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13권 -- >7. 모든 것을 간파하고도 허를 찔리다.난 이의방과 엄청난 이야기를 나눴던 중방을 나왔다.
이의방의 속내를 듣고도 마음이 무거운 것은 내가 완벽히 이의방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지금 당장에 이의방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기에 우선은 야율강의 일부터 처리를 하면 되고 그 다음이 내 생부인 의종의 안전을 도모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는 차곡차곡 진행이 되고 있다.’이제부터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오직 야율강을 무사히 금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사실 참으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야율강을 노리고 있는 자가 많으니 말이다.
우선 개경에 웅크리고 있는 미친 노친네 이소응이 야율강을 노리고 있었다. 점점 더 간이 커지고 있는 이소응이었다.
그 다음이 서경에 도사리고 있는 대령후다.진정 무서운 자가 대령후 일지도 모른다.
이 엄청난 분란을 야기시켜 놓고 저렇게 서경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물론 그것은 자신이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는 안도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움직이기에 유리하게 작용하게 될 것이다.
“야율강을 보내고 그 다음이 김보당을 척살한다. 역사대로 해 주지. 비록 시작도 못한 역사 때문에 죽게 되겠지만.”
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지금은 김보당이 활개를 치게 두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한 번 불나방처럼 날아봐라. 망할 놈!”
난 그런 생각을 하며 다음 일을 준비하기 위해 내 사택으로 향했다.백화가 생활하는 내실.백화는 차분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했다.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그시 입술을 깨물다가 또 인상을 찡그리는 것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것 같았다.
“죽어야 황룡이 승천하는 못이 열린다고.”
백화는 혼잣말을 뇌까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마도 백화는 지금 자신의 생부인 참지정사 강일천을 떠올리며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회생을 성심으로 돕는 다섯 명의 큰 인물들이 끝내 죽어야 하고 그 죽음에 한없이 슬퍼해야 황룡이 승천한다는 못이 생긴다는 늙은 상궁의 말에 백화가 고민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 죽어야 할 인물 다섯 중에 자신의 생부인 참지정사 강일천도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우선 진심으로 돕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백화는 자신의 생부인 강일천이 회생을 진심으로 돕게 만들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리 되면,,,,,,,,.”
끝내 죽어야 한다는 거다. 그게 아니라면 죽임을 당하다는 거고 물론 죽임을 당한다면 자신의 상공인 회생에게 당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 백화였다.
남편이 되고 자신에게 황후의 자리를 줄 회생을 도와야 할 것인가? 그게 아니면 자신의 생부를 살려야 할 것인가를 잠시 고민하는 백화였다.허나 백화는 참으로 잔인하고 표독스러운 성정을 지금까지 숨긴 여인이었다. 그리고 회생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의 생부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꿈이라면 꿈인 백화였다. 그래서 무비의 호위 무사장이 된 백화이기도 했다.
“약해지면 안 되지.”
백화는 자신의 결심이 선 듯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 도움을 청하면 될까?”
물론 참지정사 강일천이 회생을 돕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백화였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개천의 장을 열기 위한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백화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참지정사 강일천에게도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일이 틀어지면,,,,,,,.”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홍련이옵니다. 마님!
“들어오시게.”
백화가 짧게 말하자 조심히 문이 열렸다.사신관에 있는 고달기의 내실.
“아직도 그 악인이 살아 있단 말이냐?”
앙칼진 고달기의 목소리가 내실 밖에서까지 들렸고 지금 고달기의 앞에 서서 보고를 하고 있는 나인은 그저 고달기의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없는 듯 했다.악인!고달기에게만큼은 회생은 악인이 분명할 거다.
“그렇습니다. 할타가 그자를 노렸지만 도리어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도리어 죽임을 당해?”
“그렇습니다. 부인!”
나인이 고달기를 부인이라고 칭했다. 아마 가장 합당한 칭호일 거다.
“멍청한 놈!”
“그 일 때문에 고려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그래봐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지나가겠지.”
고달기는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인을 야릇한 눈빛으로 고달기가 봤다.
“내가 준비를 하라는 것은 어찌 되었느냐?”
“이것이옵니다.”
고달기의 물음에 나인이 조심히 품에서 작은 봉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효능은 확실하겠지?”
“그렇사옵니다. 벽란도에서 구한 것이니 그 효능은 확실할 것입니다.”
나인의 말에 고달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품겠다면 품게 만들어줘야겠지.”
고달기는 사악한 눈빛을 보였다.
“그건 그렇고 어찌 사용하는 것이냐?”
“향처럼 향로에 태우면 된다고 했습니다.”
“향처럼?”
“그렇습니다. 부인!”
“그건 그렇고 그렇다면 나까지 취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
“이것을 미리 복용하시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나인이 다시 품에 작은 약봉지를 꺼내 고달기에게 내밀었다.
