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3권 -- >왕준은 분명 충신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자리에 대한 욕심은 존재했다. 어쩌면 그는 지금까지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정에서 물러난 후에도 사병 양성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게다.
“내 스스로 얻지 못하는 자리는 모래 위에 지은 누각과 같다. 절대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 아버님!”
이제 왕희도 어쩔 수 없는 듯했다.
“나는 바로 입궁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속히 사병들을 모아서 황궁으로 진격해라!”
“예, 아버님!”
이제 또 다른 의미의 거사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거사는 이미 그 성공 확률이 희박한 듯하다.
“뭐라?”
자리에 앉아 있던 이의방은 백화를 말을 듣고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이고와 채원 역시 깜짝 놀라 커진 눈동자로 백화를 응시했다.
“그러하옵니다. 왕준 전 문하시랑평장사 대감이 황상의 명을 받고 지금 입궁 중에 있사옵니다. 회생 위장께서 그것을 급히 행수 어른께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것을 어찌 회생이 알게 된 것이냐?”
이의방의 물음에 백화는 이 모든 것을 회생이 꾸민 일이라고 말할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이의방을 봤다.
“회생 위장이 내전에서 빠져나오는 환관을 은밀히 미행하다가 알아낸 사실입니다.”
“회생은 어디에 있느냐?”
“지금 왕준의 사택을 감시하고 있사옵니다.”
백화의 말에 이의방은 인상을 찡그렸다.
“회생의 안위에는 문제가 없겠지?”
이 순간 이의방이 얼마나 회생을 생각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하옵니다. 워낙 영민한 분이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옵니다.”
“그래. 회생이 뭐라고 하더냐?”
“급히 용호군과 견룡을 움직여서 왕준의 사택에서 황궁으로 진격하는 그의 사병을 막으라 하셨습니다.”
“왕준은 그냥 입궁을 시키고?”
역시 이의방은 어리석은 무부만은 아니었다.
“그렇사옵니다. 지금이 좋은 호기라고 하셨습니다.”
“호기라!”
“난 무슨 소리를 하는지 통 모르겠다. 왕준 어른이 사병을 이끌고 우리에게 칼을 겨누는데 지금이 호기라고? 회생 그놈이 정신이 나간 것이냐?”
지금까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고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성질이 급한 이고가 왕준을 어른으로 부르는 것만 봐도 왕준은 무신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그 어르신은 다 된 밥에 재를 뿌리시려고 하는 거야!”
채원도 이의방을 보며 말했다.
“그게 그 어른의 성정이시지.”
“성정은 개뿔! 가만히 계시면 알아서 문화시중 자리는 그분의 몫인데, 왜 나서서 명을 재촉하시는 거야?”
채원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 고려에 유일하게 남은 충신이잖은가. 황제가 부르니 어쩔 수 없이 오시는 것이야!”
이의방의 말에 이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우선 회생의 말대로 황궁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그 어른의 사병을 막아야겠지.”
“그리고?”
“휴우…….”
이의방은 대답을 못 하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우선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럼 그 어른을 이참에…….”
“받은 은혜가 얼마인데, 그렇게 할 수는 없지.”
이의방도 차마 왕준의 은혜를 배신할 수는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어찌하는가?”
“황상만 폐위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문제네. 남은 생을 바다를 벗 삼아 지내게 해드리면 될 걸세!”
이 순간 백화는 이의방의 말을 듣고 조금은 놀랐다.그저 불학무식하고 표리부동한 무부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목을 노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왕준에 대한 처리까지 인정을 두고 생각하는 이의방이었다. 그리고 이고와 채원도 그 말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알았네. 우선은 사병들을 막는 것이 우선이군.”
채원은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그래. 자네가 가서 막아주게.”
“알았네.”
그때 백화는 더 할 말이 있는지 이의방을 봤다.
“뭐 더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
“이고 산원은 병사들과 함께 내전 주변에 은밀히 매복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보고?”
이고는 백화를 보며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누구도 모르게 은밀히 움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오직 이소응 대장군께만 슬쩍 흘리라고 하셨습니다.”
“뭐라? 왜 은밀하게 움직이라고 해 놓고 이소응 대장군께 흘리라는 것이냐?”
“저는 미천해서 모르옵니다.”
뭐든 대답하기 곤란한 부분에 대해서는 백화는 그렇게 말했다.
“알았다. 이고, 자네가 움직여주게. 나는 용호군을 이끌고 채원과 같이 가서 그 어르신의 병력을 막겠네.”
“이번이 마지막 고비여야 할 건데?”
“그나저나 상장군께 알려드려야 하지 않나? 아무리 은밀히 움직인다고 해도…….”
“그것은 절대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백화는 다급하게 말했다.
