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3권 -- >의종의 말에 순간 태자는 긴장했다. 역시 황제는 아무리 무능해도 황제였던 것이다.
“짐이 그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네가 이의방을 도모하려는 일이 실패로 돌아간 후였을 것이다. 아닌 것이냐?”
“아, 아바마마!”
태자는 놀라 할 말이 없어서 그저 아비만 애타게 부를 뿐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틀어졌구나. 너를 버리고 옥좌를 지킬 것인가? 황실의 보존을 걸고 다시 한 번 일을 꾸밀 것인가? 이 두 가지만 남았구나!”
의종의 말에 태자는 기겁했다. 아비인 의종이 자신을 버릴 수도 있다는 심중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아, 아바마마! 사, 살려주십시오. 아바마마! 소자를 살려주십시오.”
태자는 의종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무능한 아들을 보는 아비의 마음은 찢어질 것이다.
이 순간 그 아들이 의연했다면 의종은 아들을 버리고 옥좌를 지키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능하고 비루한 자신의 아들을 버릴 수 없는 의종이었다.그리고 의종은 이제 그에게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황급한 순간 누구를 믿고 부를 것인지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믿을 수 있는 자는 없다.’이것이 의종의 고민이었다.
지금 모든 군권은 무신들이 쥐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친위군이라 할 수 있는 응양군과 용호군 역시 무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그러니 그가 믿고 움직일 수 있는 자가 없는 게 현실이었다.
‘누구를 불러야 한단 말인가?’평소 같으면 김돈중을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김돈중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러니 당장 부를 신하가 의종에게는 없는 것이다.‘으음. 누구를 불러야 하는 것인가? 누구를 믿고 일을 도모해야 하는 것인가?’의종은 계속해서 고민했다.
“으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깊은 신음을 했다. 의종은 아들인 태자를 물끄러미 봤다.
“옥좌를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비의 자리는 지켜야겠다.”
의종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밖에 누구 없느냐?”
의종이 밖에서 호종을 하고 있는 환관을 불렀고 환관이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평소 의종을 호종하던 고위 환관들은 이미 무신들의 칼에 모두 유명을 달리하고 없었다.
“황상 폐하! 부르셨나이까?”
“가서 왕준을 불러라!”
“예. 명을 받잡나이다.”
젊은 환관은 바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갔다.왕준!그는 선황인 인종으로부터 김부식을 도와 묘청의 난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왕씨의 성을 받은 문신이었다.
김부식이 자신의 성을 고집했다면, 왕준은 왕씨의 성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충심으로 인종을 보필했었다.그것을 기억해낸 의종이었다.
물론 후일 의종이 황제가 된 후에 그를 배척했다. 고려를 개혁하려는 젊은 의종에게 김부식과 왕준은 잘라내야 할 악이었던 것이다.
김부식과 다르게 왕준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나 사택에 칩거했다.어쩌면 그는 이 고려에 마지막 남은 충신일 것이다.
지금 의종은 자신이 실각시킨 왕준을 다시 찾고 있는 것이다.그는 김부식과 같이 문신의 거두였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그는 무신들과 많은 교류를 했다는 점이다.원래 왕준은 기골이 장대하고 그 담이 웅장한 위인으로, 작은 일에 화를 내지 않는 호인이었다. 또한 재물을 탐하지 않았기에 백성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욕심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의 욕심은 사병을 키우고 그 사병들이 강성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거였다.
그래서 왕준의 사병은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개개인이 강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 특성을 가진 왕준을 지금 의종이 기억해낸 것이다.
‘분명 와줄 것이다. 왕준이라면 과거를 잊고 짐을 위해 와줄 것이다.
’의종은 그를 조정에서 밀어낸 일이 떠올랐다. 사실 그를 밀어낼 때 상당한 진통이 있을 거라고 의종은 예상했었다.
하지만 왕준은 스스로 자리를 내놓고 물러났다.그렇게 그의 첫 개혁은 성공하는 것 같았다. 아니, 첫 개혁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백성들에게 칭송받는 신하를 쳐냈으니 그건 개혁의 성과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때 젊은 의종이 김부식을 축출했다면 고려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왕준의 나이가 고희를 넘었기에 정국을 장악하고 있는 무신들은 그를 잊고 있었다. 아니, 무신들은 차마 왕준까지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사실 그에게 신세를 진 무신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지금 의종이 마지막으로 힘을 빌릴 수 있는 자가 바로 이 황성에는 왕준뿐이었다.
