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13권 -- >
“그럼 대전에서 김보당이 요사스러운 세 치의 혀로 도참사상 참요만 황제께 아뢴 것입니까?”
순간 내 말에 내 양부인 최준이 날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난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말은 은연중에 마음이 담기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을 내 양부인 최준이 간파했다.
“나와 환관들을 모두 대전 전각에서 물리셨기에 무슨 밀담이 오고갔는지는 나도 모르네.”
이 순간 나를 시기하는 황제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기에 용손십이진 십팔자위왕을 통해 나를 팽시키려는 것 말고도 또 다른 밀담이 오고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의문이 생길 때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께서 나까지 의심하고 계시네.”
양부인 최준의 말에 난 양부를 물끄러미 봤다.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곧 올지도 모를 좋은 세상에 아버님께서 아니 계시면 그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소자가 기쁘지 않을 것이옵니다.”
내 말에 양부인 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이슬이 살짝 고이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부끄러운 듯 내가 보지 못하게 고개를 돌렸다.
내 양부인 최준은 은밀히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황궁을 빠져 나왔기에 내가 바로 그 엄청난 음모를 전하고 궁으로 돌아갔다. 이제 이 방에 남은 것은 나와 내가 해야 할 고민 그리고 선택이었다.
“고려가 풍전등화에 놓여 있는데 어찌 충신인 나를 믿지 못하고 자신을 폐위하려는 김보당을 옆에 둔단 말인가?”
난 나도 모르게 내 숙부인 명종의 그릇이 너무나 작다는 것에 한탄했다. 그리고 주인이면서도 대전에서 다른 이의 눈과 귀를 피해 밀담을 나눠야 했던 명종황제가 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 스스로 내게 척을 지려하고 있다는 거였다.
“나는 이제 어찌 한단 말인가?”
홀로 남은 이방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나였다.
“용손십이진 십팔자위왕이라,,,,,,,.”
그 뜻을 되새긴다면 참으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 분명할 거다.
“속으로 내가 용손이니 왕씨이고 불리는 것은 이 씨이구나. 허나,,,,,,,.”
이 순간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어쩌면 나는 용손인 왕 씨도 불리는 이 씨도 아닐지도 몰랐다. 항상 머리에 맴도는 또 하나의 성과 이름이 있으니 말이다.
“모든 이름에는 그 정해진 뜻과 길이 있단 말인가!”
지그시 입술이 깨물어지는 순간이다. ‘최. 충. 헌!’난 차마 내 스스로 입에 담지 못하고 마음으로 그리도 싫은 최충헌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그리고 떨리는 손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동경으로 향했다.
“모든 이름에는 그 정해진 뜻과 길이 정해져 있다.”
결심을 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조심히 또한 떨리는 마음으로 동경을 봤다. 사실 애써 보지 않으려고 했던 동경이었다. 그런데 지금 결정의 순간 나는 다시 동경을 본다.
“이름대로 살 것이다.”
만약 동경에 비친 내 이름이 이 회생이면 내 할마마마인 태후께 말한 무인본분 위국헌신의 마음으로 살 것이고 그 이름이 왕 회생이면 도참을 예언으로 믿고 따를 것이다. 그것도 아니고 그대로 이름이 변하지 않는다면 하늘이 내게 준 그 이름대로 살겠다는 결심을 했다.
난 동경을 앞에 놓고 이 순간 차마보지 못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두려운 것이다.
내 운명이 어떻게 흐를지 나 스스로도 두려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결정을 해야 할 순간이었다.날이 밝으면 나는 고려를 화가 될 야율강을 상대해야 하니 말이다.
물론 동경에 비친 내 이름이 무엇이든 우선은 야율강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내 숙명대로 살 것이다.”
난 지그시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동경에 새겨진 듯한 내 이름을 보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후회도 미련도 없이 동경에 새겨진 이름대로 살 것이다.
“이 이름을 위하여!”
이제 모든 결정이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이름을 향해 그리고 그 이름의 뜻을 위해 달리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급한 불부터 끄는 것이 옳다.”
