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웅-42화 (42/620)

< -- 간웅 2권 -- >

“맞소, 충신은 위급할 때 나타난다고 했소. 우리가 이 고려의 충신이라는 것을 보여줍시다.”

“그렇습니다, 최 공!”

“맞소! 이제 우리가 나설 때요.”

분위기가 차츰 고무되기 시작하더니 환관들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기는 어디서 구한단 말입니까?”

“그건 이미 확보해 놨소. 그러니 걱정을 마시오. 태자마마는 절대 여러분의 충정을 잊지 않으실 것이오. 또한 차후에 지존이 되셨을 때…….”

환관은 그렇게 말하며 말꼬리를 슬며시 흐렸다. 결국 이들은 충심에 의해 이의방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일을 도모하고 있는 거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일을 도모하는 것을 회생도 알고 있다는 거였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의 한계일 것이다.

아첨으로 힘을 키웠던 자들이니 그 이상의 것은 바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전 내관인 이 공은 왜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환관이 주변을 살피며 다른 환관에게 물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 자야 있으나 없으나 우리에겐 별 소용이 없소.”

지금까지 이 대화를 주도했던 박 공이라고 불린 환관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젊은 환관들에게 신임이 두터운 자입니다.”

“그 새벽에 죽임을 당했겠지.”

박 공이라고 불리는 환관과 이 공은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혼자 깨끗한 척하는 것들은 그 꼴을 보기 싫소.”

“하지만 이숭겸이 그렇게 잘난 척을 하긴 해도 지금은 그의 학식이 꼭 필요한 순간입니다.”

“죽은 자의 학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박 공이라 불리는 자는 이 공이라 불리는 이숭겸이 죽었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숭겸은 지금 백화와 함께 김돈중의 사택이었다가 이회생의 집이 된 곳을 죽어라 치우고 있었다.

“참! 난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이고는 갑주를 입고 그 위에 무신의 관복을 덧입고 있는 이의방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봤다. 원래 이의방은 무척이나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타고난 무장의 골격인데 갑주를 입고 무신의 관복까지 입으니 매우 비대해 보였다. 하지만 돼지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마치 비대한 소 같아 보였다.난 이의방이 쓴 복두를 봤다.

왕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남자는 일률적으로 복두를 썼다. 복두는 중국의 관복이 들어올 때 중국 당나라에서 함께 들어온 것이다.

복두는 계급에 따라 재료와 형태에 차이가 있다. 지금 이의방이 쓰고 있는 것은 무신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의복마저도 문신과 무신을 구분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구분을 하기 위함으로 만들어졌겠지만 무신정변이 일어날 시기에는 대표적인 차별의 예가 되었다.

지금 그것을 내 말에 따라 이의방이 정갈히 입고 있는 것이다.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본다면 충직한 신하가 태자를 만나러 가기 위해 예를 다하여 관복을 정갈히 입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음모를 꾸며놓고 이의방을 부르는 것이니 이의방이 저렇게 정성을 다해 관복을 입는 것은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뭘 말하는 건가?”

“태자가 자네를 제거하려는 것을 알아냈으면 그냥 가서 쓸어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황상도 보현원에 감금한 우리지 않나. 자네 다음은 우리일 걸세. 그러니 괜히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말고 시원하게 처리하는 게 어떻겠는가?”

“황상께서는 돌아오시면 뭐라고 말할 건가? 태자가 나를 제거하려고 해서 내가 먼저 제거했다고 말하면 되는 건가?”

이의방의 말에 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힘을 다 잃은 황상이 온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어.”

이고는 자신 있게 말했다. 뭐 이고의 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아무리 멍청해도 황제인 것이다.

“그렇지, 황상은 무서울 것이 없지. 하지만 나는 황상을 등에 업고 우리를 견제하려는 자들이 무섭네. 태자를 죽인다면 그 자체가 역모인 거야. 우리의 거사를 역모로 만들고 싶지는 않네.”

“그런 것들이 있으면 다 내가 쓸어 버리겠네.”

