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7권 -- >비굴하게 먼저 말을 꺼내면 안 되고 스스로 말을 꺼내게 만드는 거였다.‘그것을 이제야 알았느냐? 이놈아!’사실 최준이 이곳에 온 이유는 채원이 자신의 자제이며 아들처럼 생각을 하는 회생을 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밑에서 들어가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이기 위해 이렇게 스스로 머리를 조아리고 들어온 거였다.
정말 궁에는 아무도 모르는 눈과 귀가 있는 것이다. 사실 그 눈과 귀는 대전이나 태자 전 그리고 문신들의 수장의 방, 그리고 장군방 정도로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이 고려 조정을 장악한 것이 이의방과 채원이었기에 누구도 모르는 눈과 귀를 이곳으로 바꿔 놓은 거였다.
이것만 봐도 채원은 회생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위인이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영웅은 혼자 만들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영웅은 스스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를 일으켜주는 주춧돌이 있어야 하고 또 그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있어야 하는데 채원은 겨우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을 따르는 산원군이 전부였다. 그에 반해 회생은 황실이 바탕이 되어주고 실질적으로 움직일 환관이 그를 돕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병력의 동원 면에서 회생이 채원의 상대가 되지 않을 뿐이지 다른 것은 무엇 하나를 밀리는 것이 없는 회생이었다.
“궁에 묶여 있는 몸이라 많은 것을 알지만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그럼 그대가 나의 귀와 눈이 되어주겠나?”
채원은 최준이 가져다 준 금 두꺼비에 혹해 아무런 의심 없이 최준을 자신의 밑에 넣으려고 했다.
“눈과 귀라 굽쇼?”
“그래. 이의방이 무엇을 하는지 황제폐하가 또 무엇을 꾸미는지? 태후 전 태후마마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내게 알려준다면 나는 조정을 이끌어 가는데 무척이나 도움이 될 것이 이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호! 고맙네. 하늘이 자네를 내게 보내준 거라고 나는 생각하겠네.”
“감사하옵니다.”
“그래 그럼 지금 이의방은 무엇을 하고 있나?”
이 순간 채원은 최준을 시험해 보고자 했다. 어리석은 채원이기는 하지만 아예 이렇게 맹탕은 아니었다.
“지금 이의방 행수는 대장군들에게 거사대장이라는 칭호로 불리고 있습니다.”
최준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대전에서 이의방은 신경도 쓰지 않는데 스스로 채원이 이의방을 정적처럼 말하고 대신들을 이끌려 하는 것을 본 최준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이의방의 이야기를 하며 채원을 동요케 했다.
“뭐라? 거사대장? 이 망할 늙은이! 이의방이 한 것이 뭐라고 이의방에게 거사대장이라고 부르는 것이야? 황궁의 불도 내가 질렀고 대전에서 거사가 있을 때 2만 응양군을 막아낸 것도 나야! 그런데 어떻게 모든 공이 이의방에게만 돌아간다는 것이야!”
채원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이렇게 거사 후의 일이 더욱 문제가 되는 법이다. 한 사람에게 모든 공이 돌아가면 다른 이들의 불만이 쌓이는 법이다.
“그러하옵니다. 이의방 행수의 독주가 너무 심하옵니다. 그리고 대장군들이 이의방 행수께 힘을 실어주시고 계십니다.”
최준은 한 번 더 채원을 자극했다.
“그렇단 말이지. 이 늙은 것들을 변방 북변으로 보내서 오랑캐와 마주보고 서서 북변의 찬바람을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군.”
채원은 마치 자신이 군을 통솔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호되게 혼이 나야할 대장군들이옵니다.”
최준은 이렇게 세 치의 혀로 자신의 제자이며 자식 같이 여기게 된 회생을 돕고 있었다.
“하오나 지금 대장군들과 반목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정교위가 채원을 보며 말했다.
“그 늙은 것들이 나를 찾지 않고 이의방을 먼저 찾는 것이 곧 반목이다.”
이미 채원은 화가 나 있었기에 정교위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채원은 최준을 봤다. 그 순간 최준은 힐끗 정교위를 봤다.
“정교위의 말이 틀리지 않사옵니다. 지금 당장은 대장군들과 반목을 해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줏대가 없는 위인들로 당장 힘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이의방 행수에게 붙은 것에 불과합니다. 채원장군께서 힘을 찾아오신다면 다시 대장군들은 채원장군의 발아래에 엎드릴 것이옵니다.”
최준은 그렇게 말하며 채원을 봤다. 최준이 이렇게 말한 것은 고도의 전술이었다. 채원의 측근이라고 하는 정교위와 척을 질수 없고 그에게도 믿음을 줘야 하기에 이렇게 한 것이다.‘암투가 난무하는 황궁에서 버틴 세월이 30년이다. 이 망할 무부들아!’최준은 그렇게 속으로 생각을 하며 씩 웃었다.
