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11권 -- >
“차를 드시게.”
공예태후는 자신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채원을 보며 말하며 해월이 따라준 차를 마셨다. 그리고 채원은 공예태후도 차를 마시니 아무런 의심도 없이 차를 벌컥 마셨다. 그리고 그 순간 공예태후의 눈빛이 변했다.‘찻잔에 독이 묻은 것을 너는 모를 것이다.’
“황공하나이다. 태후마마! 비천한 저의 여식을 태자비로 간택해 주셔서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그런가?”
“그렇사옵니다. 신명을 다해 황실을 보필하겠나이다.”
“그러시게.”
공예태후는 무덤덤하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채원 공 그대가 자주 태자비를 보지 못할 것이니 담소라도 나누시게.”
“예. 태후마마!”
그렇게 공예태후는 밖으로 나갔다.
“아버님! 뭔가 이상하옵니다.”
채원의 딸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채원에게 말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말이냐?”
“무슨 영문으로 저를 태자비로 간택했는지 모르겠사옵니다.”
“그야 이 아비가 두렵고, 또 네가 영특하기 때문이지 않느냐?”
채원은 이미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였다.
“그런 게 아닐 것이옵니다.”
“아니라니?”
“불길한 생각이 드옵니다. 아무리 아버님이 드신 검이 두렵다고 해서 외척의 연을 맺을 황실이 아니옵니다. 그리고 그 검이 두렵다면 왜 우리옵니까? 위위경이 아니고 왜 우리옵니까?”
역시 아비보다 품이 넓은 딸이었다. 사실 처음 채원이 의종의 사가를 침탈 했을 때 말린 것도 채원의 딸이었다.
“위위경 그자의 이야기라면 꺼내지도 마라.”
“아버님!”
“네가 괜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이 고려에 나를 따르는 무장이 몇인 줄이나 아느냐? 걱정을 마라!”
그리고 그때 환관 하나가 조심히 안으로 들어섰다.
“황제 폐하께서 채원 공을 뵙고자 하옵니다.”
“나를? 폐하께서?”
“그렇사옵니다.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하셨사옵니다.”
“긴한 말씀?”
“그렇사옵니다. 위위경의 일 때문이라고 하옵니다.”
속고 속이고 또 속는 그런 거짓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 알았네.”
채원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딸을 보며 말했다.
“아무 걱정 말아라. 이 아비가 다 알아서 할 것이다.”
“하오나 아버님!”
“너는 내게는 참으로 귀한 딸이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말아라!”
채원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는 끝내 태후전 마당을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었다.이미 회생이 이 태후전 마당에 도착해 있었고 20여 명의 무장한 환관들과 10여 명의 여무사들이 채원이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해가 중천에 뜨지 않았군.”
나는 이 궁궐 위에 떠 있는 해를 봤다. ‘붉겠구나!’오늘 해는 참으로 많은 피를 머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뒤에 있는 20여 명의 환관들을 봤다.
그들의 손에는 이미 활이 들려 있었고, 그 중앙에서 두경승이 채원이 나올 전각을 노려보고 있었다.사실 난 태후전 복도에서부터 채원을 노릴 작정이었다.
은밀히 일을 진행하라는 이의방의 명이 있었기에 그렇게 해야 했다. 무신 혁명에 동참을 한 다른 장군들이나 대장군 그리고 무장들의 동요를 막기 위함이었다.
“다른 길은 없겠지?”
“그렇사옵니다. 채원이 태후전에서 나오는 동시에 안에서 문을 닫을 것이옵니다.”
“그럼 채원만 고슴도치가 되겠군.”
“그렇사옵니다. 야망을 품은 자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옵니다.”
두경승이 내게 말했다. 그때 채원이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길을 열던 환관이 급히 옆으로 도망을 쳤고, 채원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기겁을 하며 등을 돌렸다.끼익! 쾅!순간 두경승이 말한 것처럼 문이 닫혔다.
“무엇이냐?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와 있는 것이냐?”
채원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적 채원은 반항하지 말고 무릎을 꿇어라!”