“힘으로만 할 일이 아니야.”

“그럼 무엇으로 일을 해야 하는 건데?”

이고의 생각은 단순했다.

“명분이지.”

이의방은 내가 그에게 한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아는 것 같았다.비교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고와 채원은 이의방과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인물들이었다.

이고와 채원이 행동파라면, 이의방은 부하의 말을 무척이나 귀담아듣는 위인이었다. 그 하나만으로도 수장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이의방은 무력이 강한 유비 같아 보였다. 내가 그의 신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랫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인물인 것이다.

“거사는 칼로 할 수 있지만 그 거사를 이어가고 개혁하는 일은 칼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네.”

“하지만 그곳에 얼마나 많은 흉수들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간단 말이야!”

“살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도 있네.”

난 이고와 이의방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역시 비교가 되는 인물이다.

이고는 잘 다루기만 하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을 듯했다.하지만 이의방은 지금 내 말을 완전히 따라주고 있긴 하지만, 생각이라는 것이 있으니 훗날 내 의견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훗날 나와 이의방이 척을 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가까운 동지가 가장 무서운 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나는 어떻게든 이의방과 척을 지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차곡차곡 쌓아갈 생각이다.

정말 잘만 한다면 이 세상 편하게, 구름처럼 바람처럼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지금 그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원래 전쟁이나 위기가 닥쳤을 때 돈을 벌고 세력을 넓히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위험한 일이 닥쳐도 사는 놈은 다 살고 돈 버는 놈은 다 버는 것이다.현대에서도 그랬다.

IMF 때 돈 없는 서민들은 직장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아 울부짖었지만, 돈 있는 것들은 그때 돈을 더 벌었다.그런 면에서 보면 세상은 강한 자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지금 딱 그 상황이 내게 온 것이다.

나는 이의방을 등에 업고 강해질 수 있다. 뭐,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욕할 수 있다. 하지만 점잔을 빼고 관망하면서 굶어 죽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는 게 더 낫다.

이런 생각에 대해 욕을 하는 자들도 있겠지만 굶어보지 않고, 또 굶어 죽어보지도 않으면 내 간절한 마음을 모를 것이다.‘철새 같은 줄타기 처세를 하려고 해도 남들이 보기에 절대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이 있어야 하지.’난 그런 생각을 하며 감옥에 갇혀있는 수검대를 떠올렸다.

물론 겨우 몇 명의 계집 무사로 이 고려를 평정해 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여자는 그냥 여자일 뿐이다.

아무리 강한 훈련을 받는다고 해도 그저 그런 연약한 계집인 것이다. 하지만 내 성장과 세력의 확장에 충분한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사람을 모으고, 재물을 모으고, 사병을 모으겠지만 항상 숨기고 또 숨겨서 호의호식하면서 살 것이다.

’난 그런 생각을 하며 이의방을 봤다. 이제 이들의 대화를 내가 마무리 지을 차례다.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칼로 시작한 거사를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서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고놈 참, 말 어렵게 하네. 꼭 문신의 애새끼 같아 보인단 말이야!”

이고는 나를 보며 말했다.그건 물론 내가 아는 체를 많이 했기 때문에 한 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무신보다는 문신이 체질에 더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지금 나를 비꼬고 있는 이고가 밉지 않다는 거다.

사실 이고는 천하에 둘도 없는 불한당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난 그런 이고가 싫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보고 있는 이고는 그렇게 불한당 같지도 않았다.김돈중의 사택만 봐도 그렇다.

죽일 자만 죽이고 살릴 자는 살리는 이고였다. 그리고 그는 김돈중의 창고도 탐하지 않았다.나는 다시 한 번 이고를 봤다.

“그렇게 보였습니까?”

“그래, 넌 재수가 없어.”

이고는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앉았다.

“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명분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의방 행수와 이고 행수께서 힘을 쓰고 계신 것은 명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명분이 있는데 또 명분을 만든다는 것이냐?”

