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웅-57화 (57/620)

< -- 간웅 3권 -- >

“이 고려가 단 한 명의 것이 되는 순간 고려는 신라가 되고 백제가 되고 고구려가 되어 멸망하는 것이옵니다. 힘없는 고려! 광인의 고려가 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옵니까? 이제는 난신적자를 처단하고 만인의 고려를 만들 것이옵니다, 어르신!”

“마, 만인의 고려?”

“그렇사옵니다. 제가 꿈꾸는 고려는 백성의 고려입니다. 강한 고려입니다. 북진의 고려입니다.”

“부, 북진의 고려…….”

“그렇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일어선 것이옵니다.”

“으음…….”

왕준은 잠시 이의방을 보다가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의방아!”

“예, 어르신!”

“저 아이의 말대로 나는 나를 속였다. 하지만 너도 너를 속이고 있구나.”

“저는 저를 믿사옵니다.”

왕준은 다시 나를 뚫어지게 봤다.

“너는 이 순간 맹호다. 하지만 네가 부리는 저 아이는 흉악한 이무기가 분명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내 말을 분명 기억해야 할 것이다. 때를 만난 이무기는 용이 된다. 그리고 그 용이 끝내 맹호를 삼킬 것이다. 허나 용이 되지 못한다면…….”

다시 왕준이 나를 봤다.

“용이 되지 못한다면 이무기는 사악한 난신이 될 것이다.”

왕준의 말에 이의방도 나를 잠시 봤다. 왕준이 나로 인해 죽는 이 순간, 그가 내게 마지막 보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죽는 순간까지 이간지계를 쓰고 있다.’난 나도 모르게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하지만 내가 말을 막고 나선다면 왕준을 도와주는 꼴이 될 것 같았다.

“구차하십니다. 이 순간에 이간책이라니요. 어른답지 않습니다.”

이의방의 말에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보이느냐? 원래 늙으면 구차해지는 법이다.”

왕준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눈을 떴다.

“여봐라!”

“예, 대감!”

“너희들의 길은 너희들이 스스로 가라! 이 늙은이는 여기서 멈추어야 할 모양이구나! 더 살다가는 의방의 말처럼 구차해지겠구나. 가라!”

“…….”

사병은 말이 없었다.그 순간 왕준은 의종이 있는 내전을 향해 크게 절을 했다. 그는 우리를 마치 없는 사람처럼 여기는 듯했다. 절을 한 후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으로 스스로 자신의 목을 베었다.스윽!

“으윽!”

피가 내전에 뿌려졌다.그와 동시에 왕준은 쿵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데 왕준은 죽지 않고 자신의 품에서 비단 천을 꺼내 마치 뿜어지는 피를 막으려는 듯 움켜쥐었다.

“안 돼!”

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바로 앞으로 뛰어나갔고, 그와 동시에 열 명의 사병들은 나를 처단하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왔다.

“멈추세요! 위험합니다.”

백화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울렸다. 그 비명과 때를 같이하여 이의방과 이고, 채원까지 나를 구하기 위해 앞으로 일제히 달려 나가 사병들과 격돌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를 막아선 사병이 없었다는 것이다.난 바닥에 쓰러져 비단 천을 움켜쥐고 있는 왕준의 손에서 비단 천을 빼앗기 위해 손에 힘을 줬다. 하지만 운명을 하지 않은 왕준은 저주하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이, 이놈! 끄, 끝까지…….”

“이 고려는 이제 소인에게 맡기십시오. 이무기라 하셨으나 용은 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염려치 마십시오.”

“우욱! 네, 네놈에게…….”

“이미 정해진 수순! 바람이 거꾸로 불지는 않게 만들겠습니다.”

이것은 어떻게든 역천은 막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왕준 역시 말뜻을 알았는지 나를 물끄러미 봤다.

“그러니 이제 이 손을 놓아주십시오.”

그의 손에는 비단 천이 잡혀 있다. 그것은 분명 의종이 써준 혈서일 것이다. 이 혈서만 있다면 의종을 폐위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야, 약속해라!”

“편히 가소서!”

난 그렇게 말했고, 그와 동시에 왕준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그렇게 또 한 번 피를 뿌리는 새벽이 지나갔다.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그리고 새벽의 짧은 활극은 끝이 났다. 열 명의 왕준의 사병들은 처참히 죽었다. 이의방은 나를 향해 걸어왔다.

“무엇을 획책한 것이냐?”

“황제 폐하의 폐위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황제 폐하의 폐위를 준비하면서 어찌 왕준 대감까지 도모를 한 것이냐?”

처음으로 이의방은 나를 질책했다. 그만큼 이의방은 왕준을 흠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역시 스스로의 대망의 길을 걷다가 사라진 것뿐입니다.”

“스스로의 대망이라고?”

“그러하옵니다. 제가 암계를 판 것은 사실이오나 그의 사택에는 이미 사병들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그러지 않고서는 그렇게 빨리 동원할 수 없었겠지.”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흠모하거나 스스로 자책하지 마십시오. 그도 자신의 길을 가려다가 저렇게 된 것입니다.”

