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3권 -- >백화는 앙칼지게 검을 뽑아 앞에 있는 여자의 목에 겨누고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백화의 검이 겨눠진 여자는 깜짝 놀라 동공이 커졌다.
“웬 년이냐고 물었다.”
백화는 금방이라도 여자를 벨 것 같았다. 분명 복색으로 봤을 때 상궁이었다.나는 어두운 그림자 뒤편에서 나오는 상궁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그 상궁이다. 태후전 그 상궁!’
“태후전에서 왔소이다.”
목에 검이 겨눠진 상태에서도 저렇게 담담히 말하는 걸 보면 담이 크다는 증거다. 원래 담이 큰 것들은 많은 일을 꾸민다. 특히 계집이 담이 크면 나라를 망치는 법이다.
“무슨 일이지? 왜 숨어서 우리를 염탐하고 있는 것이냐?”
백화가 다시 재촉을 하자 태후전 상궁은 백화의 얼굴을 보고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백화가 무비의 호위 무사였다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이렇게 되나?’이건 나의 실수다. 정말 호기로 바꿔놓은 것을 어처구니없게 위기로 돌리는 내 치명적인 실수인 거다.
원래 고부 갈등은 부처님도 못 막는다는 말이 있다. 상궁이고 계집이면 말하기 좋아하고 고자질하기 좋아하는 족속이다.
그러니 공예태후에게 가서 나와 같이 있는 호위 무사가 무비의 호위 무사였다고 고자질하게 되면 나를 넘어서 이의방이 무비를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을 공예태후가 할 수 있다.그럼 공예태후는 순간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원래 어미라는 것들은 자기 아들이 잘못한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오직 계집을 잘못 만나서,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집안이 망하고 착한 자신의 아들을 망쳤다고 생각한다.
그건 아마 질투심일 거다. 하지만 그 질투심은 어떤 칼보다 무서운 법이다.나는 이 순간 고민을 했다.
저 상궁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변을 살폈다.다행히 아무도 없다.
정말 여차하면 죽여야 하는 거다.내가 왜 이런 악독한 마음을 먹게 된 것이냐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고부의 갈등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 난 저 상궁과 공예태후에게 무비 쪽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이의방을 겨우 공예태후의 옆에 붙였는데 모든 게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난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 상궁을 봤다.
“무슨 일이오?”
우선 나를 감시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 죽여도 늦지 않다. 난 이미 백화에게 여차하면 베라는 눈치를 줬다. 그리고 그 눈치를 상궁도 본 듯했다.파르르 떨리는 눈빛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길에 봤다면 믿지 않으시겠죠?”
“당신의 농담을 들어줄 만큼 백화의 검이 무뎌지지는 않은 것 같소.”
“무비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상궁은 죽고 싶어 그러는지 내게 무비에 대해 물었다.
“묻는 이유는?”
“백화가 수검대의 대장이라는 것은 이 궁에 있는 상궁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오. 그리고 그 백화수검대의 이름을 지어준 분이 바로 무비요.”
“백화가 내 옆에 있다고 해서 내가 무비의 행적을 알 거라는 생각은 좀 비약이지 않나?”
“모른다는 것이오?”
“모른다.”
“그럼 왜 무비의 충복인 백화가 위장인 당신을 따라다니는 것이오?”
“주웠다!”
내 말에 백화와 상궁 둘은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한 치의 보탬도 뺌도 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더 설명할 필요가 있나?”
“주웠다? 그 말이 더 농처럼 들립니다.”
“내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해서 얻는 게 뭐가 있지?”
난 다시 상궁을 노려봤다.
“그렇기는 합니다.”
“그럼 이제 왜 나를 따라왔는지 설명할 차례 아닌가?”
내 질문에 상궁이 나를 빤히 봤다.
“태후마마께서 유심히 보고 계십니다.”
“나를 유심히 보고 계시다?”
