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12권. -- >
“만나지도 않고 말만 전하겠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도 묻지 않고?”
“인삼 때문이지 않습니까?”
만적의 말에 조필지 상단의 행수는 당황했다.
“어찌 알았느냐?”
“이 황도 개경에 있는 사람이면 삼척동자도 지금 조필지 어른의 상단이 인삼을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다 알 겁니다.”
듣고 보니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드는 조필지 상단의 행수였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어린 하인을 보내는 것은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상단 하인이 만적을 꾸짖듯 말했다.
“물론 그렇지만 일개 하인이 낄 자리도 아니지.”
순간 만적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뭐라?”
“나는 어른의 명을 받고 말을 전하려 온 사람이지만 당신은 그저 행수를 따라 나선 길잡이이지 않습니까?”
대찬 면에서 만적을 상대할 위인들이 아니기에 만적의 말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당찬 아이구나!”
허나 아이에게 당황한 빛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는지 조필지 상단의 행수가 만적을 칭찬하듯 말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좋다. 우리는 인삼을 거래하기 위해 왔다.”
“어른도 그리 알고 있습니다.”
이 순간 만적은 애매하게 말끝 마다 어른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 어른이라는 의미는 회생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꼭 집어서 말한 것이 아니기에 차후에 문제가 될 소지 자체가 없었다.
“그럼 우리 상단이 후하게 가격을 쳐 줄 것이니 어른께 다시 우리에게 인삼을 팔라고 전해라.”
역시 다급한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는 법이다.
“어른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만적의 말에 조필지 상단의 행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네가 말한 것처럼 우리 조필지 상단이 인삼이 필요한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고 그리고 인삼을 매점한 것이 너의 어른이라는 것 역시 삼척동자도 다 아는데 없다고?”
“그렇습니다. 없습니다.”
“가격을 더 후하게 받기 위함이냐?”
조필지 상단의 행수가 만적을 째려보며 물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왜 자신이 이 어린 아이를 상대하고 있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지금 시세가 은자 210냥이지만 더 주신다고 해도 인삼은 없습니다.”
이건 최소한 은자 210냥 이상을 줘야 한다는 소리로 들리는 조필지 상단의 행수다.
“인삼이 없는데 지금의 시세를 애써 말하는구나.”
그래도 장사에 이골이 난 조필지 상단의 행수라 만적이 말한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듯 했다.
“시세가 그렇다는 겁니다. 어른께서,,,,,,,.”
만적은 말끝마다 어른이라고 말했다. 마치 자신은 말을 전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우리 상단은 인삼 한 근당 금자 3냥을 줄 것이다.”
사실 행수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조필지에게 언질을 받은 것이 있었다. 금자 3냥도 좋으니 어떻게든 500근의 인삼을 구하라고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금자 3냥이 아니라 5냥을 줘도 없다 하셨습니다.”
“이곳에 인삼이 있다는 것을 다 아고 있는데 안 팔겠다는 건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실 찜 쪄 먹었습니다.”
만적은 그렇게 말하고 품에서 홍삼을 꺼내 조필지 상단의 행수에게 보였다.
“뭐라? 찜을 쩌 먹어?”
“그렇습니다. 보십시오.”
이 시대에서는 홍삼의 효능을 아는 자는 없었다. 또한 홍삼을 본 자도 없었다. 그러니 만적의 손에 들려져 있는 말라 비틀어져 있는 홍삼을 보고 기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이 귀한 것을,,,,,,,.”
“없습니다. 괜한 걸음 하시게 해서 죄송하다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다 없는 것이냐?”
“우선은 그렇습니다.”
만적은 그렇게 말하고 씩 웃었다.
“우선은?”
이 말을 통해 있어도 없고 조필지 상단에서 더 후한 가격을 제시하지 않으면 팔지 않겠다는 뜻을 전한 거였다.
“그렇습니다. 우선은?”
“매점을 해서 독점을 하는 것도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곧 인삼밭에서 인삼이 출하된다.”
“아! 그에 대한 답도 어른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뭐냐?”
“남변은 멀고 길이 험하고 또한 도적이 들끓어 쉽게 개경까지는 올라오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개경 삼밭의 5할은 어른의 것이니 인삼이 나온다고 해도 조필지 상단이 구할 양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옵니다.”
이건 만적이 행수를 압박하는 거였다.
“허나 5할이 남아 있다.”
이제 배포의 대결이 펼쳐지는 거였다.
“아! 그렇군요. 그리 전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왕준명은 궤짝에 은자를 가득 담아 회생이 점유하지 못한 삼밭 주인들을 만나기 위해 떠난 상태였다.
“진정 팔지 않겠다는 것이냐?”
“저는 모릅니다.”
“우리 상단은 금자 3냥을 줄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바뀌면 연통을 하라고 전해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삼 가격이 겨우 금자 3냥만 하겠습니까?”
“뭐라?”
