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웅-43화 (43/620)

< -- 간웅 2권 -- >12장 황제 폐위의 명분을 얻다공예태후가 있는 전각.공예태후는 심각하게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이 빠져있었고, 그 옆에 있는 두 상궁들은 공예태후의 눈치를 보느라 숨을 죽이고 있었다.두 명의 상궁은 무척이나 대조가 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구중궁궐 안에서 홀로 지내며 늙어간,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시든 꽃이다. 또 하나는 이제 막 피어나는 꽃이었다. 어떻게 보면 늙은 상궁은 참으로 가여운 인생이다.

“으음.”

공예태후는 신음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그 아이가 자꾸 눈에 들어오는구나.”

공예태후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 아이라고 하시면…….”

“무도한 이의방의 옆에서 내게 말을 했던 그 아이 말이다.”

“아, 그 어린 위장 말씀이십니까?”

늙은 상궁도 회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공예태후에게 물었다.

“그래, 그 아이 말이다. 그 아이가 이상하게 자꾸 생각이 나는구나.”

“제가 알아본 바로는 견룡행수의 처조카라고 들었습니다.”

“견룡행수의 처조카?”

“그렇습니다, 그리 들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것이 어쩜 그렇게 무섭고 치밀한지…….”

“예?”

“왜 이의방이 그 환란 속에서 나에게 달려왔을까?”

“그야 공예 태후마마의 안녕이 걱정되어서 온 것 아니겠습니까?”

“너는 그리 보이느냐?”

공예태후는 한심하다는 듯 늙은 상궁을 봤다.

“아니옵니까?”

“나를 업고 이 조정을 장악하기 위함이야.”

공예태후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거의 까막눈에 가까운 무부들이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할 수 있었을까?”

공예태후의 고민은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의방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자신의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할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내 아들의 옥좌가 흔들리고 있다.”

공예태후의 말에 두 상궁은 기겁을 했다.

“설마 이의방이 역모를 꾸미는 것이옵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하오시면…….”

“이의방이 어떤 마음을 먹는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최소한 내 아들이 옥좌를 빼앗기는 것은 정해진 수순 같구나.”

“하오나 그리 무엄한 짓을 감히 무부 따위가 할 수 있겠나이까?”

“겨우 무부 따위니 하는 것이지.”

공예태후는 그렇게 말하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니 절대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 지금 무부들이 난을 일으킨 것은 괄시와 천대, 그리고 그 악독한 무비 년 때문이다. 그러니 잘 다독이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문신들이 너무하기는 했지. 무신들을 너무 괄시했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늙은 상궁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공예태후에게 물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그들에게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해월아?”

공예태후는 젊은 상궁을 봤다.

“비천한 제가 무슨 생각이 있겠나이까?”

젊은 상궁은 공예태후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머리를 숙였다.

“지금은 모든 이들의 생각을 모아야 할 때다. 그러니 너도 말해 보거라.”

사실 공예태후는 늙은 상궁에게는 생각을 묻지 않았다. 그건 다시 말해 젊은 상궁을 늙은 상궁보다 더 신임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제 하찮은 생각이 궁금하시다면 한 말씀 올리겠나이다.”

“그래, 해봐라.”

“소녀가 보기에는 이의방의 옆에 있던 그 아이가 모든 것을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그 아이가 움직이고 있다?”

“그렇습니다. 이의방과 이고, 그리고 상장군 정중부는 무인이지 지략가는 아닙니다.

이렇게 빠르게 황궁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은 지략이 있는 자가 뒤에서 조종을 하기 때문일 겁니다. 아무리 이의방의 처조카라고 해도 태후마마를 뵙는 자리에 같이 데리고 올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 아이가 이의방에게 온갖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태후마마와 이야기를 할 때도 중요한 이야기는 그 아이가 했습니다.

“맞다. 그래, 그 아이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를 태후마마의 사람으로 만드셔야 할 것입니다.”

“내 사람으로 만들어라?”

“그렇습니다. 최소한 역성혁명은 막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젊은 상궁의 말에 공예태후는 인상을 찡그렸다. 젊은 상궁의 의견이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젊은 상궁 해월이 스스럼없이 역성혁명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건 다시 말해 스스로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을 정도로 젊은 상궁은 공예태후에게 신임을 받고 있다는 거였다.

“맞아. 그 아이다, 그 아이! 내가 그 아이를 조용히 만나 봐야겠구나.”

공예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태후마마!”

“그런데 익양후의 사택에 견룡군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젊은 상궁의 말에 공예태후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본 늙은 상궁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결국 그리되는 것인가…….”