“왜 내가 끄나풀이라도 되어주기를 바라는 건가?”
“황실을 위하고 황실의 어르신의 뜻을 받잡는 것이 충정이지 않겠습니까?”
충정은 무슨, 개가 풀 뜯어 먹는 충정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럼 내가 주면 황실에서는 내게 무엇을 줄 거지.”
내 말에 상궁은 놀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난 힐끗 상궁의 머리 위를 봤다.‘해월!’상궁, 그녀의 이름인 것이다.
“태후마마께 여쭤보겠습니다.”
나는 잠시 해월을 봤다. 그리고 해월을 죽일 마음을 포기했다. 분명 해월은 태후에게 나를 만나기 위해 간다고 했을 거다.
그럼 해월이 싸늘한 시체가 된다면 제일 먼저 의심을 받는 자는 내가 될 것이다.뭐 의심이야 천번 만번 받아도 좋지만 아직 입지가 약한 내게 잘못된 여파라도 미치는 경우에는 지금까지 죽어라 용만 쓰고 목이 댕겅 달아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선은 그냥 보내줘야 한다.
“무엇이 그리 궁금해 왔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마라! 나를 다시 미행하면 백화의 검이 너를 벨 것이다.”
난 해월을 위협했다. 하지만 해월은 전혀 위협으로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참고로 태후마마께는, 백화를 못 본 것이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고부 갈등 때문에 태후마마께서 오판을 하시지 않게 하기 위함이지.”
내 말에 해월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난 백화를 주웠다. 나를 감시할 시간이 있으면 옥새나 찾아야 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은 공예태후에게 고민거리 하나를 더 늘려주기 위함이었다.
“알았소. 그럼!”
해월은 내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저 해월이 어찌 너를 알지?”
“무비를 무척이나 싫어하니까요.”
해월이 무비를 싫어한다? 물론 무비를 좋아하는 여자는 거의 없다.
“뭐 따지고 보면 무비를 좋아하는 여자도 없잖아.”
“그렇습니다. 하지만 해월은 무비를 극도로 싫어합니다. 예전에 춘심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무척 자애롭고 심성이 곧은 분이셨습니다.”
백화는 뜬금없이 춘심이라는 여자의 이야기를 꺼냈고 그와 동시에 해월은 백화를 뚫어지게 봤다.
“그래서?”
“그분이 다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다소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렇습니다.”
“그 억울한 죽음에 무비가 관여되어 있다는 건가?”
“무비께서 주관하셨습니다.”
백화의 말에 해월은 유심히 백화를 봤다. 지금 이 순간 백화는 무비의 편에서 이야기하지 않고 중립적으로 올바르게 그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고 해월은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꺼내지?”
내 물음에 백화도 힐끗 해월을 봤다.
“백화가 말한 춘심이라는 분은 나를 키워주신 언니니까요.”
이제 대충 답이 나오는 것 같았다. 결국 해월에게 부모 같은 춘심을 무비가 죽였고 해월은 그래서 무비를 극도로 싫어하고 저주하고 있다는 소리다.
그러니 백화에게도 감정이 좋지 않을 수밖에. 하지만 이 순간 해월이 백화에게 가졌던 감정의 앙금이 약간은 씻겨 내려간 듯한 느낌을 나는 받았다.‘백화가 의도적으로 말한 거군.’난 백화가 밥만 잘하면 금상첨화라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하여튼 무비의 잘못은 모두 해월을 통해 태후마마의 귀에 들어갑니다.”
역시 적이 많은 무비다. 그리고 그런 무비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무비를 포기해야 하나?’난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자신의 근본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출생도 모르고 이리저리 일을 꾸밀 수는 없는 일이다. 분명 무비와 김돈중은 고려 사회에서 신문이//신분이 높은 인물이다.
그런 인물들이 내 출생의 비밀을 공유하고 안다면 내 신분이 그리 낮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내 출생의 비밀이 더 궁금했다.그러니 나에 대한 힌트를 쥐고 있는 무비를 어쩔 수 없이 보호해야 한다.