난 다시 한 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왕준을 봤다.

“좋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할 참이냐?”

“이제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옵니다.”

“가만히 있어라?”

지금까지 이렇게 급박하게 움직여놓고 마지막 순간에 가만히 있으라고 하자 이의방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그렇습니다. 이미 제가 모든 준비는 해놨습니다. 그저 행수 어른께서는 공예태후의 신임을 당분간 잃지 않으셔야 합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용호군 때문이겠지?”

“그렇습니다. 황제가 폐위되고 신황제께서 등극하시게 되면 반드시 논공을 가려야 할 것이옵니다. 가만히 계셔도 제1 공신은 이의방 행수 어르신이 되시는 겁니다. 그다음부터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누가 폐위를 준비하고 준동을 한단 말이냐?”

“제가 다 준비해놨습니다. 이미 움직이고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조용히 때를 기다리시면 되는 것이옵니다.”

“으음! 알았다. 그렇게 하마.”

“그리고 저분처럼 되지 않기 위해 항상 생각하고 또 생각을 하십시오.”

난 처음으로 이의방에게 경고를 했다.

“그 역시 알겠다.”

“새로운 아침입니다. 이제 새로운 역사가 열릴 것이옵니다.”

“나는 그래도 황제께 따져야겠다.”

순간 채원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뭐라? 왜 안 된다는 것이냐? 웅크리고 이 황궁에 들어온 지 딱 하루가 지났다. 그런데 우리를 속이고 우리의 등에 비수를 꽂으려고 해? 어찌 이리도 황제가 부덕하단 말이냐!”

채원이 나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난 채원이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있는지 속으로 의심스러웠다.

“이제 폐위의 수순을 밟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조용히 물러나 있으면 됩니다.”

“난 네놈이 하는 일은 도통 모르겠다.”

“알려고 하시면 머리만 아프실 겁니다.”

“뭐라?”

순간 채원이 나를 노려봤다. 이것이 채원과의 첫 대립일 거다.

“원래 머리 아픈 일은 저 같은 것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저 윗전은 지시를 하시고 관망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 채원과 대립할 때는 아니라는 생각에 바로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말했다.

“윗전이라…….”

“이제 곧 1등 공신이 되실 것입니다. 채원 산원께서 윗전이 아니면 누가 이 고려의 윗전이겠습니까?”

내 말에 이의방이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그는 지금 내가 채원을 달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그를 조롱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아는 눈치였다.

“그래! 회생이 없으면 우리가 직접 골치 아픈 일을 다 해야 하네. 그만하세.”

“체! 알았네.”

채원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이곳을 단단히 지켜라! 상장군이든 대장군이든 내 허락 없이는 누구도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 산원 나리!”

순검군들이 일제히 대답하자 채원은 일이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의 방으로 순검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잠시 후 이의방이 나를 보며 물었다.

“내가 너에게 날개를 달아주면 용이 될 것이냐?”

이의방이 왕준이 한 말을 흘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내심 섬뜩했다.내가 소인배처럼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깊게 생각했을 것이다.

‘잘했어. 사택을 얻고 옥에 갇힌 계집을 달라고 한 것은 잘한 짓이다.’난 그런 생각을 하며 이의방을 봤다.

바로 대답하면 왕준의 말이 이의방의 뇌리에 더 강렬하게 남을 것 같았다.침묵이 금이다.

아마 이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일 거다.

“하하하! 아니다, 되었다. 고래 등 같은 사택에 열 명의 계집이면 넌 지금도 용이다. 하하하!”

난 그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이옵니까?”

“그런데 계집 열 명을 얻었는데 이리 시간이 없으니 품어볼 시간도 없겠구나.”

이의방은 내게 농을 했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헤헤헤!”

“시간이 나도 몸 생각을 하면서 품어라.”

이어지는 농에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예, 알겠사옵니다.”

“그럼 난 이제 기다리기 위해 장군방에서 칩거할 것이다.”

“예, 행수 어른.”

그리고 이의방은 돌아섰다. 돌아서는 찰나의 순간 이의방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이간의 앙금이 쌓이면 위험해질 텐데…….’큰일을 해내고도 이렇게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은 권력이라는 것은 나눌 수 없고 또 그 실체가 괴물이기 때문일 거다.

‘힘을 키워야 해!’지금 나에게도 야릇한 앙금이 쌓이고 있었다.8장. 이의방의 연기력?이의방이 들어앉은 장군방.내 계략이 성공을 거두고 이틀이 지났다.

숨 막히는 순간이 분명할 거다.원래 이곳은 정삼품 상장군이나 종삼품 대장군 그리고 정사품 장군들에게만 내려지는 장군방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장군의 직위보다 더 대단한 것이 바로 이의방의 위세였다. 그리고 그 위세를 이의방은 정확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 때문에 다른 이들의 눈총을 받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이의방은 나를 보며 물었다.