공예태후는 늙은 상궁을 보며 물었다.

“아직도 못 찾은 것이냐?”

“소, 송구하옵니다.”

“이 급박한 순간에 어디를 갔단 말이냐, 어디를…….”

공예태후는 잠시 생각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애타게 찾고 있었지만 대놓고 찾지 못하는 것이 공예태후의 입장인 듯했다.

“송구하옵니다, 태후마마!”

“찾으란 말이다. 어서 찾아, 어서!”

다시 한 번 공예태후가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난 태자궁에 도착했다.

내 생각대로라면 이 태자궁 여기저기에 살수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의방을 없애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나까지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이 태자궁 안에는 살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나는 주변을 매의 눈으로 날카롭게 살폈다.

이건 한마디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형국이다. 하지만 난 절대 그냥 새우는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다짐을 하고 또 다짐했지만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젠장! 이러다가 내가 죽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난 약간의 두려움을 느껴 구석구석을 살폈다.그 때, 이의방에게 태자의 명을 전한 상궁이 보였다.

그녀의 눈도 이상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기분 때문이겠지.’하지만 그녀는 치마폭에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안에 칼이라도 품고 있는 건가?’자꾸 의심의 눈초리로 보니 태자의 명을 전한 저 상궁도 이상하게 보였다.‘계집치고는 너무 당당히 서있어. 저런 것은 절대 평범한 계집이 아니야.’보통 역사를 망치고 나라를 망치는 왕은 거대한 꿈과 욕망을 누르지 못한 계집을 곁에 두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저 상궁은 충분히 그럴 만해 보였다.‘꽃으로 비유를 한다면 독이 있는 각시투구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주변을 살폈다. 정말 폭풍 전야처럼 너무나 고요했다.

“환관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난 이미 많은 환관들이 태후전과 태자궁으로 대피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다시 말해 어딘가에 숨어서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어딘가에 숨어 내 숨통을 노리겠지.”

이미 이의방은 전투태세를 갖춘 것 같았다. 그 순간 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강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이것이 무인의 포스구나!’정말 이의방의 몸에서는 나의 근육을 경직시키기에 충분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사람들은 그것을 살기라고 부를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상궁이 태자궁 전각 앞에 차분히 서있는 이의방과 나에게 들어가라고 말했다.

“알았네.”

그렇게 우리는 흉수가 있을지도 모르는 태자궁의 거대한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정말 목숨을 건 순간이었다.

‘내가 왜 이런 의견을 냈는지…….’이번 위기는 내 혀가 스스로 자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고처럼 그냥 병졸들을 투입해서 쓸어 버리자고 말했어야 했다는 후회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더욱더 무도한 무부가 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거사를 위해 검을 들었지만 그 이후는 대화로 풀어가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안전하게 권력을 쥘 수 있다.‘이번이 마지막 위기이기를…….’난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내 왼편에서 걸어라.”

“예, 행수 어른!”

난 이의방이 왜 자신의 왼편에서 걸으라는지 알 것 같았다. 유사시 바로 검을 뽑아 대응을 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난 살짝 검을 들어 이의방이 최대한 빠르게 검을 뽑을 수 있게 했다.지금 내 목숨을 의지할 자는 오직 이의방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고와 채원에게도 같이 오자고 할 걸…….’물론 이것은 아쉽기만 한 후회였다.그리고 이제 나의 목숨을 책임져줄 이의방을 힐끗 봤다.

그의 눈은 이미 매섭게 변해있었다.‘역시 담대한 인물이다.

’난 이의방의 이 담대한 면이 훗날 이성계에게 피로 이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어쩌면 이의방의 꿈이 조금만 더 원대했다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원래보다 빨리 개국했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그 조선은 원과 함께 대륙을 제패하는 강대국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조선이 가지고 있는 사대사상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큰 나라를 섬기고 배우는 것은 민족주의적 자긍심에는 금이 가는 일이지만 국가 안정과 발전에는 무척이나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다.그런 면에서 조선의 초기는 긍정적인 사대주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중기와 후기로 넘어가면서 맹목적인 사대주의로 바뀐 게 문제가 된 것이다.

‘하여튼 대단한 사람임에는 분명해!’난 그렇게 생각하며 이의방을 봤다.지금 이의방과 내가 걷고 있는 복도는 얼음처럼 차가운 정적이 흐르고 있었고 살기도 감돌고 있었다.

사람이 살기를 내뿜는다는 것을 나는 이 순간을 통해 처음으로 느꼈다.‘복도 좌우측에 분명 흉수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바로 복도 좌우의 방문이 와장창창 부서지면서 환관들이 이의방과 나를 향해 뛰쳐나와 검을 휘둘렀다.쉬웅!바람 한 점 없던 곳에 환관이 휘두른 살기 어린 검이 바람을 일으켰다.

