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3권 -- >3장. 때로는 손바닥으로도 해를 가리는 법공예태후는 그렇게 자신의 아들인 황제를 품에 안아 위로한 후 내전을 나왔다. 정말 황제의 존엄은 바닥으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대전으로도 가지 못하는 황제.지금 의종의 처지가 딱 그랬다.
“으음! 이 황실이 어찌 될꼬…….”
공예태후는 깊은 시름에 잠겼다. 그리고 그때 조심히 상궁 하나가 공예태후의 앞으로 다가왔다.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으나 다급함이 얼굴 가득 담겨 있었다.
“너는 태자궁의 상궁이 아니더냐?”
공예태후는 상궁을 보며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태후마마!”
“그런데 여기는 어인 일로 발걸음을 한 것이냐?”
태후의 물음에 상궁은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태자마마를 구명해 주시옵소서.”
“뭐라? 그건 또 무슨 소리냐?”
“태후마마만이 태자마마를 구명하실 수 있사옵니다.”
상궁은 다짜고짜 태자를 살려달라고 공예태후에게 애원을 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슨 영문인데 이러는 것이냐?”
가만히 보고 있던 해월이 태자궁 상궁에게 질책을 하듯 물었다.
“이곳에서 여쭈옵기 어려운 일이옵니다.”
태자궁 상궁은 그렇게 말하며 자꾸 주변을 살폈다. 그 순간 순검군 장졸 몇이 급하게 달려와 눈깔을 부라리며 태자궁 상궁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앞에 있는 분은 존엄한 황제의 모후이니 지금 무릎을 꿇고 있는 상궁을 다짜고짜 어찌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거드름을 피우며 별장 하나가 걸어와서 공예태후에게 살짝 예를 갖추고 태자궁 상궁을 노려봤다.
“소인, 별장 이광정이라 하옵니다.”
이광정!무신 정변으로 대장군에 올랐고 이후 승승장구했다. 사졸 출신으로 배운 것이 없어 안하무인이었으며 거만하여 무신들로부터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 인물이었다.
항오(行伍)에서 출발하여 1170년 정중부가 무신의 난을 일으켜 의종을 폐위시킬 때 참여한 공로로 대장군이 되었다.1174년(명종 14년) 추밀원지사를 지내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어사대부, 1179년 참지정사를 거쳐 1180년 태자태부판병부사에 이르렀다.
1183년 수태부판이부사(守太傅判吏部使)를 지내고 1184년 문하시랑평장사로 관직에서 물러났다.그는 성격이 매우 완고하고 관직에 탐욕이 많아 늙어서도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두려워했다.
현대적으로 따진다면 한마디로, 죽어라 국회의원 해먹고 싶어 안달이 난 졸부쯤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또한 졸부들의 특징이 그렇듯 말보다는 주먹이 먼저 나가는 성급하고 직설적인 성품으로 경시서령 왕총부가 청탁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욕지거리를 하며 뜰아래로 끌어내려 의관을 벗기고 매질을 하였을 정도였다.
정존실을 면책한 일로 장보에게 탄핵을 당하였을 때, 크게 노하여 장보를 귀양 보내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죽였다. 이것만 봐도 뒤끝도 아주 깊은 위인이었다.
또한 불학무식했으나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정권에서 승차를 거듭했을 만큼 처세에 능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
공예태후의 물음에 이광정은 힐끗 태자궁 상궁을 노려봤다.
“역모에 공조한 상궁을 추포하기 위하여 왔나이다.”
이광정은 무례하게 공예태후를 빤히 보면서 말했다. 순간 공예태후는 치욕감에 차올라 이광정을 노려봤지만 쉬이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이렇게 세상이 어지러우면 죄가 없는 사람도 역모에 연류가 되었다고 잡아가고 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하지만 이광정은 공예태후 앞에서 너무나 불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역모라 하였느냐? 충성스러운 무신들이 이 황실과 고려를 지키고 있는데 어찌 역모가 일어날 수 있느냐!”
공예태후 역시 산 세월이 많아 처세에 능했다.
“태자궁에서 역모를 주도했습니다.”
순간 공예태후는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성정 급한 태자가 일을 친 거였다.
“태자궁에서 역모라? 나는 듣지 못했나?”
“태자궁이 폐쇄되었으니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저년이…….”
“누구 앞에서 함부로 망발을 서슴지 않는 것이오!”
해월이 이광정을 무섭게 질책했고, 이광정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리 힘을 잃은 황실이라고 해도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자는 현 황제의 모후이니 이광정도 어쩔 수 없었다.
“하여튼 저 상궁을 추포하여 고신을 해 보면 알 것입니다.”
이광정은 그렇게 말하고 뒤에 서 있는 장졸들에게 당장 잡아가라는 눈치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장졸들은 앞으로 성큼 나왔다. 공예태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상궁은 어린 새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태자마마를 구명해 주시옵소서.”
상궁은 당장 끌려갈 참에도 태자의 구명을 애원했다.
“당장 멈추지 못할까! 아무리 불학무식한 무부라고 해도 이곳이 어디라고 행패를 부리느냐!”
