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3권 -- >
“황상 폐하가 내 이름을 거론하시며 나를 보자고 하신 건가?”
“그렇소.”
“알았다. 먼저 가 있으라. 채비를 하고 갈 것이다.”
난 그렇게 말하고 백화를 봤다. 이미 백화의 옆에는 열 명의 견룡군 병졸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이의방이 내게 내린, 내가 지휘할 수 있는 유일한 병사들이다.‘마지막 순간 끝까지 발악하는 것은 아니겠지?’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환관이 내게 전한 말이 계속 머리에서 맴돌았다.‘마지막 가는 길이라고 하셨어…….’이 말을 통해 보면 의종이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어쩌면 이 시대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 역사는 그를 폭군이라 기록할 것이고 무능한 황제라 기록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그만의 잘못일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런데 지금 그가 나를 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뭐든 나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의종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그리고 의종은 나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의종은 이제 곧 폐위될 황제다. 그런데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역시 명불허전이 아니었다.
‘역시 황제만의 기운이 있다.’난 그것을 의종에게서 느꼈다.
이건 무신 정변의 실세라는 이의방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기운이었다. 그리고 내 옆으로 무덕이 조신하게 서 있었다. 그녀의 눈빛으로 봐서 이미 모든 것을 의종에게 고한 것 같았다.
‘다 끝난 이 마당에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이게 내가 궁금해하는 점이다.여전히 의종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 눈빛의 기운은 매우 복잡하고 야릇했다.그 기본은 분명 살기가 중심이었으나 그 살기 속에는 모든 것을 포기한 남자의 절망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뭔지 모르게 뜨거운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황상 폐하! 소장 회생이옵니다.”
답답하고 궁금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연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이 차가운 적막을 깨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의종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난 점점 더 답답해졌다.‘왜 이러는 거지?’살짝 피를 말리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바로 황제라는 존재가 내뿜는 중압감일 거다. 역시 황제는 뭔가 다른 존재다.
“으음…….”
의종은 내게 말 대신에 깊게 신음을 내뱉었다. 역시 황제도 마음 한곳이 불타고 있을 만큼 답답할 것이다. 아마 이렇게 어린놈에게 자신이 당했나 하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를 것이다.
“너의 이름이 회생이라고?”
드디어 의종이 내게 물었다. 정말 한없이 갑갑하던 정막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황제인 의종의 목소리에 아주 희미하지만 떨림이 있었다.
그 떨림은 무엇을 의미할까?그러고 보니 지금 이 자리에 오직 태자만이 없었다.결국 무덕과 내가 은밀하게 한 약속이 의종에게 들켜버린 모양이다.
‘역시 황제는 그냥 황제가 되는 것이 아니군!’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하옵니다. 회생이라 하옵니다. 견룡군 위장이옵니다.”
“견룡이라?”
“그러하옵니다.”
“그럼 짐과 태자가 짐이 키운 자에게 당한 것인가?”
순간 의종의 목소리에 살기가 감돌았다.
“송구하나이다, 황제 폐하!”
난 별달리 할 말이 없어서 납작 엎드렸다.
“짐이 그대에게 묻겠다.”
“하문하시옵소서, 황제 폐하!”
“그대는 진심으로 저 무덕과 약속을 한 것이냐?”
역시 내 예상대로 무덕과의 은밀한 거래를 묻고 있었다.
“그러하옵니다.”
“그대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렇게 약조를 한 것이냐?”
“태자마마를 그대로 둔다면 권력을 다투는 무리들에 의해 희생양이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그렇게 조치한 것이옵니다.”
“뭐라?”
의종은 순간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보며 반문했다.
“이해가 되지 않으실 수 있으나 저의 계략에는 아주 조금은 태자마마를 위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린 여자의 연정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난 그렇게 말하며 힐끗 무덕을 봤다.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자신의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린 계집의 연정이라…….”
“그러하옵니다.”
