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12권. -- >깊은 밤. 야율강의 처소.야율강은 책상 위에서 지금까지 자신이 그리고 확인한 것을 종합하고 분석하고 있었다.
“내가 조사한 것이 확실하다면 고려의 총 병력은 5만이 넘지 않는다.”
야율강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송과 연합을 한다면 20만의 대군이 되지. 비겁하고 나약한 송과 다르게 고려의 병사들은 강군이다. 절대 송과 연합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할타이옵니다.”
조금 전 채원의 딸을 데리고 나간 무장이 바로 할타였다.
“들어오시게.”
야율강의 말에 할타가 조심히 문을 열었고 그의 뒤에는 작은 주안상을 든 채원의 딸이 할타를 따랐다.
“깊은 밤에 적적하실 것 같아 준비했사옵니다.”
야율강은 할타의 뒤에 있는 채원의 딸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계집에는 흥미가 없는 것을 모르는가?”
“잘 알고 있기는 하나 고려 조정에서 보낸 여인입니다. 취하지 않는 것도 대국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준비를 했습니다.”
“대국의 도리가 아니다?”
야율강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렇습니다.”
할타의 말에 야율강이 힐끗 채원의 딸을 봤다.
“소장은 나가보겠습니다.”
할타는 그렇게 말하고 급하게 밖으로 나섰다. 사실 할타는 금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야율강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이곳으로 온 나인 중에 가장 반반한 계집인 채원의 딸을 골라 야율강에게 보낸 거였다.
“들고 있는 것이 술인가?”
“그렇습니다.”
“술과 계집이라. 고려가 약해지긴 약해졌군.”
야율강이 피식 웃었다. 야율강의 웃음에 채원의 딸이 야율강을 뚫어지게 봤다.
“그리 보이십니까?”
순간 다소 당돌한 채원의 딸의 말에 야율강이 채원의 딸을 뚫어지게 봤다.‘경국지색의 상이군. 나라를 망하게 할 상이다. 그런데 어찌 태후의 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야율강은 그렇게 말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야율강이 말한 경국지색의 의미는 일반적인 의미와는 달랐다.
“뭐라고 했는가?”
“고려가 대인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십니까?”
“그럼 아니라는 건가?”
“고려는 새롭게 강해지고 있사옵니다.”
채원의 딸의 말에 야율강이 인상을 찡그렸다.
“고려가 강해지고 있다?”
“그렇사옵니다. 고려는 지금 무신들이 권력을 잡고 있사옵니다. 잊으셨습니까? 척준경이라는 무장을?”
채원의 딸의 말에 야율강은 인상을 찡그렸다. 사실 척준경이라는 이름을 듣는 거란인 들은 모두 다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보통이었다.
“으음,,,,,,,.”
“지금 척준경보다 더한 무장들이 고려의 권력을 잡고 있습니다.”
“내게 그 말을 해 주는 이유가 뭔가?”
야율강의 물음에 채원의 딸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누구였다고 생각을 하옵니까?”
야율강의 물음에 채원의 딸은 대답 대신에 자신이 질문을 했다.
“뭐라?”
“저는 이틀 전까지만 해도 이 고려의 태자비가 될 여인이었습니다.”
순간 야율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태자비가 될 여인이 어찌 사신을 밤 시중을 드는 나인으로 전락을 했단 말인가?”
“제 아비가 간악한 무신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저 역시 관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거짓말 같은 말이지만 믿어지는 야율강이었다.
“그러신가?”
“그렇사옵니다.”
“그런데 내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금나라 황상을 모시게 해 주십시오.”
순간 야율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 네가 황제폐하의 비가 되겠다고?”
“그렇사옵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고려를 드리겠사옵니다.”
채원의 딸의 말에 야율강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역시 나라를 망하게 할 상이군.”
“제 관상이 그렇사옵니까?”
“그래. 그대의 관상은 그렇다.”
“그렇다면 망할 나라는 정해져 있사옵니다. 고려가 망하게 될 것이옵니다.”
채원의 딸의 말에 다시 한 번 야율강이 지그시 채원의 딸을 봤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고달기라 하옵니다.”
사실 채원의 딸의 이름은 채은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이름을 고달기라 말하는 채원의 딸이었다.
“고달기?”
“그렇습니다. 고려를 망하게 할 여자 달기가 될 것이옵니다.”