“아, 아바마마, 왕준이라 하셨습니까?”
태자는 놀란 눈으로 의종을 보며 물었다.
“그렇다. 짐의 위급에 일어설 충신은 이제 왕준뿐이다.”
“하오나 그는 고희를 넘은 노신입니다.”
“그렇지. 그러니 이 무부들의 난에도 무사한 것이다.”
의종은 그렇게 말하고 태자를 봤다.
“하오나! 그는…….”
“그래. 그는 고희를 넘었다. 하지만 궤장을 지고서라도 그는 내게 올 것이다. 그는 충신이다.”
의종은 그렇게 말하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의종은 어리석은 아들을 위해 그리고 땅에 떨어진 황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이렇게 왕준을 통해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그의 일어섬은 황실을 더욱더 위태롭게 할 일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이 모든 것을 지금 회생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전 전각 옆, 나무 그늘에 숨어 앉은 나와 백화는 의종이 칩거한 곳에서 은밀히 환관 하나가 밖을 살피며 나오는 것을 보고 저 환관이 의종의 밀명을 받은 자라는 것을 직감했다.이미 나는 내전을 감시하고 있는 견룡군 병사들에게 경계를 느슨하게 하라고 지시를 해 놓은 상태였다.
“나락인지도 모르고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군.”
나도 모르게 씨익 미소 지었다.
“저자를 미행하면 되는 겁니까?”
“미행만 해서 되겠나?”
내 말에 백화는 무슨 뜻인지 몰라 나를 봤다.
“내가 저자가 되어야지.”
“저자가 된다니요?”
“우선 저자를 쫓아가 보자.”
“예, 상공!”
백화는 짧게 대답했다.
“가자!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네.”
난 그렇게 말하고 환관의 뒤를 밟았다. 물론 절대 뒤만 밟을 생각은 없었다.
백화에게 말했듯 내가 그가 되어볼 참이다.‘환관이 아무리 충성스럽다고 해도 목숨을 걸 만큼 충성스러운 자는 없다.
’난 그렇게 환관을 생각했다.그 환관은 빠르게 몸을 움직여서 내전을 나와 황궁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가 황궁을 빠져나가 황궁 서쪽에 있는, 문신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향하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문신들이 사는 곳으로 가는 거지?”
“따라가보면 알 일입니다.”
“뭐 그렇지. 이제 이쯤 오면 됐다.”
“잡을까요?”
“그래. 내 앞에 데리고 와!”
내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백화는 앞으로 빠르게 달려 나가 어디론가 가고 있는 환관의 앞에 섰다.
“웨, 웬 년이냐?”
“어디를 가는 것이냐?”
백화는 환관을 위협하기 위해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순간 환관은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바로 돌아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물론 그 뒤에는 이미 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뒤에는 도망갈 길이 있을 것 같아?”
“누, 누구냐?”
환관은 다시 놀라며 나를 뚫어지게 봤다.
“어디를 가는지부터 이야기해 볼까?”
“너, 넌 누구냐?”
“내가 누군지보다 네놈이 어디로 가는지 말하는 것이 네놈의 목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다.”
난 무섭게 환관을 노려봤고, 그와 동시에 백화는 환관의 목에 검을 겨눴다.차가운 검이 그의 목에 닿자 환관은 기겁을 하여 눈이 커졌다.
“내, 내게 왜 이러시는 거요?”
역시 위협을 느끼면 말투부터 달라지는 것이 사람인 모양이다.
“이쪽으로 쭉 가면 문신들이 모여 사는 곳인데,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이냐?”
내 말에 환관은 기겁하며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말이오?”
환관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발뺌을 했다. 이럴 때는 위협보다 약간의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더 잘 먹힌다.난 백화에게 바로 눈으로 신호를 보냈고, 백화는 들고 있던 검으로 환관의 다리를 살짝 베었다.서억!
“아아악!”
예리한 검이 환관의 다리를 베자 환관은 비명을 질렀다. 물론 이 정도로 목숨의 지장은 없을 것이다.
“다음에 또 모른다고 말하면 목을 벨 것이다.”
난 무섭게 환관을 노려봤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고 싶으면 황제 폐하의 밀명을 받고 어디로 가는지 말해라.”
내 물음에 환관은 이미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짐작했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우리는 이미 내전에서부터 너를 감시했다. 어디로 가는 것이냐? 말하지 않겠다면 정말 너를 벨 것이다.”
