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3권 -- >의종의 폐위는 상장군 정중부가 하게 되었지만 신황제의 옹립은 나와 이의방이 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진정! 무인의 시대가 오는군.’의종이 감금되어 있는 내전 전각.의종은 옥좌도 아닌 의자에 초라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번민과 고민이 가득해 보였다. 어쩌면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의 앞에 대죄를 지은 듯 무덕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그리고 태자는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희종과//의종과 무덕만 그렇게 있었던 것이다.
“어찌 왕준 공이 내 명을 받고 나서자마자 무부들이 그를 막아섰는지 아느냐?”
의종이 무덕에게 물었다. 하지만 의종의 눈빛으로 봤을 때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아무리 어리석은 황제라고 해도 황제는 황제다.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니.의종은 왕준이 밖으로 나서자마자 견룡군이 들이닥친 것을 알고 뭔가 일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왜 말이 없느냐? 너도 짐을 그저 그런 폭군으로 보는 것이냐?”
의종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무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머리만 조아리고 있었다.
“너일 것이다.”
“화, 황제 폐하!”
“짐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왜 너인지 그것이 이상하구나. 너는 비록 계집이나 태자의 사람이라는 것은 짐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왜 그런 것이냐?”
역시 의종은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주, 죽여 주십시오, 폐하!”
무덕은 이미 의종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에 그저 죽여달라고 말할 뿐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망친 것은 태자만이 아닐 것이다.앞으로의 100년간의 고려 사직도 망친 셈이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서는 역사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니, 기록할 자도 없는 순간이다.
“죽여라? 너를 죽이는 것으로 끝날 일이더냐? 왜 그런 것이냐? 짐이 묻지 않느냐?”
의종은 다시 무덕에게 물었다.
“소녀는, 소녀는 위급한 태자마마를 구명해 드리고자 했습니다.”
“태자를 구명한다?”
“그, 그러하옵니다. 소녀가 어리석다는 것을 소녀 역시 아옵니다.”
“어리석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그리 엄청난 짓을 저질렀단 말이냐?”
의종은 무덕을 책망하듯 말했다. 황제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엄청난 일이 벌어졌기에 화도 내지 못하는 의종 황제였다.
“하지만 소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네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진정 모른단 말이더냐?”
그 순간 무덕이 먹먹한 눈빛으로 의종을 물끄러미 봤다.
“소녀는 뼈가 으스러지는 한이 있고 그 어떤 치욕을 당해도 태자마마를 구명해드릴 것이옵니다. 그것이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고 황실을 곤경에 빠트리는 것이라고 해도, 저는 스스럼없이 태자마마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할 것이옵니다.”
벙어리가 말문이 트이듯 무덕은 조용하지만 거침없이 의종에게 말했다. 의종은 그녀의 말을 단 한마디도 끊지 않고 듣고 있었다.의종은 왕준이 그렇게 세상을 등졌을 때 이미 모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공예태후에게는 여전히 여린 아들이며 황제였지만, 자신의 아들에게만은 강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의종이다.
“무부들이 태자를 구명해준다고 하더냐?”
“약속이 지켜질지는 모르나 분명 제게 그리 약조했습니다.”
“네게 약조를 했다?”
“그러하옵니다, 황제 폐하!”
“어리석고 어리석도다. 어리석음이야! 네가 나와 같이 이 고려를 망쳤구나.”
의종은 비통한 마음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소녀를 죽여 주시옵소서.”
“태자도 아는 것이냐?”
“태자마마는 모르옵니다. 비록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가고 저의 간특한 계략에 이리되었지만 태자마마는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쯔쯔쯔! 어리석은 놈.”
의종은 그렇게 말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누가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이냐?”
의종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무덕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회생이라는 위장이옵니다.”
“겨우 위장 따위에게 태자의 목숨을 구명받겠다는 것이었느냐?”
의종은 아무리 무덕이 어리석은 계집이라고 해도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준 공을 도모한 것도 그의 책략이옵니다. 그리고 이 고려를 위태롭게 한 것도 모두 그의 계략이옵니다. 무부들이 모두 무지한 칼이라면 그는 깊은 계략을 가진 비수입니다.”
“으음…… 어리석음이다.”
의종은 그렇게 말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밖에 내전 내관 있느냐?”
의종의 부름에 환관 하나가 조심히 안으로 들어섰다.
“부르셨나이까?”
“지금 당장 회생이라는 위장을 불러라.”
“회생이라고 하셨사옵니까?”
