되는 거였다.

그는 세 황제를 보필하면서 충성스러웠고, 동시에 지혜로웠다. 모략가에게 필요한 덕목을 고루 갖춘 보기 드물게 뛰어난 모략가였다.

“그건 아쉬울 것 같다.”

난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이제 내가 스스로 행동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너의 죽음이 다시 고려의 큰 파란을 몰고 올 것이다.”

“또 엄청난 것을 꾸미시겠지요?”

야율강이 날 노려봤다.

“내 생에 가장 모질어야 할 며칠이 될 것 같다.”

“옥좌를 노리시오?”

“아니면 너를 죽일 이유가 없지.”

“허나 쉽게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요.”

“그렇지. 항상 세상 사는데 마음먹는 그대로 되는 법은 없더군. 난 신수군을 이끌고 북진해서 회군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버님을 다시 복위시킬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일이 이렇게 틀어졌어. 허나 어떻게 일이 틀어지든 결국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은 진행이 되어왔다.”

난 내 손에 들고 있던 화살촉을 천천히 야율강의 목젖이 있는 부분에 가져갔다. 섬뜩함이 폐부를 찌를 것이 분명한데 야율강은 무척이나 초연했다.

“네 죽음의 모든 책임은 내 숙부가 지게 될 것이다.”

내 말에 야율강이 조롱하는 눈빛으로 날 보며 웃었다. 죽음 앞에서도 이리 당당해지고자 하는 사내는 자신의 삶이 후회스럽지 않을 것이다.

“내 조국 금이 걱정되는군.”

“그래. 저승에 가서도 참 많이 걱정해야 할 것이다.”

바드득!이 순간 야율강이 나를 보며 처음으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바로 고토수복을 위한 북벌이 이어질 테니까.”

난 그렇게 말하고 힘껏 야율강의 목젖에 데고 있던 화살을 든 손에 힘을 줬다.수욱!

“울컥!”

푸욱!순간 야율강의 입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이렇게 대망을 가진 나는 잔인해져야 했다.그리고 서서히 야율강이 죽어가는 모습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지켜봤다.

“망건!”

난 고개를 돌려 망건을 봤다.푹!그 순간 파란만장했던 거란의 풍운아 야율강이 고려의 이름 모를 동굴에서 죽었다.

“예. 본주!”

“앞으로 날 본주라 부르지 말고 주군이라 불러라.”

“예. 명을 따르겠나이다.”

“망건!”

“예. 주군!”

“이 모든 일을 꾸밀 수 있었던 것은 동조한 자기 있었기 때문일 거다.”

“그렇사옵니다. 제일 앞에 이 소응을 세웠습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내 눈빛이 사나워졌다.

“네가 이소응을 밀고해야 할 것 같다.”

“예?”

“이 소응이 어쩔 수 없는 고신으로 지금 죽은 야율강을 죽이게 만든 것은 모두 내 숙부 황제의 지시 때문이라고 토설하게 만들어야겠다.”

어찌 되었던 내가 바로 황제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그러니 지금 강화에 계신 내 아버님인 의종황제를 다시 복위시켜야 했다. 그러고 나서 부자상복을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러기 전에 독해져야겠지.’바드득!난 이 순간 엄청난 것을 생각했다. ‘옥좌는 절대 나눌 수 없는 법.’난 진도에 있는 폐서인이 된 태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밀, 밀고라 하셨습니까?”

“그래야 한다. 그래야 내가 더 빠르게 북벌로 나갈 수 있다.”

내 말에 망건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예. 그리 하겠습니다.”

“매우 힘든 나날이 될 것이다. 너는 목숨은 구명 받을 수 있을 것이나 관노가 될 것이다.”

“감내 할 것입니다.”

“그래. 참아라! 참고 나면 후일 너에게 모든 공을 돌릴 것이다.”

“예. 주군!”

망건이 바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그리고 난 다시 김돈중을 봤다.

“무엇을 해야 할 지 아시지요?”

“예. 왕자님!”

“지금은 그저 회생이라 부르세요.”

“예. 회생공. 저는 상황제의 복위와 현황제의 폐위를 조정 공론화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의방이 걱정되십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전면에 나서기 위해서는 이의방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얼마 전까지 적이 분명한 사이였다.

“내 내려가 담판을 지을 것입니다. 장인에게.”

난 그렇게 말하며 이의방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람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몰이꾼들의 포위는 풀지 마십시오.”

내가 할 이의방과의 담판이 성사되지 못한다면 이 사냥터에서 야율강과 함께 이의방도 내 숙부인 명종황제의 지시에 의해 척살된 것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이렇게 대망을 품은 자는 모질게 변하는 법이다.

“박현준!”

“예. 주군.”

“검을 들 수 있겠는가?”

내 말에 별초낭장 박현준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예. 주군! 스스로 꺾지 못하나 동귀어진을 할 수 있사옵니다.”

별초낭장 박현준이 말한 것처럼 이의방은 대단한 인물이 분명했다.

“장인께서 나와 뜻이 같지 않다면 베라.”

“예. 주군!”

“그럼 가자! 이제 한시도 지체할 틈이 없다. 급히 움직여야 일이 빨리 진행될 것이며 화근이 될 자들을 모두 처단할 수 있을 것이다.”

난 그렇게 말하며 사냥터에 나서지 않은 김보당의 얼굴을 떠올렸다.‘한 번에 다 정리한다. 그리고 북변으로 간다.’그리고 다시 김돈중을 봤다.

“능력 있는 자에게 도천밀군 1천을 줘서 바로 김보당의 사택을 포위하고 김보당을 생포하라 지시하십시오.”

“김보당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내 숙부의 충신이 되어 있으니 이번에 숙청할 것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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