“그렇군! 옳은 말이야.”
“차근차근 움직이시면 될 것입니다.”
“그래 맞는 말이다.”
채원은 그렇게 말하고 정교위를 봤다.
“너는 회생의 뒷조사를 하는 것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또 어디서 자랐는지 아비 어미가 누군지. 또 약점이 뭔지 알아 와야 할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적의 목은 내 수중에 있는 것이야!”
채원의 말에 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보고된 것처럼 우리 회생을 치려함이군. 어리석은 놈!’찰나의 순간 최준의 눈빛이 변해 채원을 봤다.
“예. 주군!”
정교위가 짧게 군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최준도 이제는 나가봐야겠다는 눈치로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대는 조금 더 앉아 있게 내가 할 말이 더 있으니.”
“예. 채원장군!”
최준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실 말씀이 무엇이옵니까?”
“은밀하게 황제폐하의 생각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내게 알려주게.”
“그 말씀은?”
“황제폐하는 지금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네.”
역시 채원이 그냥 맹탕은 아니었다.
“그렇사옵니다.”
“그러니 내가 황제폐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싶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래. 내가 황제폐하가 하시고자 하는 일을 미리미리 수행을 하면 황제폐하께서도 나를 신임하시게 될 것이네. 또한 이의방은 지금 기고만장해 있어서 분명 패착을 두게 될 것이야! 그러면 황제폐하와 반목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럼 내게도 기회가 생길 것이네.”
채원의 말에 최준은 호응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말이 나와 드리는 말씀이시지만 황제폐하는 이의방 행수에게 너무 많은 힘이 쏠리는 것을 저어하고 계십니다.”
역시 채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야! 내가 황제폐하의 어심만 이끌어낼 수 있다면 이 고려는 그대와 나의 것이 되지 않겠나. 하하하!”
“하하하! 그렇습니다.”
“그러니 잘 부탁을 하네.”
“예. 채원 장군님! 이제 소신은 물러가도 되옵니까?”
“그러시게. 내 오늘 뜻하지 않게 큰 힘을 얻었군. 내 자네를 잊지 않겠네.”
“감사하옵니다.”
최준은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채원이 최준을 봤다.
“혹시 자네 회생이라고 아나?”
채원은 황궁에서 일어난 일은 거의 다 알고 있는 환관이기에 최준에게 물은 거였다.
“회생이요?”
“그렇다네. 신분이 불명확한데 이의방의 옆에 있어. 견룡군이면 나도 한 번은 봤을 것인데 처음 보는 얼굴이란 말이야!”
“그렇습니까?”
“그래. 상황제가 된 폭군의 거둥에서 한 번 본 것이 처음이야!”
“제가 어떤 놈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알아봐주게.”
“예. 채원장군님!”
그렇게 최준은 채원의 환심을 사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채원의 심장 바로 아래에 회생의 숨겨놓은 비수라고 할 수 있는 최준이 자리를 잡은 거였다.
이것은 채원에게 무척이나 위험한 일일 것이다.하지만 이 순간 채원은 이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상히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어리석지는 않지만 욕심이 저 놈을 어리석게 만든 거군.’최준은 밖으로 나오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나저나 우리 회생이 이 난국을 어떻게 넘길지가 걱정이군.’최준은 그런 걱정을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회생에 대해 나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군.’정말 너무나 급박하게 상황이 돌아가다 보니 잊고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이 자체가 회생에게는 위기라는 생각이 드는 최준이었다.
“우선 우리 회생을 만나봐야겠어. 상의를 해야겠지.”
최준은 그렇게 말하며 찬찬히 걸었다. 그리고 산원군 숙직 방을 나서자말자 환관 둘이 최준의 옆에 붙었다.
“은밀히 회생공에게 가라. 내가 좀 보자고 한다고 해.”
최준이 나직이 말했다.
“예. 상선어른!”
“아직은 아니야. 그리고 오래 할 마음도 없고.”
최준은 자신에게 상선이라는 환관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송구하옵니다.”
“난 회생과 함께 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곧 이 황궁을 떠날 것이다. 그럼 너희들의 시대가 오는 것이야!”
“예. 어르신!”
“이숭겸 어르신도 같이 찾아라. 이 황궁에서 믿을 수 있는 분은 이숭겸 어르신뿐이다.”
최준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회생과 같이 언젠가는 북변으로 갈 결심을 했다. 그 만큼 최준의 마음에는 회생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은밀히 움직여야 할 것이야! 그러고 보니 회생 공을 지켜보는 눈이 많아지고 있어.”
“예. 알겠습니다. 어르신!”