환관 하나가 의종에게 다시 물었다. 그 순간 의종은 환관이 회생을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회생이라는 위장을 아느냐?”
“그, 그러하옵니다.”
“어찌 네가 아느냐?”
“채원이라는 도적과 같은 무부에게 환관들이 고초를 당할 때 환관들을 구명해준 무신이옵니다.”
환관은 스스럼없이 위장 따위를 무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의종은 그 말에 주목했다.
“채원이면 이번 역모의 주축이 아니냐?”
“그러하옵니다. 그런 채원도 쉬이 대하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회생 위장이옵니다.”
역시 회생이 환관들을 구한 일이 이런 작용을 하고 있었다. 이제 이 궁에 있는 대부분의 환관들은 회생의 수족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왕광취가 죽임을 당하고 이숭겸이 실종을 당한 이 순간, 최준이 환관들의 우두머리로 등극했고, 환관들은 모두 일치단결해서 최준을 따랐다. 그리고 최준은 회생에게 충성 맹세 아닌 충성 맹세를 했다.그러니 모든 환관들은 회생의 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채원도 어찌하지 못한다?”
“그러하옵니다. 그는 이의방의 측근으로 지금 대전에서 황상 폐하의…….”
환관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의종을 보고 입을 닫았다.
“내 폐위가 논의되고 있느냐?”
“폐하! 소신이 어리석어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아니다. 이미 왕준이 그들의 칼에 갔는데 내 폐위는 정해진 수순이겠지. 그들에게 내가 그리고…….”
의종은 힐끗 무덕을 봤다.
“아니다. 무엇을 말해도 소용이 없으니 되었다. 그래, 대전에서는 어떻게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냐?”
“그것이…….”
“듣지 않는다고 모르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황공하옵니다, 황제 폐하!”
“그래, 어서 말을 해 봐라.”
“지금 상장군 정중부와 그의 일파들이 황상 폐하를 폐위하기 위해 조정의 중론을 모으고 있고 이의방 행수와 회생 위장이 그것을 막으려고 충심을 다하고 있으나 역부족이라 하옵니다.”
물론 막아서고 있는 자는 이의방뿐이지만 환관은 회생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
“이의방과 회생이 짐의 폐위를 막고 있다?”
“그러하옵니다. 진정한 충신이옵니다, 두 무신들은…….”
환관은 그렇게 말하고 의종의 눈치를 봤다. 아무리 힘을 잃은 황제라고 해도 황제는 황제였다. 그래서 환관은 그렇게 말을 한 거였다.
“충신이라……. 충신이라…….”
의종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의종은 마음속으로 환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나를 막아서고 내 폐위를 막고 있다?’지난 새벽에 자신의 계획을 모두 막은 것이 이의방과 회생 위장이라는 것을 의종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자신의 폐위를 반대하고 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잠시 후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무덕이 그리 어리석지는 않았구나. 가서 회생을 데리고 와라. 짐이 그를 만나야겠다.”
“예, 황제 폐하!”
환관은 조심히 물러났다.대전에서 무신들이 주축이 되어 의종을 폐위하는 일에 조정의 중론을 모으고 있는 중에 나는 슬쩍 대전을 빠져나왔다.
뭐 사실 의종의 폐위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어떻게 되었든 후일을 도모하려 했던 왕준을 제거할 수 있었다.‘역시 늙은것은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야!’난 대전에서 중심을 잡고 의종을 폐위시키기 위해 움직이는 상장군 정중부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중부는 아직 하나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 황제를 폐위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라고 할 수 있으나, 차기 황제를 옹립하는 것은 무신들의 뜻과 함께 황실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공예태후의 뜻이 무척이나 많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그것을 지금 상장군 정중부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중부 일파는 공예태후와 척을 지겠군.’아무리 무신들이 권력을 움켜쥐고 흔든다고 해도 고려의 근본은 왕씨다. 그리고 다음 대의 황제도 왕씨가 될 것이다.그러니 고려를 무너트릴 생각이 정중부에게 없다면, 지금 하고 있는 짓은 황실과 척을 지는 일을 스스로 자행하고 있는 거였다.
뭐 정중부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우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공예태후를 찾아갔지만 내 계략에 의해 문전박대를 당했으니 저렇게 나오는 것일 테지.‘그럼 이제 누구를 황제로 세우려고 음모를 꾸밀까?’난 우선 상장군 정중부가 차기 황제로 누구를 지목할 것인가에 주목했다.
현 황제에게는 제법 많은 형제들이 있다.그중 주목할 인물은 인종의 셋째 아들인 익양후이다.