꾹꾹 참고 있던 공예태후가 노기에 찬 표정으로 분기탱천했다. 그 순간 이광정은 인상을 찡그렸다.
“저는 그런 거 모릅니다. 원래 무부고 불학무식해서 그런 거 모릅니다. 전 단지 시킨 일만 합니다.”
“누가 시켰느냐? 그래, 좋다. 내 앞에서 나에게 모욕을 주라고 누가 시켰느냐?”
한번 탱천한 노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법이다. 또한 공예태후는 의도적으로 더욱 분노를 발산했다.
“그게, 그러니까…….”
“그게 그러니까 누가 시킨 일이냐?”
“송구합니다. 저 역시 목이 하나라서요.”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멈칫거리고 있는 장졸을 노려봤다.
“네놈들은 목이 서너 개라도 된다더냐! 어서 저년을 끌고 가지 못할까!”
“네 이놈!”
그때 내전을 지키던 이의방이//이의민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부월을 휘두르면서 앞으로 달려 나왔다.
“어느 안전이라고 망발에 무례를 범하는 것이냐!”
이의민의 질책에 이광정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봐도 입고 있는 갑주가 위장의 것이 분명한데,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 어이가 없다는 듯 이의민을 노려봤다.
“네놈은 겨우 위장인 주제에 별장인 내가 무엇을 하는 짓이냐!”
이광정이 이의민을 꾸짖었다. 상명하복이 지엄한 군대이기는 했지만 무신 정변이 일어난 후에는 그 계급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따지고 보면 이의방과 이고 그리고 채원보다 이광정의 직위가 높았다.
“그럼, 별장인 네놈은 존엄하신 태후마마 앞에서 그리 불충해도 되는 것이냐!”
이의민이 부월을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자 공예태후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의민의 상관이라는 이의방에게 더욱 마음이 갔다.
“나는 그냥 상부의 명을 다룬 것뿐이다. 무엇을 하는 것이냐! 어서 저 계집을 추포하지 않고.”
아무리 불학무식한 이광정이라고 해도 지금의 행동은 정말 광인이라도 된 것처럼 보였다.수웅!거대한 부월이 하늘을 가르듯 바람을 가르듯 이광정과 장졸의 앞에서 휘둘러졌다.
“누구도 그 상궁을 건드리는 놈은 이 부월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부월!원래 부월은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작은 도끼와 큰 도끼를 아울러 이르는 거였다. 출정하는 대장이나 큰 임무를 띤 군직의 관리에게 임금이 정벌과 중형의 뜻으로 주는 것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대인 살상용 큰 도끼를 부월이라고 하게 되었다.
그리고 훗날 권력을 잡은 이의민은 자신의 부월에 금칠을 해서 가지지도 못한 권위를 내보이려 했다.
“뭐라? 네가 지금 상장군의 명을 거스르려 한다는 것이냐!”
“상장군이라고 했느냐?”
이의민의 뒤에 있던 공예태후가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으음.”
“누구도 이 상궁을 데리고 가지 못한다. 그것이 상장군 정중부라고 해도 절대 안 될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의민이 마치 공예태후에게 들으라는 듯 소리를 쳤다는 점이다. 공예태후는 힐끗 이의민을 봤다.
“정말 견룡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른다고 하더니 이렇게 높을 줄은 몰랐구나.”
“그래. 어디 그 위세에 오늘 한번 죽어 볼 것이냐!”
다시 한 번 이의민이 부월을 이광정의 코앞까지 휘둘렀고, 겁에 질린 이 광정은 뒤로 물러났다.
“내 두고 볼 것이다.”
이광정은 그렇게 말하고 데리고 온 장졸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자 이의민은 이광정의 뒷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공예태후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상궁을 근심 어린 눈으로 내려다봤다.
‘이를 어찌할꼬? 이를 어찌해!’공예태후는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그 순간 해월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이의민을 뚫어지게 봤다.
이의방과 이고는 자리에 차분히 앉아 있었다.
“그놈은 왜 자꾸 자네가 준 집에 가는 것이야? 이렇게 급박한 순간에.”
아직 이회생이 오지 않아 그러는지 이고는 이의방을 보며 투덜거렸다.
“하하하! 꿀이라도 발라놓은 모양이지.”
“꿀?”
“그래. 아직 한창일 때가 아닌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그 아이의 의중에는 제법 계집이 많이 들어 있더군.”
이의방은 마치 회상의//회생의 속을 훤히 보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계집이 들어 있다고?”
“그래. 벌써 몇은 챙긴 것 같더군.”
“그렇게 한상 떡하니 차려놓고 왜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가? 설마 이거 회생이 그놈 주려고 차린 건가?”
“자꾸 그냥 부르기 미안하지 않나? 우리도 술 한잔하고.”
“체! 술이 고픈 거였군.”
“하하하! 그렇게 되는 것인가?”
이의방은 상당히 여유로워졌다.
“회생입니다.”
“들어와라.”
조심히 들어간 방 안에 딱 봐도 나를 위해 차려놓은 것 같은 상을 보고 나는 군침을 삼켰다.‘사람 부릴 줄 아네.’난 이의방을 보며 씩 웃었다.