“오르면 올랐지 더 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리지만 이미 조필지 상단의 행수를 압박하고 있는 만적이었다.
“으음,,,,,,,.”
조필지 상단의 행수는 신음소리를 내다가 더 말을 해 봐야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 상단과 척을 지면 송의 물품을 받기는 어렵다고 네 어른께 전해야 할 것이다.”
조필지 상단의 행수가 말한 것처럼 송나라에서 들어오는 물품들을 조필지 상단이 독점하고 있었다.
“척을 지신 것은 조필지 상단이 먼저인 줄 압니다.”
“뭐라?”
“저희 어른이 점포 10개를 매입하고 장사를 하실 때 의도적으로 송상들과 연합하여 물품의 판로와 구입로를 막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네가 어찌 아느냐?”
다소 놀란 눈빛을 조필지 상단의 행수는 숨기지 못했다.
“그 일 때문에 이밥 먹다 보리죽을 먹으니 어린 저도 알게 되었습니다.”
“으음,,,,,,,.”
다시 조필지 상단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가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횅하니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만적이 그의 등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불이 나면 다급해 질 것이다.
’대전.용상에는 명종황제가 최대한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그의 앞에 유일하게 검을 찬 견룡행수인 내가 명종황제를 호위하듯 서 있었다. 또한 만조백관들이 명종황제의 접견을 기다리고 있는 야율강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이는 불만에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는 숨을 졸이고 있었다.
하여튼 이 자리에 모인 만조백관들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금나라 사신 야율강!그 자체만으로도 어깨를 진누르는 중압감을 느끼는 것이 분명했다.
‘겨우 오랑캐에게 벌벌 떨다니.’난 속으로 짜증이 밀려왔다. 물론 이것은 힘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30년 넘게 무신들이 천대받고 괄시를 당했으니 군사력은 형편없는 수준이 된 것이다.
“고려가 금의 속국도 아닌데 꼭 이렇게까지 눈치를 봐야 합니까?”
이소응이 옆에 있는 황족인 왕거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건 문무백관들이 모두 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인종폐하의 치세에는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인종 때에는 그래도 척준경이라는 걸출한 무장이 있었으니 말이다. 또한 꽤나 강한 군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존재도 군대도 없었다.
정말 척준경이 올바른 충심을 가진 무장이었다면 우리는 고려사 하면 윤관이나 최영을 떠올리지 않고 척준경을 떠올렸을 거다.허나 그는 기회주의자이면서 표리부동한 자였다.
이자겸과 합심하여 반란군을 이끌고 황궁까지 난입한 위인이 바로 척준경이었고 또한 인중의 간절한 설득에 넘어가 이자겸에게 검을 돌린 인물이기도 했다. 역사는 인종의 설득에 탄복되어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때의 상황을 내가 보지 못했으니 난 그냥 이렇게 척준경을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정의한다.
기회주의자!
“북변의 방비를 튼튼하게 한다면 이렇게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을 것인데.”
뚫린 입이라고 잘만 씨부리는 이소응이었다.
“그러게 말이요.”
“정말 척준경 상장군께서 지하에서 통곡을 할 일입니다.”
이 둘의 이야기에 문무백관들이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이 둘을 노려봤다.항상 이렇게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족속들은 있는 법이다. 월래 왕거야 워낙 주책없는 왕족이라 그렇다고 치지만 이소응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제법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척상장군의 부장으로 초산의 전장에서 금나라 오랑캐의 수급을 벤 것도 수백이었는데,,,,,,.”
난 바로 이소응이 왜 척준경을 떠올리는지 알 것 같았다.‘척준경의 부장이었군.’난 그제야 이유를 알았다. 하지만 지금 썩어 이제는 흙이 되어버린 척준경을 찾아본들 달라질 것은 없었다.
“괜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보다 못한 참지정사 강일천이 낮게 질책을 하듯 두 늙은 것들에게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참지정사!”
이소응은 참지정사의 말에 아무 말도 못했지만 왕거는 그래도 황족이라고 참지정사에게 한 마디 했다. 그 순간 위위경인 이의방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명을 재촉한다.’난 예전 태자비 간택 때에 왕거가 이의방에게 잘못 보인 것이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 또 다시 얼마 남지 않은 명을 재촉하고 있는 거였다.
‘왕거가 죽으면 염전은 내 것이 되나?’그가 죽던 말든 내가 죽이든 말든 상관이 없다. 그가 가지고 있는 염전이 내게는 중요했다.
‘곧 일을 꾸며야겠군.’물론 야율강의 일을 잘 처리하고 난 후의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잠시의 분란이 가시고 나자 다시 대전의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그저 참지정사는 너무나 나약해진 고려 조정을 한탄하는 듯 보였고 이의방은 어떻게든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명종황제의 옥좌를 유지시키려 하는 듯 보였다.