“그래. 그 연정이 이 고려를 망쳤구나!”
의종은 스스로 자책하듯 한탄을 했다.
“고려를 망친 것은 그런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좌절하신 황상 폐하 때문이십니다.”
내 말에 의종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평상시의 의종이었다면 당장이라도 아니라고 부정했을 것이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정리한 것처럼 느껴졌기에 나는 서슴지 않고 단호하게 그렇게 말했다.‘마지막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셨어.’
“옳다. 짐이 망친 것이다.”
의종은 순순히 시인을 했다. 이것만 봐도 의종은 역사에 기록된 그런 폭군만은 아닐 것이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고려 역사를 기록한 사관들은 100년 넘게 무신 정권을 유지하게 만든 시초를 의종에게서 찾으려 하는 듯했다. 그래서 역사는 그를 무능한 폭군이라 기록했다. 하지만 그는 절대 무능한 황제는 아니었다.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런데 말이다…….”
의종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잠시 봤다.
“예, 황제 폐하!”
“네가 약속한 것을 지킬 수 있겠느냐?”
“반드시 지켜드릴 것이옵니다.”
난 다짐을 하듯 말했다.
“가능하겠느냐?”
“무신들이 노리는 것은 황제 폐하의 폐위입니다. 그러니 태자마마는 그리 큰 화를 당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저는 반드시 무덕과의 약속을 지킬 것이옵니다.”
“그래 줄 수 있겠느냐?”
“반드시 지킬 것이옵니다.”
“고맙구나! 짐은 분명 실패한 군주일 것이다. 하지만 아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아비는 되고 싶지 않구나!”
난 이 순간 황제 이전에 한 남자의 아비를 봤다. 그는 황제라는 신분도 버리고 하찮은 나에게 부탁을 했다.
이것만 봐도 의종은 절대 무능하지 않다. 아니, 숨어서 일을 꾸민 나를 찾아낸 것만으로도 그는 절대 무능한 인물이 아니다.어떻게 이런 황제가 무신 정변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그의 총기가 젊은 날처럼 돌아온 것은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생이라고 했지?”
“그러하옵니다, 황제 폐하!”
“권력이란 말이다. 구름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절대 잡을 수 없는 그런 것이지.”
의종은 내게 마치 충고를 하듯 말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어린 네가 안다? 하하하! 어린 네가 아는 것을 짐만 몰랐구나.”
“송구하나이다, 황제 폐하!”
“스스로 다스리지 못할 권력은 탐하지 마라.”
“명심하겠나이다, 황상 폐하!”
난 그렇게 대답하고 살짝 고개를 돌려 의종을 봤다.
“소신이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해라! 네가 승자이지 않느냐?”
정말 의종은 황제였다. 만약 그가 왕광취 같은 난신적자와 어울리지 않았다면, 분명 고려를 다시 한 번 부흥시킬 수 있는 왕이 되었을 것이다.그게 아니라도 내가 그를 좀 더 빨리 알았다면 그의 신하가 되어 그를 보필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이미 때를 놓친 이야기에 불과하다.
“송구하옵니다, 황제 폐하! 한번 스스로 내려놓으신 마음, 난신적자들이 아무리 부추긴다 해도 의연하셔야 하옵니다.”
내 말에 의종은 다시 나를 빤히 봤다.
“후일까지 염려를 하는 것이냐?”
“황제 폐하도 아시다시피 충성된 신하는 그리 많지 않사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권력이며, 그 권력을 얻기 위해 움직이고 음모를 꾸미는 것이옵니다.”
“마치 누가 나를 업고 반기를 드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물론 그것은 후일의 현실일 거다.
“그렇게만 된다면 제가 어떻게 되든 태자마마와 황상 폐하의 안위는 반드시 지킬 것이옵니다.”
“짐의 안위 따위는 이제 상관이 없다. 그저 태자, 아니 이제 곧 폐서인이 될 것이니, 이 못난 아비의 아들만 무탈하게 해다오.”