환관이 짧게 목례를 하고 종종 걸음으로 사라졌다.나와 백화는 아무 말도 없이 어두운 저잣거리를 걸었다.
나는 은밀하게 황궁으로 들어갔기에 비밀통로로 빠져 나와 이렇게 저잣거리를 걷고 있었다. 태후의 처소에서 나올 때 백화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무어라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거였다.'알고 있을 건데,,,,,,.'그렇게 나와 백화는 아무 말도 없이 걸었다. 분명 백화는 태후의 처소에서 나와 황실에서 오고갔던 이야기를 대략은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묻지 않는다는 것은 나를 이해하겠다는 걸 거다.
“밤공기가 벌써 차갑게 느껴지는구나!”
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괜한 말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하옵니다. 상공!”
역시 차분히 대답하는 백화였다.
“궁금하지 않느냐?”
“무엇을 말이옵니까?"
“네가 짐작을 하고 있는 일말이다.”
내 말에 백화는 잠시 나를 봤다.
“궁금할 것이 무엇이 있사옵니까? 그저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하십시오. 소녀는 그저 따를 뿐이옵니다.”
“걱정도 안 되는 것이냐? 아니면 포기한 것이냐?”
난 순간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만 보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마음이면 소녀는 되옵니다.”
“신분의 차이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사옵니다. 아옵니다. 공주님이시니 그러실 겁니다.”
“다 안다. 다 이해한다?”
“그렇사옵니다. 어찌 영웅을 한 계집만이 품겠사옵니까?”
역시 백화는 짐작으로 모든 것을 아는 듯 했다. 사실 나만 오늘에서야 안 일일 것이다. 백화는 예전부터 태후의 말에 짐작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북변으로 가는 것이 참 어려워질 것 같구나.”
“끝내 가시지 않겠사옵니까?”
“그렇지. 가야지. 우리 백화를 데리고 가야지.”
난 백화를 보며 웃었다. '내 작은 말 한 마디에 감격을 하는 백화다.'이런 여자가 사랑스러운 여자 인 거다.
또 우리라는 말에 백화는 감격을 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내가 덤덤히 하는 이 한 마디 한 마디는 이 고려의 사내들은 차마 하지 못하는 말들이라는 것을 나는 아주 나중에 알게 됐다.
내가 참으로 정 없이 말을 한다고 생각을 했지만 후일 내가 하는 말들은 이 고려의 사내들은 차마 부끄러워하지 못하는 말들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백화는 이렇게 놀라고 감격하고 기뻐하는 거였다.
“영화공주도 같이 가고 이의방의 딸도 같이 가지 않겠사옵니까?”
백화의 말에 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머리만 아플 뿐이다.”
“거부하실 수 없는 일이옵니다. 받아드리실 것은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누가 여자를 질투의 화신이라고 했는가?백화에게만은 그말은 해당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제일 위는 너다. 그것만 알아줬으면 좋겠다.”
“예. 상공.”
백화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나를 봤고 나는 조심히 백화의 손을 꼭 잡아줬다. 내가 말한 것처럼 이제는 밤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내가 잡은 백화의 손이 무척이나 차갑게 느껴졌다.
“가자! 이제 조금 여유를 찾아보자. 큰 불은 껐고 이제 어떻게든 많은 것을 챙겨 북변으로 갈 준비를 해야겠다. 아니 지금 가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 갈 것 같다.”
“예. 상공.”
그렇게 나와 백화는 아무도 오가지 않는 저잣거리를 차분히 걸었다. 이것이 내가 백화에게 해 줄 수 있는 전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저잣거리 중앙을 걸을 때 높은 장대에 걸려 있는 정중부의 목과 그 남자 가솔들의 목이 보였다.
“욕심이 저렇게 화를 부르는 것이겠지.”
“그러하옵니다. 상공.”
“나는 큰 욕심이 없는데 자꾸 사람들이 내게 욕심을 부리라고 하니 걱정이다.”
내 말에 백화는 나를 빤히 봤다.
“마음을 편히 가지시면 되옵니다.”
“그렇지. 내일이면 이제 황제폐하가 떠나시는구나! 가여운 분이다.”
“그러하옵니다.”
“가자! 백화야. 이제 집에 가서 조금은 쉬자.”
난 그렇게 말하고 백화를 봤다. 어두운 밤이지만 내 눈 가득 백화의 얼굴이 들어왔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백화를 품에 넣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다. 손만 뻗으면 취할 수 있는 것이 백화다.
하지만 그렇게 쉬이 취하고 싶지 않은 백화이기도 했다. 난 물끄러미 백화를 봤다.
‘내 너에게 항상 웃게 하지는 못 할지로도 울지는 않게 하마!’난 이 순간 다짐을 했다.그리고 또 하루가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