달기!달기는 자(字) 달(?). 성(姓) 기(己)이다. 상(商)나라 출신으로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주왕은 학정(虐政)을 간(諫)하는 현신(賢臣)의 말은 듣지 않고 달기의 말만 잘 들었다고 한다. 주왕과 달기는 사람들에게 잔인한 형벌을 가하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데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위를 걷게 하여 미끄러져서 타 죽게 하는 포락(?烙)의 형을 구경하면서 웃고 즐기거나 돈분(?盆)이란 형을 만들어 죄수들을 구덩이에 독사와 전갈을 집어넣고 그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충신 비간(比干)이 죽음을 당한 일도 달기의 교사(敎唆) 때문이라고 하는데 달기는 주왕에게 자신의 심장병이 나으려면 비간의 심장을 먹어야 한다고 했고 이것을 들은 주왕이 충신 비간을 죽였다 한다. 또한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말도 연못을 술로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놓고 즐기던 주왕과 달기의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유흥행위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여하튼 그 달기는 주나라 유왕(幽王)의 애비(愛妃)인 포사(褒?)와 함께 중국 역사상 음란하고 잔인한 대표적인 독부(毒婦)로 되어 있다.
“고려를 망하게 한다?”
“그렇습니다. 대인!”
“너의 말이 참으로 요망하다. 요망한 것을 금으로 데려가 비로 만들 수는 없다.”
“그렇사옵니까?”
“그렇다. 너 같이 요망한 것은 반드시 화가 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저는 이곳에 남아 송나라의 사신을 기다릴 것이옵니다.”
채원의 딸인 고달기의 말을 들은 야율강이 인상을 찡그렸다.
“남아서?”
“송으로 가서 고려와 금을 망하게 할 방법을 찾을 것이옵니다.”
“뭐라? 요망한 것!”
야율강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뽑아들었다.
“베소서. 그렇지 않는다면 저의 한이 금과 대인에게까지 미치게 될 것이옵니다.”
고달기가 야율강을 노려봤다.
“참으로 요망한 계집이다.”
“저를 이렇게 만든 것은 고려고 또 패악한 무신들입니다.”
“황제 폐하의 비가 될 수 있겠느냐?”
“금으로 데려만 가 주신다면 무엇이든 될 것이옵니다.”
고달기의 말에 야율강이 다시 고달기를 봤다.‘나라를 망하게 할 상이면서도 태후의 상이다. 망할 나라가 고려로 정해진다면 금의 태후가 되는 상이다.’이 순간 야율강은 고달기의 묘한 매력에 빠져 들고 있었다.
“앉아라. 어디 전 고려 태자비의 술이나 받아보자. 하하하!”
야율강은 이 순간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채원의 딸인 고달기는 스스럼없이 야율강에게 술을 따랐다.‘회생과 고려를 반드시 부셔버릴 것이다.
’스스로 고달기가 되기로 다짐을 한 채원의 딸이 그렇게 또 다시 다짐을 했다.2. 자중지란에 빠진 고려황실.한성 북한산 산중 분지.수백에 달하는 청년들이 열을 맞춰 실전대련을 하고 있고 다른 열에는 날이 선 장검을 든 사병들이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의 군사 훈련을 강도 높게 진행하고 있었다.
각종병장기를 든 모습과 갑주를 차려입은 모습이 고려의 중앙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또한 그들의 이마에는 노란색 띠를 동여매여 있고 그 노란색 띠에는 도천밀교라 적혀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한 의지가 가득해 보였다.
지금 당장 출정을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그런 그들의 모습을 멀리서 사열을 하듯 지켜보는 남자가 있었다.
지관!그는 이고의 기억에 있는 바로 그 지관이었다. 그리고 그 지관의 옆에는 나무로 된 의자에 앉아 검은 갓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지관과 같이 수백의 청년들이 훈련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출정을 할 수 잇을 만큼 사기가 충천해 있습니다. 분주.”
지관이 의자에 앉아 있는 검은 갓을 쓴 사내에게 말했다.
“암 그래야지! 저들이 장차 도천의 세상을 열 주춧돌이 될 것이야!”
“이곳 한성 분주를 비롯해서 익주와 해주를 비롯해 16개 분주에서도 이와 같이 병력이 양성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북한산 산중 분지에만 해도 수백에 달하는 청년들이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곳이 16곳이나 더 있다니 그들이 만약 거병을 한다면 총 장졸의 수만 해도 1만은 될 것 같았다.
“허나 모두가 김본주를 따른다고 볼 수는 없지.”
“그렇습니다. 도천밀서가 나타나지 않는 한 하나로 뭉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럴 것이야!”
검은 삿갓을 쓴 사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그 일은 어떻게 진행이 되고 있나?”
“이고를 말하는 것이옵니까?”
“그렇지. 중심이 될 자가 있어야 하고 또한 황궁 문을 열 자가 있어야 하네. 사실 김본주를 과거의 은원을 잊고 받아드린 것 역시 우리를 들어내지 않고 앞에 새울 자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네.”
“알고 있습니다. 한성 분주.”
“그러니 이고를 잘 이용해야 할 것이네.”
“예. 그래서 용손 십이지 십팔자위왕이라는 도참 중에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이미 혼을 빼놓은 상태입니다.”