‘이러지 말고 사라진 김돈중을 찾는 게 더 좋겠다.’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하여튼 우린 무비와는 관계가 없다. 네가 가서 공예태후께 고자질을 하든 말든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책임도 네가 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지요.”
해월은 그렇게 말한 후 살짝 내게 목례를 하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리고 난 내 갈 길을 재촉했다.
“아악!”
그때 궁궐 담 바로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이거 또 뭐지?’난 바로 인상을 찡그렸다.그와 동시에 백화가 바로 옆 담에서 넘어오는 비명 소리의 출처를 알기 위해 빠르게 달려가 탁 하고 벽을 차고 올라갔다. 그러고는 담 너머를 본 후 내게 다시 달려왔다.
“이럴 때는 눈치가 아주 장난이 아닌데 말이야!”
참 신기한 면이 많은 백화였다. 그리고 백화가 무척이나 빠른 몸놀림의 소유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물을 찬 제비! 그게 딱 백화일 거다.
제비가 물을 차고 다시 비상을 하듯 조금 전 백화는 소리 없이 담을 차고 올라가 몸을 낮추고 주위를 살폈다.그건 보통 무위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무위를 가진 백화가 뒤에서 조용히 찌르는 검이라고 해도 왜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혹시 백화는 알면서도 그 검을 맞은 건 아닐까?‘설마…….’항상 느끼는 거지만 설마가 항상 사람 잡는다.
“담 너머에 채원 산원이 환관들을 고신하며 물고를 내고 있습니다.”
내 앞으로 백화가 달려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그래! 왜 안 보이나 했다.’난 채원이 무슨 짓을 하는지, 그리고 왜 그러고 있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위험한 곳에 별것이 다 나오는 법이다.”
난 그렇게 말하며 채원이 환관들을 물고를 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채원이 환관을 고신하고 있는 전각의 공터는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한마디로 두려움이 가득 싸인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죽이려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의 흥분됨이 진하게 교차되고 있었고, 교차되는 그 지점에서 피비린내는 진동을 했다.
환관들은 두려운 눈동자로 오직 채원이 자신의 옆에 오지 않기를 빌고 또 비는 듯했다.‘쯔쯔쯔! 그 좋은 권세는 다 어디다 두고…….’난 환관들이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채원은 무릎을 꿇고 있는 환관들을 노려보며 그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토설을 하라니까!”
채원은 다짜고짜 환관에게 토설을 하라고 위협을 했다.그의 손에는 묵직한 도리깨가 들려 있었고 그 도리깨는 환관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미 머리가 깨져 쓰러져 죽은 환관도 몇 되는 것 같았다.
“무, 무엇을 말입니까?”
“몰라서 묻는 것이냐? 네놈들이 태자의 밀명을 받고 반란을 도모하였음을 토설하라는 거다.채원의 말에 환관은 두려움에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채원이 왜 저러고 있을까?태자궁에서 생포한 환관의 수는 총 다섯 명이다.열다섯 명은 이의방과 내가 현장에서 처단했다. 그런데 지금 채원의 앞에 있는 환관의 수는 대략 봐도 서른 명은 되는 듯했다.
그건 다시 말해 채원이 지금 다른 것을 원하고 있다는 뜻이다.
“저, 저희는 태자전 환관도 아닙니다.”
“끝내 발뺌을 하려는 것이냐?”
젊은 환관이 다시 채원의 말에 놀라 오직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럴 때 꼭 죽으려고 용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이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반역이라고 했느냐? 누가 반역을 했느냐? 그리고 반역이 무엇이냐? 너희 무부들이 한 것이 반역이지 않느냐? 우리는 겁 많고 힘없는 것들이라 네놈들에게 황상 폐하가 겁박을 당하실 때도 두려워 벌벌 떨고 있었을 뿐이다. 어디 우리에게 다시 황상 폐하와 태자마마를 겁박할 빌미를 요구하는 것이냐!”