‘알다가도 모를 분이란 말이야!’정말 내가 아는 위위경 이의방은 많은 얼굴을 가진 인물이 분명할 거다. 결단력이 있고 또한 고려를 걱정하는 것으로 본다면 충신이나 이렇게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할 때를 보면 난신적자의 표상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때 대전 밖에서 야율강의 입조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금나라 순문사 야율강이 황제폐하를 알현하기를 청하옵니다.”
어제부터 고려 황실은 금나라 순문사인 야율강을 기다리며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이렇게 형식적으로는 야율강이 명종황제를 알현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요식행위가 분명했다.명종황제는 인상을 찡그렸다.
“들라하라!”
그와 동시에 금나라 순문사 야율강이 당당히 허리를 펴고 대전에 들어섰고 그의 뒤에는 검을 찬 무장 둘이 야율강을 호위하듯 서 있었다.‘대전에 검을 차고 들어와?’검을 찬 금나라 무장 둘을 보고 내 눈동자는 사나워졌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황제의 신변을 보호하는 견룡행수다. 그건 다시 말해 내가 나서야 할 때라는 거였다.
아무리 금이 지금 스스로 고려의 상국을 자처하고 있지만 누구도 검을 차고 대전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다. 이건 일개 사신이 고려전체를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금나라 순문사 일행은 걸음을 멈추시오.”
내가 당당하면서도 무겁게 말하자 금나라 순문사 일행보다 부복을 하고 있는 문무백관들이 더 놀라 나를 봤다. 아마 주눅이 든 자들에게는 내 행동이 괜한 돌발 행동으로 보일 것이다. 허나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고려 황실의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왜 그러는가? 견룡행수.”
금나라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문하시중 조영인이 다급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문하시중의 자리를 날로 먹었으니 저러는 것이 분명할 거다. 한 것이 없이 자리를 차지한 자들은 저렇게 주변의 눈치를 보는 법이다.‘조정을 쇄신하기 위해서는 조영인 너부터 낙향을 해야 해!’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전에는 견룡행수인 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검을 차고 들어설 수 없습니다. 혁명 벽상공신이신 위위경도 참지정사께서도 검을 차고 입조하지 않으십니다.”
난 마치 꽉 막힌 사람처럼 말했고 내게 말했던 조영인은 정말 나를 보며 융통성이 이리도 없냐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견룡행수! 지금은 사신을 접견하는 자리요.”
“사신이 아니라 그 누구도 검을 차고 대전을 들어설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금의 황제폐하라고 하더라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겁니다.”
내 말에 다시 조정신료들은 기겁을 했다.또한 찰나의 순간이지만 야율강의 뒤에선 무장들이 내게 살기를 뿜어냈다. 하지만 야율강은 그런 나를 보며 살짝 웃을 뿐이었다.
그에 반해 용상에 앉아 있는 명종 황제도 다소 놀란 눈빛으로 나를 봤다. 그저 이의방은 내가 이런 행동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듯 씩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나를 통해 금나라가 얼마나 대차게 나올지 보려는 것 같았다. 물론 나 역시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이렇게 행동하는 면도 있었다.
“그래도,,,,,,,.”
“옳은 말입니다. 문하시중. 고려제국의 대전입니다. 그리고 황제폐하의 앞입니다. 누구도 검을 차고 대전에 들어설 수는 없습니다.”
위위경인 이의방이 내 편을 들자 조영인은 더욱 인상을 찡그릴 뿐이었다. 그리고 난 바로 당당히 앞으로 걸어 나가 금나라 순문사 야율강의 앞에 섰다.
“견룡행수입니다.”
“우린 구면이지요. 부마도위!”
난 견룡행수라고 말했지만 야율강은 나를 부마도위라 불렀다.
“그렇습니다.”
“대국에서는 무장에게 검을 빼앗는 것은 모욕을 주는 것이요.”
그건 고려도 마찬가지다.
“그렇습니까? 허나 고려에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법입니다. 또한 진정한 무장이라면 예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함부로 검을 빼앗는 것도 잘못이지만 검을 소지하지 말아야 할 곳에 검을 차는 것도 무인의 도는 아닌 줄 압니다.”
“그런가요?”
야율강은 제법 부드럽게 말했다. 허나 야율강의 뒤에 있는 무장 둘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허나 저들도 쉽게 뭐라 하지는 못할 것이다. 예리한 검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른 말이니 말이다.
“검을 찬 무장은 누구도 대전에 설 수 없습니다.”
“허나 이들은 고려의 신하가 아닙니다. 부마도위!”
“그렇지요. 허나 이곳은 고려입니다.”
난 최대한 당당하게 나갔다. 비록 지금 이 순간 야율강이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내 당당한 행동이 무척이나 놀라는 눈빛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의방도 그런 야율강을 관찰하는 것 같았다.
“고려지요.”
“검을 저에게 주시든 대전 밖에서 기다리시든 둘 중 하나를 택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는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무장해제를 시켜야 합니다.”
무식할 만큼 강하게 나갈 때는 강하게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