“저기 역적 이의방이 있다, 참하라!”

만약 이 순간 이의방이 정말 저들의 칼에 죽는다면 이의방은 역적으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목이 잘려서 저잣거리에 효수될 것이다.지금 이의방에게 달려든 자는 총 세 명이었다.

“저자를 죽여라!”

다시 앙칼진 고음이 내 귀를 찢었고, 그와 동시에 이의방은 내가 들고 있던 검을 급하게 뽑아서 환관이 휘두른 검을 막았다.

“네 이놈들! 너희들이 나를 어찌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쉬웅!이의방은 검을 빠르게 휘둘러서 공격하는 환관 하나를 베었다.서억!서걱거리는 소리가 내 귀를 자극했다.아마 대부분의 현대인은 칼로 사람이 베이는 진짜 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소리를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피가 어떻게 튀는지도 보았다.

“으악!”

비명과 함께 환관 하나가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내 얼굴에 피가 튀었다.

“으윽!”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 회생아!”

이의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예!”

난 짧게 대답하고 환관이 떨어트린 검을 잡았다. 나와 이의방을 죽이겠다는데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나는 바로 내게 달려드는 환관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내게 달려들던 환관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검에 맞아 쓰러졌다.

“으악!”

그리고 의방은 앞으로 성큼 걸어 나가 환관을 베었다.우당탕탕!다시 방문을 부수고 십여 명의 환관이 복도로 쏟아졌다.

이상하게도 정말 내가 생각하는 일이 착착 현실이 되고 있었다.‘젠장! 정말 이십여 명은 되는 모양이야!’난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 했다.

이의방은 계속 전진하며 환관을 베어나갔다. 난 힐끗 앞을 봤다.

지금 태자가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20여 미터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환관들의 수는 십여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난 다시 이의방이 검을 휘두르는 장면을 봤다.

서억!그와 동시에 환관이 쓰러졌고, 이의방은 그 쓰러진 환관의 목을 향해 검을 꾹 찔러 넣었다.

“케엑!”

사람이 돼지의 멱을 따는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몸도 성하지 않은 환관 놈들이 나를 어찌하겠다는 것이냐!”

이의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이의방의 앞에서 검을 들고 있던 환관 하나가 겁에 질려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지금 이의방의 앞에 있는 환관은 총 열 명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의방의 강력한 힘에 겁을 집어먹었다.이렇게 되면 상황은 거의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결의를 할 때는 무척이나 강경했겠지.’난 뒷걸음질 치는 환관들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무서운 칼을 쥐여준다고 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이의방을 제거할 생각을 했을까?’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이건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성공할 수 없는 계획이다.

‘내가 태자였다면 상장군과 같이 이 일을 도모했을 거야!’환관 스무 명과 장졸 스무 명은 분명 차이가 있을 거다. 환관과 장졸의 신체 능력이 확연히 다르다.

이것이 중요하다.환관은 황족을 모시는 존재들이기에 그 행동이 느리고 섬세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환관이 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근력과 운동신경이 줄어든다. 그러니 그들에게 환도를 쥐여줘도 식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장졸들은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몸으로 살기를 발산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힘을 한곳에 모을 수 있는지도 알고 있다.환관과 장졸은 이렇게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이치로 덩치와 키가 같은 양민과 장졸이 싸우게 될 때 대부분 장졸이 이기는 것이다.이의방은 정중부가 연관이 되어있다는 조금의 낌새라도 있었다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정중부가 연관이 되어있다면 장졸이나 하급 군관을 환관의 복장을 입혀 매복시켰을 테니 말이다.

“네놈들이 지금 이 자리를 피한다고 해도 나는 끝까지 네놈들의 목을 벨 것이다.”

이의방은 버럭 소리를 질렀고 난 인상을 찡그렸다.도망을 치려는 놈들에게 싸울 의지를 심어주는 이의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생각처럼 뒷걸음질을 치던 환관들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죽어라!”

“이판사판이다!”

“우리가 여기서 도망친다고 해도 차후에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다!”

“수많은 환관들의 복수를 하자!”

“그래! 죽이자!”

환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검을 고쳐 잡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막상 덤벼드는 자는 없었다. 그저 스스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저렇게 겁먹은 개처럼 짖고 있는 것 같았다.‘그래, 겁을 잔뜩 집어먹은 똥개에 불과해!’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와라, 이놈들! 사내구실도 못 하는 것들이 어디 감히 나를 제거하겠다는 것이냐!”