나는 중년의 환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자기 입으로 스스로 겁이 많고 힘없는 환관이라고 말해놓고 이 험악한 분위기에서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채원 역시도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웃었다.
“뭐가 어떻다고?”
“네 이놈들! 불학무치하고//불학무식하고 인면수심이라도 이래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역시 정말 세상은 놀랍고 신기한 사람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나는 오늘 알았다.‘아주 죽으려고 용을 쓰시네.’
“불학무식! 인면수심?”
바보한테 바보라고 그러면 화를 내지 않는다. 바보니까. 하지만 무식한 사람한테 무식하다고 말을 하면 미친 듯 죽이려 달려든다. 왜 무식하니까.그럼 면에서 저 환관은 오늘 죽으려고 날을 딱 받은 것이다.
“그래! 죽어보자!”
그와 동시에 채원의 도리깨가 하늘로 번쩍 들어 올려 져서 환관의 머리를 내려찍었다.퍼억!순간 환관의 머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쿵 하고 환관이 쓰러졌다.
그런데 난 여기서도 이상했다.‘왜 철퇴가 아니라 도리깨지? 한 방에 죽이려면 철퇴가 좋은데…….’왜 자꾸 나는 이런 것이 궁금한지 모르겠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환관을 봤다. 아직 채원의 일격에 죽지 않은 것 같았다.
‘죽이려고 후려친 것이 아니네?’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왜 핍박을 하는 걸까?채원의 행동을 보고 의문이 일었다.
“말로 해서는 안 될 놈이다. 이놈을 모두 매달아라!”
채원은 소리를 질렀다. 그때 채원은 내가 와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인상을 찡그렸다.‘내가 싫은가?’채원은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왔나?”
“무슨 일이십니까?”
“태자와 내통하고 있는 자들을 심문하는 것이네.”
“그렇습니까? 저는 비명이 들려서 왔습니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 오기는…….”
채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눈치를 봤다. 그는 나 모르게 그리고 이의방 모르게 무엇인가를 꾸미고 있는 듯했다.
‘힘없는 환관들을 겁박한다?’난 거기에 집중했다.‘왜지? 왜지? 왤까? 설마?’나는 내가 생각해놓고도 잠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탐욕스럽다는 역사적 기록을 남긴 채원이기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난 채원을 봤다.
“산원 나리!”
“왜 그러느냐? 회생아!”
“저를 잠깐 보시겠습니까?”
“너를?”
“그렇습니다.”
난 그렇게 말하고 채원과 함께 전각 뒤편으로 갔다. 돌아서서 잠시 채원을 빤히 잠시 보다가 내가 지을 수 있는 최고로 비열한 얼굴로 채원을 보며 웃었다.
“저렇게 털어서는 안 나옵니다.”
“뭐? 안 나온다고?”
내 말에 채원이 놀라며 나를 봤다. 저렇게 놀라는 것은 내 설마가 역시로 변하고 있다는 증거일 거다.‘뭐야? 설마가 진짜인 거야?’정말 채원은 이렇게 그릇이 작구나! 어쩌면 내게는 다행일지도 모른다.그가 훗날 이의방에게 죽임을 당하는 이유가 다 있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으음. 뭔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래도 체면이 약에 쓰려고 조금은 있는지 그는 발뺌을 했다.
“괜히 닦달을 해봐야 소용이 없으니 산원 나리께서는 장졸들을 이끌고 가 계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으음!”
채원은 내 말뜻을 알고 헛기침을 했다.
“네가 심문을 하겠다는 거냐?”
“예. 제가 소상히 알아내겠습니다.”
“그래. 내가 이번 일에 대해 전모를 소상히 밝혀라. 저들은 물고를 내도 좋다. 토설을 하지 않으면 고신을 해서라도 토설을 받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