“뭐라? 이 위급한 일을 상장군은 몰라야 한다?”
채원도 영문을 몰라 백화를 봤다.
“그러하옵니다. 이번이 호기라고 말하셨습니다. 상장군을 누를 절호의 기회라고 하셨습니다.”
백화의 말에 이의방은 지금 회생이 어떤 일을 은밀히 도모하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알았다. 상장군과 어깨동무할 것이 아니니 이번 일도 우리가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럼 후일 조정을 장악하는 일도 더 쉬워지겠지.”
“그러하옵니다.”
“그래. 너는 속히 회생에게 가라. 그리고 내가 심히 회생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고 전해라.”
“예, 행수 어른!”
백화는 짧게 대답하고 뒤로 물러났다. 이제 황제의 폐위를 위한 계략이 마지막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은 회생이 완벽하게 짜놓은 극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이제 오직 남은 것은 아들을 잘못 둔 의종의 폐위뿐이었다.
7장. 왕준이 죽다!상장군의 장군방.회생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그 시간 정중부도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상장군 정중부는 지금 문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전에서 자신에게 힘을 실어줄 문신들을 선별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잠시 후 민영모와 조영인이 상장군 정중부의 방으로 들어서며 정중부를 보고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특히 민영모는 불안한 얼굴로 상장군 정중부의 눈치를 보느라 이 짧은 순간에도 정신이 없는 듯했다.문신 둘이 들어서자 정중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들 오십시오.”
상장군이 일어나서 자신들을 맞이하자 민영모와 조영인은 놀라 눈이 커졌다. 지금 누가 뭐라고 해도 상장군 정중부는 이들에게 두려운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가 직접 일어나 자신들을 맞이하는 걸 보면 뭔가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쯤은 머리를 쓰는 문신들이니 알 수 있었다.
“무슨 연유로 저희들을 보자고 하신 것이옵니까?”
원래 겁먹은 개가 먼저 짖는 법이라, 잔뜩 겁을 먹은 민영모가 상장군 정중부에게 물었다.
“우선 앉으시오.”
상장군 정중부는 무척이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문신들에게 자리를 권했고, 민영모와 조영인은 상장군 정중부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무신들이 목숨을 걸고 난신적자인 김돈중과 왕광취를 제거하기 위해 보현원에서 거병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제가 무신이다 보니 국정을 운영하는 능력이 부족하여 두 분을 찾아 이렇게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생각 이상으로 몸을 낮추는 정중부를 보고 조영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민영모는 그 순간 눈동자가 반짝였다.
“저는 두 분 대신들이 황실과 사직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 어리석은 저를 도와주셔서 적극적으로 대의에 동참할 거라고 믿습니다.”
이건 일종의 경고와 협박이었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면 후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그런 위협이었다.
“올바른 대의라면 따르는 것이 신하 된 자의 할 일이지요.”
민영모가 적극 동조한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조영인은 영 내키지 않는 안색을 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올바른 대의를 위해서입니다. 저는 날이 밝으면 대의를 위해 폭군을 폐위시킬 생각입니다.”
그 순간 조영인은 경악했고, 민영모 역시 놀라 상장군 정중부를 봤다.
“뭐, 뭐라고 하셨소?”
“두 분 대신들에게 황제를 폐위하는 일에 동참해 달라고 하였소이다.”
순간 정중부의 눈도 차갑게 변했다.
“그리고 또한 황제의 폐위로 인해 준동할 문신들의 동요도 막아주셨으면 합니다.”
상장군 정중부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들이 문신들의 동요를 막을 수 있는 정도의 덕망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지금 상장군은 진격을 위한 요란한 나팔수로 저 둘을 고른 거였다.
이건 상장군이 늙은 여우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잘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후일을 도모하면서도 황실과 척을 두지 않으려는 꼼수인 것이다.
“지금 상장군은 반역을 하겠다는 겁니까?”
조영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차마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들어올 때 밖에 검을 든 중랑장 한섬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에 이렇게 문을 열고 나가면 죽임을 당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앉으십시오. 앉아요.”
상장군 정중부는 말은 부드럽게 했지만 조영인을 노려봤다.
“반역이 아니라 고려 황실을 바로 세우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충정에서 나온 결단입니다.”
“하오나 사초는 그렇게 기록되지 않을 것이옵니다.”
역시 문신다운 대답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사초, 즉 역사에 기록될지가 더 중요한 문신들이었다.
“백성은 도탄에 빠져 굶주리고 있는데 황제라는 자는 걸왕처럼 주지육림에 빠져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어찌 그를 두고 흔들리는 이 고려를 바로 세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조영인은 이 순간 무슨 말을 하려다가 상장군 정중부가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입을 닫았다.