이의방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정작 덤비라고 말한 이의방이 환관들에게 달려들었다.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의방은 마치 들개들의 무리 속으로 뛰어드는 한 마리 범 같았다.

이제 사나운 발톱으로 들개들의 몸을 할퀴고 날카로운 이빨로 개들의 목을 뜯어 발길 것이다.그럼 이 순간 나는 뭔가?나는 그저 이의방의 뒤에 숨어있는 여우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훗날 이의방처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쉬웅!바람을 가르는 이의방의 검이 환관 놈 하나의 목을 무참히 베었고, 이의방이 입은 무신의 관복에는 그 피가 뿌려졌다.솨아아!

“으악!”

“뭐 하는 거야! 어서 역적 이의방을 죽이자!”

환관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소리만 지르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들은 이렇게 소리만 질러대고 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제일 겁먹은 것처럼 보이는 환관이 검을 휘두르면서 소리를 지르고 이의방에게 달려들었다.

“역적을 죽여라! 역적을 죽여 황상의 성총에 보답하자!”

끝내 환관들은 검을 들고 이의방과 내게 달려들었다. 정말 내가 보기에는 죽기 살기로 덤비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이 죽기 살기로 덤빈다고 해도 범 같은 이의방을 상대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니, 그들이 장검을 들고 한 번에 동귀어진을 하겠다는 각오로 덤벼들었다면 이의방을 죽였을지도 모른다.그런 면에서 이들은 각오에서부터 이의방에게 밀렸던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사지로 뛰어든 이의방과 훗날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이의방을 해하려는 자들 사이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저들은 절대 이의방을 못 죽여!’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젠장!’나는 속으로 욕을 하면서 검을 고쳐 잡았다. 내 몸은 이미 피로 칠갑을 한 상태였다.

물론 내가 죽인 환관의 수는 몇 되지 않는다. 그저 이의방을 거드는 정도였으니. 하지만 이번 일은 훗날 장졸들 사이에 영웅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주 잘 포장되어 나를 더욱 곤욕에 빠트릴 것이다.‘자꾸 이렇게 늪처럼 이의방에게 빠져들면 안 되는데.’난 그런 생각을 하며 이의방을 봤다.

이의방은 계속 환관들을 참살하고 있었다. 이제 서있는 자가 세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박희! 네놈이군! 황상의 성총을 흐린 것도 모자라서 네놈이 나를 제거하려고 일을 꾸몄구나!”

이의방이 환관 하나를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박희! 그는 태자궁 내관이었다.

“그래! 나다. 무부의 발호에 충성스러운 내관들이 네놈들을 척살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것이다!”

난 순간 어이가 없었다. 누가 봐도 지금 도륙을 당하고 있는 것은 환관들이었다. 역시 무슨 짓이든 세 치 혀로만 하려는 게 환관인 것 같다.

“네 이놈! 감히 역모를 도모하느냐!”

박희라고 불린 환관이 이의방을 소리쳤다.

“어리석은 놈!”

이의방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박희에게 검을 휘둘렀다.쉬웅!검이 바람을 가른다는 소리가 진짜로 맞는 것 같다.

난 빠르게 휘둘러지는 이의방의 검에 박희의 목이 단번에 잘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사, 사람의 목이 저렇게도 베어지는구나.’내가 그런 생각을 할 동안 이의방은 떨어져있는 박희의 목을 들고 일어섰다.

‘으윽!’난 순간 놀라 뒤로 넘어졌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의 잘린 머리를 아무렇지 않게 들 수 있는지, 현대인의 생활양식에 익숙한 나였기에 그저 놀랍기만 했다.

‘정말 살벌하네. 아마 저걸로 태자를 협박하겠지.’난 그런 생각이 들었다.이렇게 나는 이의방의 놀라운 무력 덕분에 스스로 자초한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

“가자! 이제 나를 보겠다는 태자를 만나 봐야겠다.”

이의방은 나를 보며 말했다.

“예, 행수 어른!”

내가 짧게 대답하자 이의방이 나를 봤다.

“왜, 내가 두려운 것이냐?”

내가 떨고 있다는 것을 역시 이의방은 단번에 알아챘다.

“아, 아닙니다. 그냥 행수 어른의 무위가 놀라워서 그럽니다.”

“너는 나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나는 내게 검을 들지 않는 자에게는 절대 검을 들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경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절대 자신을 배신하지 말라는 말로 들렸으니.

“예, 행수 어른!”

“가자! 태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이의방은 그렇게 말하고 태자가 있는 방 앞에 섰다.