“그래. 아주 너는 영민하구나! 내 너를 잊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부인!”
"너나 나나 고려에게 버려진 신세다. 그러니 너는 이제 나만 믿으면 되는 것이다."
"예. 부인!"
“곧 대인이 오실 것이다. 향로를 준비하고 주안상을 마련해라. 오늘밤이 가지전에 내가 그를 품을 것이다.”
“예. 알겠사옵니다. 부인!”
그렇게 고달기는 스스로의 미래와 회생을 죽이기 위해 야율강을 자신의 남자로 만들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빠르게 나인을 통해 향로가 준비가 되고 고달기는 나인이 준 해독제를 복용했다.그때 문밖에서 나인 하나가 급하게 들어와 고달기에게 목례를 했다.
물론 이 나인 역시 사신관으로 고달기와 함께 보내진 나인이었다.
“대인께서 도착을 하셨습니다.”
“그래 알았다. 너희들은 이제 나가봐라.”
“예. 부인!”
두 명의 나인이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 보니 야율강도 변변치 못한 위인이군. 회생 그놈 하나를 어찌하지 못하고 말이야.”
고달기는 인상을 찡그렸다.백화의 내실.백화와 홍련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일은 어찌 되었느냐?”
“아무 뒤탈도 없이 잘 처리를 했습니다.”
“잘 했다. 내가 너에게 자꾸 모진 일만 시키는구나.”
“아니옵니다. 마님!”
홍련의 말에 백화는 찬찬히 홍련을 봤다.
“이제 그리 부르지 말고 언니라 불러라.”
“예? 어찌 감히 제가,,,,,,.”
“같은 상공을 모시게 될 것인데 마님과 몸종 같은 관계는 이상하지 않느냐.”
“허나,,,,,,,,.”
“괜찮다. 그리 불러라. 내 후일 너의 공을 잊지 않을 것이다.”
백화의 말에 홍련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사실 백화가 너의 공을 잊지 않겠다고 말한 후에 늙은 상궁을 참살했다. 그렇기에 홍련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린 홍련이었다.
“감사합니다. 마, 아니 언니.”
“그래. 내가 그분 옆에 서고 너는 내 옆에 서게 될 것이다.”
“예. 언니.”
“절대 이번 일은 너와 나만 알아야 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홍련이 짧게 대답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백화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참지정사의 사택에 갈 것이다. 오늘이 가지전에 아버님과 담판을 지어야겠다.”
백화가 처음으로 참지정사 강일천을 아버지라고 말했다. 그 말에 홍련이 놀라 백화를 봤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지? 동생!”
“아, 아닙니다. 처음이시기에,,,,,,.”
“이제 부녀의 연을 다시 이을 때가 된 것이지. 이 모든 것이 다 상공을 위한 일이지.”
백화는 그렇게 말했지만 홍련의 귀에는 모든 것이 다 백화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들렸다. ‘무섭고 무서운 여자다.’홍련은 백화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무섭고 치밀한 백화이니 지금까지 그 영특한 회생을 속였을 것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언니.”
“그래. 이것이 다 상공을 위하는 일이고 또 나와 너를 위한 일이다.”
“예. 언니.”
“그건 그렇고,,,,,,,,.”
백화가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하지만 홍련은 백화의 눈빛만 보고도 지금 백화가 회생과의 합방을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또 황룡이 되실 분의 옆에 계신 분이 누가 되실 지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네.홍련의 머릿속에는 죽은 늙은 상궁의 말이 환청처럼 들렸다. 사신관에 마련된 고달기의 내실.야율강은 고려 황궁의 대전에서 명종황제와 은밀한 밀약을 맺고 사신관으로 돌아온 후에 고달기의 내실을 찾았다.
그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고달기를 찾는 것은 그녀의 미색이 출중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분명 있었다. 원래 강한 독을 가진 꽃이 더욱 매력적이니 말이다.
허나 야율강은 자신이 품기에는 너무나 고달기의 독기가 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스스로를 자제시키고 있었다. 황후의 상을 가진 고달기고 자신은 분명 황제가 아니니 고달기를 품는다는 것은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야율강이었다.
야율강이 내실로 들어서자 고달기는 한없이 슬픈 표정으로 야율강을 봤다.
“할타가 그리 허망하게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인! 상심이 크시겠사옵니다.”
“상심이라 그럴지도 모르지요.”
야율강의 눈빛은 할타가 죽은 것에 그리 큰 감정의 변화가 없는 듯 했다. 마치 잘 부리던 사냥개 하나를 잃은 그런 눈빛이었다.
사납고 말 잘 듣는 개가 죽은 것이 아깝기는 하나 그렇다고 상심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듯 했다. 사실 야율강과 할타는 그런 관계일 것이다.