“위장 이회생, 행수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격식은 무슨. 와서 앉아.”
“예.”
난 먹을 것 앞에서 마다하지 않았다.꼬르륵!그때 쪽팔리게 내 배 안에서 요동을 쳤다.
“시장했던 모양이군. 들게.”
“예. 감사합니다.”
난 바로 잘 삶아놓은 닭다리를 쭉 뜯어 한입 베어 물었다.‘토종닭이라 감칠맛이 나네.’이 고려 시대에 있는 닭은 모두 토종닭일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네놈은 사양할 줄도 모르느냐?”
“워낙 배가 고파서 그럽니다.”
“큰일 하는 사람이 먹을 걸 챙기지 못하는 일은 다반사인 것을…….”
“큰일이야 두 행수 어르신이 하시는 거죠.”
난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닭다리를 뜯었다.
“배고픈 아이에게 핀잔을 줘서 뭐하나? 술이나 한잔하게.”
이의방은 내게 아이라고 말했다. 지금 이 순간 고려의 권력을 틀어쥐려고 준비하는 이의방은 아이인 내게 의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의방의 장점이다.이의방은 결단력이 좋은 장수다.
거기다가 사람을 부릴 줄 아는 재주가 있다. 또한 부하를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존중하면서 그 부하의 말을 경청한다.이것이 초기의 이의방의 모습이다. 그러니 이렇게 상장군을 비롯한 대장군들을 명분으로 겁박하고 이 자리에 자리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훗날 세상 사람들은 이의방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까?’역사는 후인의 몫이고 기록자의 몫일 거다. 후인들은 이의방을 후안무치한 권력의 속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만은 그는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개척하는 개척자일 것이다.
“그럼 우리가 아이에게 이렇게 의지를 하는 겐가?”
이런 말을 하는 이고는 솔직한 사람이다.
“들게. 모처럼 술이나 한잔하자고.”
이의방은 이고에게 술잔을 권했다. 그리고 꼴꼴꼴 소리를 내며 잘도 술잔에 술이 채워졌다. 그 꼴꼴꼴 소리에 나는 꼴딱꼴딱 침이 넘어갔다.
원래 남자라면 다 이럴 것이다. 밥보다야 술이고, 술보다는 계집일 것이다.
물론 나도 남자다. 지금 저들에게 어린아이로 취급받기는 하지만, 내 기억이 40대 중반이니 살고 기억한 세월로 따진다면 저들과 나는 술잔을 기울이며 삶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배가 죽어라 고프다.
“쩝쩝!”
내가 이의방과 이고에게 알아먹을 정도로 눈치를 주자 이고가 나를 힐끗 보고 피식 웃었다. 잔인하게 검을 휘두르는 이고도 자신의 사람에게는 저런 미소를 보이나 보다.
“너도 한 잔 주랴?”
“기름진 것을 넣으니 속이 답답합니다.”
“술을 못 마셔 답답하겠지.”
“헤헤! 그럴 수도 있고요. 꾹꾹 눌러주십시오.”
“꾹꾹? 하하! 말투가 참 요상하구나.”
“예. 꾹꾹입니다.”
내 말에 이고는 피식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네놈은 식탐에 술탐에 그리고 계집까지 탐하니 만수무강하기는 틀렸다.”
이건 웃자고 하는 농담일 거다. 그러니 죽자고 덤벼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농담은 농담으로 받아줘야 하는 거다. 그리고 요즘 나는 이상하게 정이 간다.
이의방을 위해 꾀를 내고는 있지만 정은 이고에게 가고 있었다.‘이상하게 마음이 간단 말이야!’분명 이고는 훗날 이의방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이의방의 책사로 산다면 이고를 죽일 계략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에게 나는 정이 가고 있다. 그게 요즘 참 신기했다.
“그럼, 이고 행수께서는 만수무강하십시오.”
“이놈! 네놈의 말이 내 귀에는 벽에 똥칠을 할 때까지 살라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그것도 복이지요.”
거사의 밤이 4일이 지나고 이의방과 이고는 무척이나 여유로워진 것 같았다.
“그나저나 네가 말한 것처럼 하기는 했으나 손바닥으로 어찌하늘을 가릴 수 있겠느냐?”
이의방은 약간 걱정되는 투로 나를 보며 말했다. 아마 이번에 추진하는 일이 내심 불안해서 나를 다시 부른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충분히 가려집니다.”
난 다시 닭다리를 뜯으며 이의방에게 말했다.
“괜히 상장군과 척만 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상장군이 저렇게 웅크리고 있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15만을 통솔하는 군부의 최고 권력자이니 걱정이구나.”
“15만을 통솔하고 계시지만 지금 당장 1만을 동원하지 못해 웅크리고 계시잖습니까?”
“1만을 동원하지 못한다?”
“그렇습니다. 용호군이 1만입니다. 제가 만약 상장군이면 병력을 동원해서 용호군을 쓸어버리고 행수 어른을 도모했을 것입니다.”
“나를 도모해? 무슨 명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