난 앞으로 나서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라? 난적 채원? 이의방이 자신의 여식을 태자비로 간택하지 못해 안달이 난 모양이구나! 이렇게 병력을 동원하다니. 거사동무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이것이 바로 이의방이 걱정하는 거였다. 거사 동지들의 동요. 그것을 지금 채원도 말하고 있는 거였다.채원의 말에 내 입에서 헛웃음이 피식 나왔다.
“그렇게 보이더냐?”
“뭐라? 이 어린놈이 어디 대장군에게 막말을 하는 것이냐!”
“대장군? 이제 너는 정중부와 같은 만고의 역신이다.
“뭐라!”
채원이 벼락을 치듯 소리를 쳤다.
“이 판은 너를 죽이기 위해 짠 판이다. 이제 너를 이곳에 올렸으니 너만 죽으면 된다.”
내 말에 채원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놈, 회생아!”
우레와 같은 일갈이 쏟아졌다. 그리고 앞으로 돌진할 것 같던 채원이 급하게 등을 돌려 태후전 전각의 문을 열기 위해 힘을 썼다.쿵!그때 채원이 움찔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심장이 움찔하는 것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한 마리의 미련한 곰을 잡더라고 철저히 준비를 해야 야수다.’난 속으로 그렇게 생각을 했다.
“독이 효과를 보이는 모양이군!”
난 씩 웃었다. 그리고 팔을 들어 올렸고, 그 순간 20여 명의 활을 든 환관들이 일제히 두경승과 함께 활시위를 당겼다.쩌어억!활의 시위를 당기는 소리와 함께 채원은 인상을 찡그리며 돌아섰다.
“내가 이리 어리석었다.”
채원은 자신의 딸의 얼굴을 떠올리며 스스로 자책을 했다. 바드득!채원도 이미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20여 명의 활을 든 궁수 앞에서 살아날 수 있는 무장은 그 어디에도 없으니.
“회생, 이놈! 네놈은 이의방의 칼로 쓰이다가 나와 같은 꼴이 될 것이다!”
지금 채원은 자신에게 마지막 순간이 찾아들고 있었지만 여전히 내게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난 채원의 말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눈을 감고 있는 이 순간 몇 달간의 시간들과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그리고 다시 눈을 부릅떴다.
“쏴라!”
“회생! 이 악귀 같은 노오오옴!”
채원은 절규를 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죽음을 명했으니 그는 이 자리에서 하찮은 썩어가는 고깃덩이가 될게 분명했다.더 이상 채원의 이야기를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슈슈슈! 슈슈슈!일제히 20여발의 화살이 채원을 향해 날았다.퍼퍼퍽! 퍼억!
“으악!”
채원은 화살에 맞아 비명을 질렀다. 쏘아진 화살은 총 20여발이지만 채원의 몸에 명중을 한 화살은 10여발이었다.
“회, 회생, 회생 이노오옴!”
여전히 채원은 마지막 발악을 하듯 나를 야차의 눈으로 노려봤다.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뭘 하는 것이야! 명줄을 끊어놓으란 말이다.”
“예. 주군!”
“이 고려에 채원이라는 이름 자체를 지워버릴 것이다.”
“쏴! 쏴라!”
그와 동시에 다시 시위를 당겼던 활에서 20발의 화살이 날아가 채원의 몸을 파고들었다.슈슈슈! 슈슈슈!퍼퍼퍽!
“으악!”
쿵!채원은 고통에 겨워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미 채원의 몸은 박힌 화살로 성난 고슴도치 같았다. 하지만 저리도 질긴 목숨은 끊어지지 않고 나를 씹어 삼킬 듯 노려봤다.
“검!”
난 짧게 명을 내렸고 환관 중 하나가 내게 조심히 검을 내밀었다.저벅! 저벅!내가 자신에게 걸어가는 소리가 분명 들릴 것이다.
“으으윽!”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지. 아니면 본능까지 구차한지 채원은 뒤로 몸을 물리며 움츠리는 것 같았다.
“회, 회생! 회생이노오옴!”
채원은 마지막 발악을 하듯 내게 소리쳤다.
“일장춘몽일 것이요.”
“더, 더러운 악몽이지.”
“너는 패악만 끼치고 죽는구나!”
“으, 으윽! 패악? 승자의 자만! 패자의 죽음! 그래, 그런 것이야! 네가 이겼으니 네가 진리겠지.”
채원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