“기억에서 잊힌다면 무탈하실 것이옵니다.”
“으음, 그렇지. 우리 부자는 그렇게 잊혀야 하는 거구나.”
결국 의종이 나를 부른 것은 태자의 마지막 안위를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다음은 누구로 낙점이 되었느냐?”
“예? 송구하옵게도 무슨 뜻으로 하문을 하시는지 소신은 모르겠나이다.”
내 말에 의종이 다시 나를 봤다.
“익양후냐?”
의종의 말에 난 그저 아무 대답도 없이 조용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군! 그래도 참으로 다행이다. 왕씨에게 다시 황제의 옥좌가 내려져서 말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렇지 않은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러하옵니다.”
“짐은 네가 제일 걱정이 된다.”
난 순간 너무 놀라 무엄하게도 고개를 바짝 들어 의종을 봤다.
“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난 내심 놀라 의종을 봤다.죽은 왕준도 나를 이무기에 비유하며 이의방에게 이간지계를 쓰려 했다. 지금 황제도 내게 이무기라는 단어만 쓰지 않았을 뿐이지 나를 흉악한 이무기로 보고 있었다.‘모두 나를 주목하고 있네!’공예태후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 이 순간 번뜩 생각이 났다.
“어찌 한낱 위장이 황제의 상을 타고났는지 모르겠지만, 짐은 그대를 보는 순간 그대가 제일 걱정이다.”
이건 내가 고려의 사직을 찬탈할 수도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겨우 위장 따위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의종이 아주 엄청난 사람이거나 정말 역사가 기록해 놓은 것처럼 폭군에 광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는 겨우 위장에 불과하옵니다.”
“그러게 말이다. 겨우 위장에게 이 고려의 지존인 내가 폐위를 당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의종은 무신 정변으로 폐위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간계에 의해 폐위를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위장이라는 직위도 내가 폐위가 되는 순간 달라질 것이지 않느냐?”
“황망하나이다, 황제 폐하!”
“난신들이 난무하는 시대가 이제 왔구나. 짐이 죽어 어찌 열성조를 뵈올까…….”
의종은 그렇게 말한 후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짐이 다시 한 번 네게 부탁을 하마.”
“하명하소서!”
“못난 짐의 아들을 부탁한다.”
난 황제로서는 실패했지만 아버지로서는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킨 남자를 물끄러미 봤다.아마 모든 아비가 저런 모습일 거다.‘제가 반드시 태자는 지켜 드리겠습니다, 폐하!’난 속으로 다짐을 거듭했다.
“위장 회생, 황제 폐하의 명을 받잡사옵니다.”
“물러가라! 내 그대를 다시 보고 싶지 않구나. 그대가 후일 난신일지 충신일지, 그도 아니면 역신일지는 역사가 기록할 것이다. 허나 분명 알아야 할 것이다. 짐이 죽어도 그대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 소신 회생, 물러가나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조심히 물러났다. 그리고 무덕도 조심스레 나를 따랐다.의종이 있는 내전에서 나와 무덕을 봤다.
“태자는 어디에 있나?”
“제가 은밀히 태자궁으로 다시 모셨습니다.”
“태자가 더 이상 준동하는 일이 없다면 내 그대와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오.”
난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순간 난 뭔가 홀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뭐라고 겨우 위장 주제에 황제에게 태자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하고, 또 무덕에게 약속했는지 모르겠다.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 순간 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의종이 말한 것을 떠올렸다.‘황제의 상이라고? 내가? 의종이 점쟁이도 아닌데 어찌 알고 나를 황제의 상이라고 하는 거야?’자꾸 그 말이 신경이 쓰였다.
‘내가? 내가 황제의 상? 겨우 강인번이나 들던 내가 황제의 상?’자꾸 헛웃음이 나와서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간웅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