“견룡행수 이의방, 태자 저하의 명을 받고 왔나이다.”

마치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이의방은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무례하게도 스스로 벌컥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고 태자와 이의방의 눈이 마주쳤다. 난 이 순간 태자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태자마마!”

이의방이 태자를 노려봤다.

“무, 무슨 일인가?”

태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를 해치기 위해 나간 박희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옵니까?”

“무, 무슨 소리인가?”

“그렇다면 여기 박희가 있사옵니다.”

이의방은 무례하게 태자의 앞에 박희의 목을 던졌다.

“으악!”

태자는 박희의 목이 자신에게 던져지자 바로 비명을 질렀다.박희의 머리가 태자의 발 앞으로 굴러가서 멈췄고, 몸을 잃은 머리에선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를 해하여 무엇을 얻으려 하신 겁니까?”

“내, 내가 무엇을 얻으려 한단 말인가?”

“그럼 어찌 태자마마께서 저를 부르신 이 상황에 저들이 저를 해치려고 한 것이옵니까?”

이의방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노기가 가득했다. 당장이라도 태자의 목도 박희처럼 자를 기세였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나는 몰라!”

태자는 잔뜩 겁을 먹었다.

“혹시 공예태후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옵니까?”

난 뒤에 있다가 앞으로 나서며 태자에게 물었다.

“무, 무슨 말인가?”

“공예태후께서 익양후를 거론하신 것 때문에 이런 일을 도모하신 것이옵니까?”

“그런 적 없다.”

“그렇습니까? 그런 적이 있든 없든 태자마마 때문에 황상 폐하께서는 폐위를 당하실 겁니다.”

내 말에 태자는 놀라며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 뭐라고 했느냐? 왜 나 때문에 아바마마께서 폐위를 당하신다는 것이냐?”

“이 썩어가는 고려를 다시 세울 충신과 같이 가시지 못하시겠다면 조용히 폐서인으로 생을 마감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태자는 부릅뜬 눈으로 내게 물었다.

“너, 너는 누구냐?”

“저 아이는 저의 조카인 이회생이오.”

이 순간 처라는 말이 빠졌다. 다시 말해 이의방이 나를 더욱 신임한다는 뜻이다. 이러다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나를 아들이라고 부를 것 같았다.

“회, 회생?”

“그렇소, 태자마마! 황상께서는 환궁을 하셔서 무신들과 바른 정치를 하셔야 하는데, 그 모든 것을 태자께서 망치신 겁니다.”

난 태자를 보며 질책하듯 소리쳤다.

“나, 나는 모르는 일이다.”

태자는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이의방과 단둘이 황제를 폐위시킬 명분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곳으로 왔다. 어쩌면 태자가 나와 이의방을 도와준 꼴이 된 것이다.

‘상장군 정중부의 계략을 보기 좋게 깰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이번 일을 통해 상장군 정중부는 더욱 힘을 잃게 될 것이고, 이의방은 명분을 얻고 힘을 얻게 될 것이 분명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습니다!”

난 태자에게 다시 소리쳤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나와 폐하를 위해 충신들이, 아니 환관들이 꾸민 일이다. 나와는 상관이 없다.”

태자의 비겁한 말에 난 비웃음을 흘렸다.

“저희 역시 상관이 없습니다.”

“뭐, 뭐라?”

“저희는 목숨을 걸고 명분을 얻었으니 된 것입니다.”

“뭐, 뭐라 했느냐?”

“이 고려의 사직과 황실은 태자 전하가 망친 것이라 하였습니다.”

“내, 내가…….”

내 말에 태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고 이의방이 그런 태자를 봤다.

“이제 태자께서는 폐서인이 되실 것입니다. 또한, 이 전각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나오거나 사람을 밖으로 보내는 일이 생긴다면 저희들의 칼이 태자마마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이의방은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태자를 위협했다.

“뭐, 뭐라고?”

태자는 이의방을 보며 되물었지만 이미 그의 눈동자는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

“가자!”

이의방은 나를 보며 짧게 말하고 돌아섰다.

“예, 행수 어른!”

그렇게 나와 이의방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이제 황제를 폐위시킬 명분을 얻었다. 물론 그건 우리가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일 것이다. 하지만 이만큼의 명분만 있으면 충분하다.

‘의종이 환궁하면 바로 폐주가 되겠군.’이것으로 난 정중부의 계략을 깨버렸고, 고려의 정국을 더욱 이의방에게 유리하게 만들어냈다.‘이제 고려의 팔 할은 이의방의 세상이 될 것이다.

’난 이의방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간웅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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