그런 중얼거림과 함께 난 금나라 순문사 야율강의 얼굴이 떠올랐다.대전 앞뜰에 마련된 연회장.악공들의 요란한 연주소리가 대전 전각 앞에 울려 퍼졌고 그 연주와 함께 금나라 순문사 야율강의 환심을 사기 위한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마 오늘이 고려 사초에 기리 남을 가장 치욕스러운 날이 분명할 거다. 하지만 그 치욕 위에 난 내가 꾸민 모든 계획을 담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위해 움직일 것이다.악동의 흥겨운 연주에 맞춰 무희들의 관능적인 춤사위가 이어졌고 연회장 상석에는 이 고려의 지존이기를 스스로 간절히 바라는 명종황제와 함께 도도한 눈빛을 보이며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야율강이 앉아 연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씹어 삼켜도 시원치 않을 놈!’난 이의방의 옆에 앉아 찰나의 순간이지만 야율강에게 한없는 분노를 뿜어냈다. 하지만 생각을 한다고 해서 행동으로 모든 일을 옮길 수는 없었다. 어떻게 되었던 그를 안전하게 금으로 돌려보내야 고려에 평온이 찾아올 것이고 또한 내가 꾸민 모든 일들이 이루어질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진정한 순망치한의 관계는 금과 고려일 거다.’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초원에 그녀석이 무럭무럭 고난을 겪으며 자라고 있으니 말이야!’내가 그 녀석이라고 말한 자는 겨우 한 무리의 부족에 불과한 몽골족을 통합하여 진정 해가지지 않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을 말하는 거였다.그가 어쩌면 진정한 고려의 적이고 내 말년의 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겨우 지금은 늑대 새끼에 불과하고 나이로 따진다고 해도 8살에 불과한 아이지만 그가 성장해 진정한 초원의 푸른 늑대가 되어 그를 부를 때 테무친이라고 부르지 않고 칭기즈칸이라고 불리게 되면 이 대륙에 있는 모든 나라들이 그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제일 먼저 멸망할 나라는 금이 될 것이다.그렇게 된다면 곧 고려가 전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힘을 키워야 할 거고 그러기 위해서는 깊은 새벽의 옹골진 결심을 이제는 하나씩 실행에 옮겨야 했다.
“내 결단이 옳은지 모르겠군.”
내 옆에 앉아 있는 이의방이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며 내게 말했다. 그도 고려의 진정한 무장이기에 저리도 무도한 야율강이 곱게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오늘의 치욕이 새로운 고려를 만들 것이옵니다.”
난 고개를 돌려 나직이 이의방에게 말했다.
“오늘의 치욕이 새로운 고려를 만든다? 그 고려는 누구를 위한 고려인가?”
이의방 역시 취한 듯 보였다. 아마도 홧김에 마신 술이라 더욱 취하는 것 같았다.
“고려는 누구의 것도 아니옵니다. 고려는 오직 고려이옵니다.”
“고려는 오직 고려다?”
“그렇사옵니다.”
“그런가? 나는 이 고려가 나와 내 사위의 고려가 되었으면 하네.”
순간 난 속으로 놀라 이의방을 봤다.취중진담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도 이 씨의 성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될 것이옵니다.”
“그러고 보니 부마도위의 관복이 사위에게는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군.”
“그렇사옵니까? 저는 불편하기 짝이 없사옵니다. 황명으로 관복을 입기는 했으나 무장에게는 갑주가 제격인 것 같사옵니다.”
“그런가? 사위는 지금도 부마도위고 앞으로도 부마도위겠지. 또한 고려가 바뀌어도 부마도위일 것이고.”
“예?”
“하하하!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새로운 고려를 위해 오늘의 치욕을 감내하라고.”
아무리 술에 취해도 스스로의 망언을 수습할 여력이 아직 남아 보이는 이의방 같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은 취중진담을 한다는 거다.
“그건 그렇고 이별장이 자네 뒤에 서 있군.”
이의방이 말하는 이 별장은 이의민을 말하는 거였다.
“제가 견룡행수의 직을 수행하지 못해 혹시 몰라 불렀사옵니다.”
내 말에 이의방이 이의민을 봤고 이의민이 바로 머리를 숙여 목례를 했다.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하하하! 그러고 보니 내 정무가 바빠 자네를 찾지 못했군. 아직도 별장이군.”
“직급이 무엇이 중요하겠사옵니까? 위위경을 모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여한이 없사옵니다.”
“미안하게 되었네. 그래도 자네와 나는 거사동지인데 내가 너무 무심했어.”
“아니옵니다.”
“곧 자네를 내가 찾지.”
“기다리고 있겠사옵니다.”
“그래. 참 오늘 기분이 좋지 않아.”
순간 이의방이 야율강의 눈치를 보며 황제답지 않게 그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명종황제를 노려봤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위위경 이의방은 자신의 눈빛을 숨겼다.
“이렇게 소신을 위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주시는 것은 감사하오나 아직 소신은 황제폐하께서 내리실 답을 듣지 못하였사옵니다.”
한없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명종황제를 압박하는 야율강이었다. 하지만 야율강 역시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이 연회에 숨겨진 뜻을 잘 알고 있기에 저렇게 표정이 여유로운 걸 거다.
“짐이 곧 그대와 금 황제께서 흡족해 하실 칙서를 내릴 것이오.”
“그렇사옵니까?”
“그렇소. 그러니 심려치 마시고 연회를 즐기시오.”
“예. 황제폐하!”
“오늘은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짐과 함께 대취를 합시다.”
명종황제는 야율강에게 술을 권했다.