태성이 거란인과 발해인이니 말이다. 천성적으로 거란인은 발해인을 싫어했고 발해인 역시 거란인을 오랑캐라며 무시를 했다. 또한 발해인이 금의 핵심인물인 반면 거란인 중에서는 유일하게 야율강이 금의 권력층에 속해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할타가 조금만 더 그 능력이 뛰어났다면 주종의 관계가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 새삼 느낀 것이지만 고려 무장의 무위는 정말 대단했소.”
야율강은 마치 자신의 눈 앞에 이의민이 서 있는 듯 고달기에 말했다.
“할타를 죽인 무장의 이름이 어찌 됩니까?”
“이의민이라고 했소.”
“이의민이라고요? 그 무장이 부월을 쓰지 않았나요?”
고달기는 마치 이의민을 아는 듯 물었다.
“어찌 알지요?”
“제 돌아가신 부친에게 들은 것이 있어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들었소?”
“맹호 같은 이의방에게는 그보다 더한 금강야차 이의민이 있다. 그가 쓰는 부월에 적은 추풍낙엽으로 떨어질 것이다.
무위로 따진다면 이 고려에 으뜸이 그겠지만 그릇이 작아 크게 될 인물은 아니다. 그리고 또 옆에 예리한 검을 쓰는 이고가 있는데 욕심이 없어 이의방의 벗이 된 인물이기는 하나 그 속을 알 수 없으니 무서운 인물이 분명할 것이다.”
물론 죽은 채원이 고달기가 말한 것처럼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자신의 아비가 능력 있는 무장처럼 느껴지기를 원한 고달기는 자신의 아비가 한 말을 추론하여 그렇게 야율강에게 말하고 있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이고라는 자는 벌써 대장군이더군요.”
“그렇습니다. 대인!”
“결국 할타가 고려 최고의 무장에게 당한 것이군. 그리고 모든 것이 다 내가 준비한 것처럼 그 놈도 준비를 했다는 거군.”
이 순간 야율강은 할타의 죽음보다 회생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내 실책으로 할타가 죽었군. 허나 후회도 미련도 없겠군. 최고의 무장의 손에 죽었으니 말이야.”
야율강은 할타의 죽음이 그리 슬프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야율강의 표정을 단 번에 읽어낸 고달기였다.‘내색할 필요는 없겠지.’고달기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야율강을 봤다.
“말씀은 그리 하셔도 상심이 크실 것 같아 슬픔을 잠시 잊으시라고 주안상을 마련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탁자 위에는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고 또 못 보던 향로에서는 은은한 향이 타고 있었다.
“못 보던 향로군.”
“제가 요즘 너무 표독해지는 것 같아 마음을 잡기 위해 향을 피웠습니다.”
고달기는 스스로 자신이 표독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건 다시 말해 예전에는 자신은 지금처럼 표독하지 않았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이 모두 고려와 이 회생이라고 야율강에게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분명 야율강의 눈빛은 사내 그 자체의 눈빛이 분명했다.
허나 자신을 품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야율강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야율강에게 그리 말하는 거였다. 물론 지금도 나인이 구한 미혼약은 은은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 환경이겠지.”
야율강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잔 받으십시오.”
고달기가 조심히 야율강에게 권했다. 그리고 술병을 든 손의 소매를 살짝 거둬 가녀린 손목이 야율강에게 잘 보이게 했다.또한 그 자체가 야릇하게 보이는 야율강이었다.
“향이 무척이나 은은한 것이 좋소.”
“예. 벽란도에서 구한 것입니다.”
“고려의 보물 중 하나가 바로 벽란도지.”
“예. 맞아요. 허나 고려만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부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야율강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여전히 술병을 들고 있는 고달기를 보며 탁자 위에 놓인 잔을 들었다.
“이 술을 받으시고 상심을 거두세요.”
물론 상심 따위는 하지 않는 야율강이었다. 고달기는 야율강에게 그렇게 말하며 술을 따르기 위해 살짝 상체를 숙였고 다소 느슨하게 입은 옷 사이에서 풍만한 가슴이 살짝 야율강의 눈에 보였다.
‘품지 않으려면 품게 만들 것이다.’진정 표독한 계집은 고달기 일 것이다. 그리고 고달기가 끝내 원하는 것은 야율강이 자신을 품고 자신을 위한 여불위가 되어 주는 거였다.
이 순간 여자의 몸은 야릇하게 신비롭고 남자의 심리는 묘했다. 계집의 몸이 훤히 다 보인다면 이런 묘한 기분을 야율강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살짝 그것도 찰나의 순간에 보이는 고달기의 가슴이 오늘 따라 묘하게 자극이 되는 야율강이었고 그 이유 중 하나가 여전히 은은하게 타고 있는 미혼향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