의종과는 친형제 사이로 장성하여 황자였다.내 예상으로는 공예태후의 심중에 그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미 이의방과 나는 그의 사택에 병력을 배치해둔 상태다.
아미 지금 익양후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있을 것이다.어쩌면 다음 황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이다.
그다음, 충희가 있다. 성격이 방자하고 품행이 바르지 못해 궁녀와 사통한다는 추문이 많이 의종에게마저도 대우를 받지 못한 왕자다.
‘장고에 악수가 나온다고…….’난 정중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원래 권력을 쥐고 싶은 자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황제보다 어리석은 황제가 더 좋은 법이다.
그런 생각을 만약에 정중부가 하고 있다면 또 다른 난신적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의방이 충신이라는 건 또 아니지만.하여튼 이제 중요한 것은 누가 차기 황제가 되느냐 하는 점이다.
원래 일은 시작하는 것보다 끝내는 것이 더 중요한 법이다.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대전 주변 전각을 쭉 둘러봤다.
왕건이 고려를 세울 때만 해도 황제의 나라로 기치를 높이 들던 고려였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흔들리고 있다.그때 환관 하나가 대전 문에서 내게 급히 쪼르르 달려왔다.
“웬 놈이냐?”
앙칼진 백화가 환관을 막아섰다.
“황상께서 보내셨소.”
“뭐라?”
백화는 영문을 몰라 환관을 노려봤다. 그리고 나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의종이 왜 나를 부르는 거지?’난 문뜩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의방 행수를 모셔 오라고 하신 것이냐?”
“아닙니다. 회생 위장님을 모시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환관의 말에 난 인상을 찡그렸다. 의종의 입에서 내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것은 뭔가 내가 꾸민 일 중 하나가 틀어졌다는 의미다.
“나를?”
“그러하옵니다, 회생 위장 나리!”
환관은 내게 무척이나 친절하게 공손히 말했다. 아마 앞으로 모든 환관들은 나를 이렇게 대할 것이다.
그들은 최준과 함께 내게 충성 맹세를 했으니 말이다.물론 이 궁궐에 있는 모든 환관이 나를 이렇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정에도 계파가 있고 세력이 있으니 저 환관들의 세계에서도 그럴 것이다.그리고 그 계파 중 제일 큰 세력이 아마 최준의 환관 계파일 거다.
환관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살폈다. 이런 행동은 뭔가 은밀히 내게 할 말이 있다는 의미다.
“마지막 가는 길에 꼭 회생 위장 나리를 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환관은 직급으로 따진다면 나보다 몇 단계는 문계가 높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스스럼없이 존칭을 쓰며 내게 나리라고 했다. 아마 마음 같아서는 대감이라고도 부르고 싶을 것이다.
원래 환관들은 눈치가 좋고 앞을 내다보는 눈이 제법 있었다. 물론 그것은 누가 권력을 잡을 것이냐에 대해 국한된 것이겠지만, 그래도 궁에 있는 숨은 실력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자들이 나를 떠받들고 있다.
참으로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하지만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마, 마지막 가는 길에?”
“그러하옵니다.”
뭔가 들통이 났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알았소.”
그리고 그때 공예태후궁의 상궁인 해월이 나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재촉해 와서는 내전 내관을 힐끗 봤다.
“공예태후께서 그대를 지금 뵙고자 하시오.”
오늘 완전 내가 주목을 받는 날인가 보다. 오늘따라 나를 찾는 분들이 이리도 많으니 말이다.
“공예태후께서도?”
“그렇소. 당장 데리고 오라고 하셨소.”
“당장?”
일이 묘하게 꼬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는 없소.”
내 말을 듣고 해월이 나를 노려봤다.
“아무리 기세등등한 무부라고 해도 황실의 제일 어른이 부르시는데 가지 않겠다는 말이 웬 말이오!”
해월은 나를 꾸짖듯 소리쳤다.
“공예태후께서 황실의 어르신이기는 하나 현 황제 폐하가 부르시는데 우선일 수는 없지 않나? 내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바로 갈 것이라고 전해 주시오.”
내 말에 해월은 힐끗 대전 환관을 봤다. 그리고 내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원래 사람을 맞이할 때보다 보낼 때 잘 보내야 후환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의종은 여전히 황제지만 누구도 그가 오래 자리를 보존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지금 내게 명을 전한 대전 환관만 해도 그렇다. 몹시 못마땅한 얼굴로 의종의 명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힘을 잃은 황제는 저딴 환관에게도 무시를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