“장군의 직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금의 위상이옵니다. 충분히 이 자리에 앉으실 자격이 있습니다.”

내 말에 이의방은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가? 회생!”

“예, 행수 어른.”

“그건 그렇고, 곧 날이 밝는다. 이제 드디어 황제를 폐위시키는 거군.”

“그러하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절대 나서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건 알고 있다. 네가 참 고생이 많다.”

“아직 일이 다 끝난 것이 아니옵니다.”

“아직?”

“그러하옵니다.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온데…….”

“뭐 할 말이 있느냐?”

“혹시 가지고 계신 재물이 있으시면 저에게 내어주십시오.”

“너에게 재물을 내어달라?”

“그러하옵니다. 이 궁궐에서 칼보다 더 효력이 있는 것이 재물입니다.”

“재물이라?”

“그렇습니다. 이 구중궁궐에는 벽에도 귀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 귀를 막아야 합니다.”

내 말에 이의방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런데 내가 가진 것이 그리 많지 않구나.”

물론 난 예상은 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만큼 행수 어른이 청렴하다는 증거이지 않습니까? 제가 다 알아서 구하겠습니다.”

“네가?”

“예. 제가 구해 보겠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저에게 주려고 안달이 난 것들이 꽤 있을 겁니다.”

내 말에 이의방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이제 곧 세상이 바뀌는구나!”

“그렇습니다. 익양후를 주목하시고 준비하셔야 할 것입니다.”

“익양후를?”

“그렇습니다. 바로 지금 익양후를 뵈옵고 충성 맹세를 하시옵소서.”

내 말에 이의방은 나를 뚫어지게 봤다.

“그, 그렇다면 공예태후의 마음에…….”

난 이의방의 물음에 고개만 끄덕였다.

“그럴 것이옵니다. 어떻게 되었든 태후의 자리는 그대로 유지하시고 싶으실 것이옵니다.”

“맞다. 네 말에 일리가 있다. 내 바로 은밀히 익양후를 뵈올 것이다.”

“예. 그럼 저는 벽의 귀를 막으러 가겠습니다.”

“그래. 항상 네가 고생이 많다.”

이의방은 나를 그렇게 격려했다. 이 순간 이의방은 나를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나를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죽는 순간 왕준은 이의방의 마음에 엄청난 앙금이 쌓이게 하고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 마음에 앙금을 쌓아놓았든지.나는 내 잘난 재주를 믿고 어리석게 이의방에게 이용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순간 가장 나쁜 패는 같은 배를 탄 동지를 의심하는 것일 거다.

‘이럴 때는 못 먹어도 고야!’난 이의방을 보며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내가 이의방이 있는 장군방에서 나왔을 때 백화가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그때 구해주신 환관들이 상공을 뵙고자 합니다.”

백화의 말에 난 씩 웃었다.

“지금 딱 필요한 시점인데 시간 잘 맞춰서 온 것 같군. 어디에 있지?”

“내시방에 있습니다.”

“내시방?”

“예. 그곳이 은밀하게 담소를 나누기 좋다고 했습니다.”

백화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위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의 일은 모르는 일이니 혹시 그들이 재물로 나를 유인해서 도모할 수도 있는 거였다.

“내 병졸들은 어디에 있지?”

내 물음에 백화가 나를 봤다.

“왜 그러십니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렇죠.”

백화는 짧게 대답했고, 바로 열 명의 견룡들을 모았다. 그들은 이의방이 내게 준 병사들이다. 물론 그들을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지만 당장 이용하는 데 지장은 없을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위장 나리!”

건장한 병사 하나가 내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너희들은 나를 따라와라.”

“예, 위장 나리!”

난 이렇게 병사들을 이끌고 내시방으로 갔다. 원래 환관들이라는 것은 음습한 면이 많은 존재들이다.

뭐 남자로서 그 하나가 없으니 어쩌면 다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뭔가 일을 꾸미고 또 재물을 모으는 재미에 사는 존재들일 거다.그래서 채원이 무모할 정도로 환관들을 핍박해서 재물을 갈취하려고 하는 것일 테고.어쩌면 그들은 내게 화수분의 역할을 해줄 것이다.

내가 내시방이 있는 전각에 도착하자 제법 많은 내시들이 모여 있었다.‘내 뒤에 숨어 목숨을 구명받으려는 것들이 많군.’저들은 지금 이 위급한 순간에 나를 방패막이로 삼고 싶은 걸 거다.

그럼 상당한 재물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지긋하게 나이를 먹은 환관 하나가 내게 천천히 걸어왔다.

“최준이라고 하옵니다.”

지긋한 나이의 환관이 내게 말을 높였다.

“회생이라 합니다. 연로하신데 말씀을 놓으셔도 됩니다.”

내 말에 최준은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환관은 무척이나 무시당하고 사는 존재들이었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말이다.그래서 그들은 권력에 더 집착했고 재물에 집착했다. 그리고 지금 시기에는 사람 취급을 더 받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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