“예. 황제폐하! 그리 하겠사옵니다. 그러고 보니 무희들의 춤사위가 예사롭지 않사옵니다.”
“그러시오?”
“예. 그렇사옵니다. 진정 고려에는 절세가인들이 참으로 많은 것 같사옵니다.”
“하하하! 아무리 그래도 대국 금에 비교하겠소.”
“아니옵니다. 금의 여인들은 너무나 강인한 전사들을 낳는 어미들이라 저리 야들야들한 맛이 없사옵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명종황제는 야율강의 망언에 인상을 찡그렸다. 허나 힘이 없는 나라의 황제이니 금세 표정을 고치고 어쩔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시오?”
“예. 그렇사옵니다.”
그렇게 야율강과 명종황제가 이야기를 나눌 때 금나라 사신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 거나하게 대취를 한 무장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폐하!”
목소리가 우렁찬 것이 대취를 해서인지 아니면 타고난 기개가 강인해서인지 연회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저벅! 저벅!그리고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연회장 중앙에 섰고 난 그를 봤다.
금나라 순문사 일행을 호위하는 수호무장인 할타라는 자였다. 허리에 검을 차고 대전으로 들어왔다가 내게 제압을 당한 바로 그 장수였다.
할타가 연회장 중앙에 서자 춤을 취고 있던 무희들이 물러났다.
“할타라 하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명종황제는 갑작스럽게 연회의 흥을 깨는 할타를 보며 물었다.
“이렇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주시어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그러신가? 그럼 그대도 짐과 함께 대취를 하세.”
“이미 소장은 대취를 했나이다.”
그리고 보니 얼굴에 홍조를 뛰는 것이 취하긴 많이 취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취했고 무도한 오랑캐라고해도 이렇게 함부로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뭐지?’난 할타가 뭔가 일을 꾸미기 위해 나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폐하! 소장이 금의 무장으로 이 흥겨운 연회에 더욱 흥을 더하기 위해 검무를 추고자 하옵니다. 허락해 주시옵소서.”
할타가 명종황제에게 그렇게 말하고 그 순간 나를 봤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나를 향해 뿜어지는 살기를 난 다행이도 느끼고 있었다.
“검무라 했는가?”
“그렇사옵니다. 절세가인들의 춤사위를 봤다면 진정한 무장들의 검무가 이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사옵니까?”
할타의 말에 명종황제는 야율강을 봤다.
“대취를 한 것 같은데 괜찮겠소?”
“할타장군은 금제국에서도 이름이 높은 무장이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그런가? 하하하! 그렇다면 오늘 짐이 금의 무장의 기개를 한 번 보기로 하지.”
명종황제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 순간 할타가 허리에 차고 있던 대도를 뽑았다.
스르릉!검이 뽑히는 소리가 마치 내 목을 향하는 섬뜩함이 느껴졌다.‘이것이었나?’순간 난 할타가 검무를 통해 나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은 지난 밤 나를 노렸던 그 괴한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사옵니다.”
또 다시 할타가 나를 힐끗 봤다. 여전히 뿜어지는 살기가 느껴졌다.
‘야율강에게 이 연회의 진정한 목적은 나를 척살하는 것이군.’떨리고 두려운 순간이지만 이상할 만큼 냉정해지는 나였다. 그리고 난 살짝 고개를 돌려 이의민을 보고나서 이의민에게 눈치를 보냈다. 그리고 이의민도 알았다는 듯 내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폐하! 신 부마도위 한 말씀 아뢰겠나이다.”
막 검무를 추려는 할타였지만 내가 일어서자 나를 보며 멈췄다.
“무엇인가? 부마도위!”
“금의 대장군이신 할타가 황제폐하와 순문사 대인을 위해 저리 검무로 흥을 더하겠다고 하니 고려의 무장들도 가만히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그래서 고려의 무장도 부족하기는 하나 할타 대장군의 검무를 거들고자 하옵니다.”
“검무를 거든다?”
“그렇사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군.”
명종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과 검이 검무를 추는 것보다 검이 검무를 추고 부월이 부월무를 춘다면 더욱 흥이 더해질 것이옵니다.”
“하하하! 검과 부월이 겨룬다?”
“그렇사옵니다. 황제폐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부족하지만 이 연회의 흥을 더해 보겠나이다.”
“그것도 좋다. 오늘 짐이 형제국인 금의 무장의 검무와 짐의 충성스러운 무장의 부월무를 보며 연회를 즐길 것이다.”
명종황제의 허락이 떨어졌고 그 순간 이의민이 옆에 놨던 거대한 부월을 들고 연회장 중앙에 섰고 그와 동시에 마치 이 둘은 검무가 아닌 진검 대련을 하듯 서로를 노려봤다.
“소장 이의민이라 하옵니다. 부족하오나 대장군의 검무에 흥을 더하겠사옵니다.”
“하하하! 그것도 좋지.”
그 순간 할타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