“사, 살려주십시오.”
“그래. 살고 싶다면 어디로 가는지 말해라. 지금 황제 폐하가 누구를 부르시는 것이냐?”
내 말에 환관은 다시 기겁하며 뜸을 들였다.
“그, 그게…….”
“정말 목을 잘라주면 되는 것이냐?”
난 다시 환관을 무섭게 노려봤고 백화는 당장이라도 목을 벨 것처럼 검을 들어 올렸다.
“사, 살려주시오. 말을 하겠습니다.”
역시 자기 목숨을 내걸고 완벽히 충성하는 신하는 몇 되지 않는다. 황제를 위해 목숨도 내놓는 자를 우리는 충신이라 부른다. 그런 충신은 이 고려에 몇 명 되지 않는다. 아니, 지금 이 순간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 누구에게 밀명을 전하러 가는 것이냐?”
“와, 왕준께 가는 겁니다.”
“왕준?”
난 그를 몰라 백화를 봤다. 내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으니 내 기억에 없는 인물도 있는 것이다.
백화는 왕준에 대해 아는 것 같았다.그럼 된 것이다.이제 남은 것은 이 환관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문제다.
물론 무신들이나 일을 꾸미는 자는 드라마에서도 봤듯 이 자리에서 놈을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렇게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우선 옷부터 벗어라.”
“예?”
환관은 내 말뜻을 몰라 나를 빤히 봤다.
“우선 의관부터 벗으라고 했다.”
내가 다시 노려보자 환관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환관의 의복을 벗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넌 황제 폐하를 배신했으니 다시 황궁으로 돌아온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내 지금 너를 죽일 수는 있으나 구차하고 가여운 목숨이니 이 길로 어서 도성을 떠나라.”
내 말에 환관은 만면에 밝은 빛을 띠며 나를 봤다.
“살려주시는 겁니까?”
“그래.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어서 가라!”
그러자 환관은 내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등을 돌려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그 순간 백화는 빠르게 품에 손을 넣어 비수를 꺼내 환관에게 던졌다.쉬웅!빠르게 날아간 비수는 환관의 등에 박혔다.
“으악!”
짧은 비명과 함께 환관은 바닥에 쓰러져 죽었다. 난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백화를 보며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후환을 남기시겠습니까?”
난 백화의 말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차마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백화가 한 것이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백화가 무척이나 모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알았다. 그래! 후환을 남길 수는 없지.”
난 그렇게 말했고, 그와 동시에 백화는 빠르게 몸을 움직여 환관의 등에 박힌 비수를 뽑은 후 비수에 묻은 피를 그의 옷에 닦았다.‘이제 왕준에게 가면 되는 것이다.
이제 끝이 보인다, 끝이!’노신 왕준의 사택!난 한쪽 다리가 불편한 척하며 노신 왕준 앞에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항상 내 옆을 지키던 백화는 이의방에게 달려가 있는 상태였다.모든 일의 준비가 끝났으니 백화는 이의방과 함께 병력들을 이끌고 왕준의 사병을 막으면 되는 것이다.
지금 이의방이 용호군을 장악하고 있으니 아무리 강성한 왕준의 사병들이라고 해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어쩌면 난 일을 무척이나 어렵고 힘들게 풀어 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려의 지존인 황제를 폐위시키는 일은 무척이나 힘이 드는 일이다. 그리고 명분도 있어야 하고.왕준은 아들인 듯한 왕희와 함께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폐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신다?”
“그러하옵니다, 문하시랑평장사 대감!”
난 죽은 환관의 관복을 입은 채로 머리를 조아리며 왕준에게 말했다. 왕준이 조정에서 의종에게 축출당할 당시의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였다.
문하시랑이나 문하평장사라고도 한다. 문하시중의 다음 자리로 내사시랑평장사와 같은 지위이다.
성종 때 처음 두었으며 1061년(문종 15년) 정이품, 정원 한 명으로 정하였다.1275년(충렬왕 1년) 원(元)나라의 강요로 관제를 격하, 개편할 때 중서시랑평장사와 합쳐져 첨의시랑찬성사로 개칭하였다.
1298년 폐지하였다가 다시 두었다. 1308년 중호(中護)로 개명하고 세 명으로 증원하였으며, 1356년(공민왕 5년) 반원 운동의 일환으로 다시 문하시랑평장사, 정원 한 명으로 바꾸었다.