지관의 말에 검은 삿갓을 쓴 자가 고개를 돌려 지관을 봤다.
“말이 안 된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본교에서도 본교의 예언을 믿지 않는다면 누가 미륵의 세상을 열겠는가?”
“예?”
한성 분주의 말에 지관은 놀라 기겁을 했다.
“그, 그럼,,,,,,,.”
“도선께서 묘향산으로 들어가시어 신선이 되시기 전에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창검이 요동을 치고 검은 하늘을 찢는 날 이후 끓는 무쇠 솥에 갇혔어도 살아난 자의 아들이 십팔자 위왕이 되어 천하 36국의 제왕이 된다하였네.”
“소인도 그 예언은 들어 알고 있사옵니다.”
“어리석은 왕건이 그 뜻을 받들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고려에 안주하여 새로운 세상이 미루어졌고 후대에 묘청대사가 다시 뜻을 받았으나 간적들의 계략과 스스로의 어리석음으로 본교의 천하밀군들만 잃은 결과를 초래했다. 허나 반드시 십팔자 위왕께서는 새로이 등장하실 것이네.”
“예. 한성 분주.”
“그때까지 우리는 천하밀군들을 양성하고 때를 기다리면 될 것이네. 그리고 또한 이고와 같은 자들을 포섭하여 조정의 군부에 천하밀군들을 침투시켜야 할 것이네.”
“예. 알겠사옵니다.”
“지금까지는 김본주가 우리를 규합하였다고 생각할 것이나 그것은 철저한 속임수! 우리는 밀서를 가졌으면서도 그것을 파할 수 있는 분을 기다릴 것이네.”
“예. 알겠습니다.”
지관이 짧게 대답을 하는 순간 검은 삿갓을 쓴 한성 분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수련을 하고 있는 장졸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한성 분주가 움직이기 시작을 하자 목책 위에 새워진 거대한 장고가 울리기 시작을 했다.둥둥! 둥둥!요란하면서도 장엄한 북소리가 산천에 울려 퍼졌다.
“한성 본주께서 그대들을 위무할 것이다.”
지관의 말에 수련을 하던 장졸들이 일제히 멈췄다.
“와와와와! 와와와!”
거칠고 웅장한 함성을 울려 펴졌다.
“천하밀군들이여! 그대들의 기개와 용맹이 곧 빛날 날이 올 것이니 항상 수련함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천하밀군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지어다. 새로운 미륵의 세상이 곧 열릴 것이고 또 새로운 십팔자위왕이 납실 것이다.
그때가 도래한다면 우리 한성 분주가 천하밀군의 선봉대가 되어 작게는 썩어빠진 왕 씨의 고려를 무너트리고 십팔자 위왕을 모시고 천하 36국을 평정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도선의 뜻을 항상 새기며 새로운 하늘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
“와와와! 와와와~”
다시 한 번 우렁찬 함성이 울렸다. 그리고 검은 삿갓을 쓴 한성 분주가 함성을 지르며 의기가 충천한 천하밀군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새로운 십팔자 위왕께서 강림하실 것이야.”
용호군 군막.대장군 이고는 회생이 만들어낸 도깨비불에 농락을 당한 후부터 용호군의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무장으로써 반드시 해야 할 훈련이기도 했으나 요즘 들어 그 훈련의 강도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아마 그것은 이고의 마음에 새로운 야망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따지고 본다면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용호군이 한섬의 지휘를 받으며 이의방의 군대로 바뀌어 있는 응양군에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또한 비록 지금은 힘을 잃은 노장군들이지만 그들의 부대와 연합을 하고 또한 문신들의 아우르는 강일천과 연대를 한다면 자신의 조카인 회생을 옥좌에 앉히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 같았다.이고가 그런 생각을 하며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장졸들을 순시했고 그의 옆에 전준걸이 따르고 있었다.
“훈련의 박차를 가하시게.”
지금도 예전보다 몇 배나 강도를 높여 훈련을 하고 있었다.
“쉬지 않고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전존걸의 말에 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보기에는 위위경을 필두로 하는 무신들에 의해 조정이 안정되어 보이기는 하나 그것은 모래성과 같을 것이요. 황실의 위급함에 놓였을 때 우리 용호군은 오직 황실만을 위해 움직일 것이요.”
이고는 겉으로는 황실이라고 말했으나 속으로는 회생이라 말하고 있었다.
“예. 대장군.”
“또한 도깨비불이 뜬 날 이후 응양군과 위위경의 감시가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니 용호군 중에 간자가 있는지 잘 알아봐야 할 것이요.”
“물론입니다. 대장군.”
“그리고 언제든 참지정사와 연합을 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해 놓아야 할 것입니다.”
이고의 지시에 이고의 부장인 전존걸도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