“저와 같이 대의를 따르고 백성을 가엽게 여기는 충신이 되시겠소이까? 아니면 폭군을 따르며 사직을 망치는 난신적자가 되시겠소이까?”
“그야 당연히 대의를 따르는 충신이 되어야 하지요.”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던 민영모가 대답했고, 조영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고맙습니다. 제가 조정을 일신하면 대신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상장군 정중부의 말에 민영모는 웃었고 조영인은 마지못해 찡그린 인상을 풀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당장 문을 열고 나갔을 때 목이 잘릴 판이었다.이렇게 상장군 정중부는 자신의 방법대로 의종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려 했다.
‘저들이 나발을 불고 어리석은 대장군들이 들고일어나면 황제의 폐위는 시간문제다. 그리고 나는 저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어 다음 조정을 장악하면 되는 것이야!’상장군 정중부는 두 대신들을 보며 씩 웃었다.나의 계략에 의해 무신들에게까지 존경받는 왕준이 끝내 의종을 만나기 위해 내전 안으로 들어갔다.
왕준은 자신을 호위하는 10여 명의 사병들만 데리고 의정이 있는 내전으로 왔다. 그리고 난 그 모습을 내전 어두운 나무 그늘 뒤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 순간 왕준은 크나큰 실수를 한 것이다.
아무리 그가 무신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고 해도 그렇게 열 명의 사병만 데리고 입궁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그는 늙어서 판단력이 흐려졌는지도 모른다.
“이제 백화가 병력을 끌고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거군.”
난 그런 생각을 하며 움직이는 그림자를 봤다. 아마 저 그림자는 이소응 대장군이 보낸 자가 왕준이 내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물러나는 걸 거다.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어.”
난 씩 웃었다. 사실 처음에 황제를 폐위시켜야 한다는 말을 이의방에게 했을 때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다.
뭐 드라마에서 보면 황제를 폐위시키는 것은 말 한마디면 되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게도 달랐다.다른 신하들의 생각도 고려해야 하고 또 분위기도 만들어야 했다. 또한 지금 이의방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공예태후의 눈치도 봐야 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은밀히 일을 꾸미는 것은 따지고 보면 공예태후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었다.용호군!용호군의 대장군은 이상할 정도로 공예태후를 따르고 있었다.
물론 용호군이 황제가 친히 이끄는 친위군이라고 해도 공예태후를 따르는 용호군 대장군의 행동은 이상한 면이 많았다.하여튼 공예태후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곧 해가 뜨겠군. 그럼 새 하늘이 열리는 첫날이다.”
“뭐라? 왕준 어른이 황상 폐하가 계신 내전으로 들어갔다고?”
이소응은 놀라 눈이 커졌다.
“그러하옵니다. 왕준 문하시랑평장사 대감께서 내전으로 드셨다고 합니다.”
“으음…….”
이소응 대장군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회생이 말한 것처럼 황제가 자신들을 믿지 않고 뒤에서 일을 꾸민다는 것을 알게 됐다.물론 그렇게 일을 꾸민 것은 회생이었다. 이제 정말 황제는 폐위의 길로 걷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황제가 우리를 속이려 한 것이군.”
“그러하옵니다. 내전에 웅크려서 대장군을 안심시키고 뒤로는 왕준 문하시랑평장사 대감을 움직이신 것이옵니다.”
“그래. 그 아이의 말이 맞았다, 맞았어!”
이소응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황제를 믿은 내가 어리석었다.”
이렇게 이소응은 회생의 계략에 빠져들고 있었다.
“짐이 원망스러운 건가?”
의종은 고희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앞에 엎드려 있는 왕준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속에는 왕준마저도 자신을 따라주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담겨 있었다.어찌 그러지 않겠는가?이 넓은 궁궐에 믿을 자가 없어 스스로 내친 노신을 다시 불러야 하는 의종이었다.
그것을 왕준도 짐작하고 있었다.‘총명하던 분이셨는데…….’왕준은 마음속으로 젊은 날의 의종을 떠올렸다.
정말 문신들의 득세를 막으며 고려를 개혁하려고 했던 황제로 왕준은 의종을 기억하고 있었다.물론 그 개혁은 문신 귀족들의 저항으로 좌절되었지만, 그래도 다른 황제들보다 좀 더 강한 고려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황제였다.
그리고 끝내 그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며 타협이 이루어졌고, 그다음부터 의종은 빠르게 타락했다.젊은 황제의 꿈이 꺾인 것이 바로 의종이 폭군이 된 이유 중에 하나라고 왕준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다시 이 위기를 넘기게 되면 국정을 쇄신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자신과 함께하는 국정!자신의 사후에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해 나갈 국정을 생각하고 있는 왕준이었다.
“어찌 신하 된 자가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