1362년 첨의찬성사, 1369년 문하찬성사로 고쳤다.
“황상께서 다급함이 끝에 다다르셨구나! 내치신 이 노신까지 부르시다니 말이다. 조정에는 그리 강직한 신하가 없단 말이냐?”
이제야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책망과 함께 의종을 가엽게 여기는 감정이 공존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머리를 조아리며 힐끗 고개를 들어 고희를 넘어선 늙은 대신 왕준을 봤다.기품이 흐르는 것이, 권력을 탐하는 자들과는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무부들이 황궁을 침범하고 황실을 겁박하고 있사옵니다. 문신들은 모두 겁에 질려 몸을 낮추고 누구 하나 나서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원래 드세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들은 위급한 순간 자기 살길만 찾는 법이니 말이다.”
왕준은 마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왕준의 아들 왕희는 뭔가 못마땅한 눈으로 그저 나를 보고 있었다.
“오직 이 사직을 구하실 분은 문하시랑평장사 대감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순간 눈물 몇 방울은 흘려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그리 눈물을 흘리기가 쉽겠는가? 그래서 난 왕준 앞에 엎드렸을 때 눈도 깜박하지 않고 바닥을 뚫어지게 노려봤다.그럼 눈물이 난다.
이런 것은 감성이 풍부하지 못한 배우들이 눈물 연기를 하기 위해 쓰는 편법이다.물론 요즘에는 그냥 안약을 넣는 배우들도 많다.
“황제 폐하를 그리고 사직을 보존해 주시옵소서. 흑흑흑!”
나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알았다. 물러가 있어라.”
“어찌 전하면 되옵니까?”
“무엇을 어찌 전한다는 말이냐?”
“황제 폐하께 이 비천한 것이 어찌 말씀을 올리면 되옵니까?”
“황제 폐하가 부르시는데, 신하 된 자가 그곳이 사지라 하여 어찌 가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내 바로 입궁할 것이다.”
왕준은 그렇게 말하고 바로 옆에 있는 아들 왕희를 봤다.
“사병들을 준비시켜라! 내 더는 무부들의 준동을 두고 볼 수 없다.”
그 순간 왕희의 눈빛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봤다. 지금 왕준은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다. 하지만 부친의 말이니 왕희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걸렸다.’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대는 물러가 있으라. 내 바로 황상께 달려갈 것이다.”
“예, 문하시랑평장사 대감!”
난 조심히 뒤로 물러났다. 내가 문을 열고 나가기도 전에 부자지간에 의견이 충돌하는 것을 내 귀로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무부들의 세상입니다, 아버님!”
내가 있을 때 가만히 있던 왕희가 내가 나가자마자 왕준에게 말했다.
“그래. 무부들이 득세하는 세상이지.”
“아버님께서는 가만히 계셔도 되는 때라고 이 소자는 생각하옵니다. 아버님께서 문신들의 눈총을 받으며 돌보신 무신들이 몇이옵니까? 곧 아버님의 세상이 오는데 왜 무신들과 척을 지려고 하십니까?”
“내가 돌본 자들은 무신들이지 무부들이 아니다!”
왕준은 아들 왕희에게 소리를 질렀다.
“나라에서 무신들을 괄시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은 자명한 일! 황실이 하지 못한 것을 내가 대신 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끝내 무부들이 난을 일으켰다. 이제 이 늙은 몸을 이끌고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
“하오나…….”
“왜, 내가 가만히 있으면 무부들이 내게 문화시중의 자리라도 줄 것 같으냐?”
왕준의 말에 왕희는 마음속으로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아들 된 자로 아버지의 뜻을 꺾지 못하고 있는 왕희였다.
“고얀 것!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
“송구합니다, 아버님! 하지만 불학무식한 무부들이 정사를 오래 이끌고 가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옵니다. 그러하니 아버님에게 도움을 청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무부들이 망치는 조정에서 허수아비를 하고 싶지는 않다. 무엇을 하느냐? 아비가 늙었다 하여 이 아비의 뜻을 거스를 것이냐?”
왕준은 대로해서 아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니옵니다, 아버님! 하오나…….”
“무부들은 나를 잊고 있다. 그러니 지금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이 도탄에 빠진 조정을 구할 수 있다. 그래! 그렇게만 된다면 네가 원하는 문화시중의 자리도 따라 올 것이다. 물론 네가 이어갈 자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