“지금 가지고 계신 명분은 거사의 명분입니다. 반면 그 명분이 없는 정중부는 상장군의 지위여도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겁니다. 이제 거사는 끝이 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고려를 경영하실 명분을 만드셔야 합니다.”

“고, 고려를 경영할 명분?”

이고는 내 말에 놀라 나를 빤히 봤다.

“그렇습니다. 지금 그 명분을 만들 첫 발걸음을 옮기는 겁니다.”

난 확신에 찬 눈빛으로 이고를 보며 말했다.

“그래, 너의 생각이 옳다.”

이의방이 나를 보며 내 말에 동조를 했다.

“감사합니다, 행수 어른!”

“그래, 맞아. 칼은 오래가지 못해. 칼은 그냥 칼일 뿐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명분이다. 나도 너의 생각처럼 지금 명분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본다.”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중부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냐는 겁니다.”

“그래, 채원 산원이 갔으니 곧 알게 될 거다.”

“참나, 난 자네하고 회생이 하는 일을 알다가도 모르겠네. 명분을 왜 그렇게 따지는지 모르겠어. 힘이 곧 명분이고, 이기는 자의 마음이 곧 대의이고, 승리자가 기록하는 것이 역사야! 명분보다는 힘이라고.”

이고는 그렇게 말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이고를 뚫어지게 봤다.

‘뭐야? 저런 면이 있었어?’이고를 다시 보게 됐다. 그냥 화끈한 성격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저런 면이 있다는 걸 알고 놀랍기만 했다.

어쩌면 이고가 하는 말이 진리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고의 마지막 말은 진리이며 원칙일 것이다.승리자의 기록이 역사가 된다.

이고를 다시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역시 이의방과 대립을 했다는 이고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군.’난 이고를 너무 쉽게 본 것에 대해 반성했다.

“체! 난 조급증이 나서 못 살겠네. 지금 거사를 마무리하고 논공행상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뭐? 명분을 찾기 위해 사지로 간다? 참 이해가 안 돼!”

이고는 마치 의도한 것처럼 자기 욕심을 이의방에게 보였다. 나는 그저 놀랍기만 했다.

‘저게 의도된 행동이라면 이의방보다 더 무서운 자가 이고다.’그리고 역사를 더듬어 나가며 이고가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승리자의 기록이 역사다. 그런 면에서 이고는 패배자고 이의방이 승리자인 것이야. 이기는 자가 역사를 쓰는 거다.

’이의방은 이고의 투덜거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무심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

“자네는 내가 하자는 대로 하면 되네.”

“알았어, 도통 난 모르겠어.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하는지. 참나, 그 많은 흉수를 어떻게 상대하려고 그러는지.”

“흉수라고 할 것도 없을 겁니다.”

“뭐라?”

내 말에 이고가 나를 봤다.

“흉수라고 할 것도 없다니 그건 무슨 말이냐?”

“상장군 정중부가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칼을 든 자는 겨우 이십여 명 남짓일 겁니다.”

“이십여 명? 그 수가 작다고 보는 것이냐?”

“누가 칼을 들었냐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을 듣고 이고는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다시 봤다.

“누가 칼을 들었느냐가 중요하다?”

“그렇습니다.”

“맞네, 태자께서 나를 제거하기 위해 모은 것들은 겨우 환관들이겠지. 그것들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환관을 무시하는군. 그것들은 밤에 힘을 쓸 데가 없어서 우리보다 힘이 더 좋을 수도 있어.”

“지금 사지로 가는 내게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건가? 하하하!”

이 위급한 순간에도 이의방은 호탕하게 웃었다.

“참나! 나는 이제 모르겠네. 사지로 가는 것은 자네니 나는 모르겠어. 그럴 게 아니라 내가 따라가는 게 어떻겠는가?”

“그렇게 되면 명분을 얻을 기회를 놓치는 겁니다.”

“그놈, 참! 명분이 없어 죽은 놈처럼 계속 명분, 명분 하는구나.”

“그렇습니다. 지금 두 행수께는 누구보다도 명분이 필요합니다.”

“오냐! 알았다. 그래, 곧 죽어도 명분이다. 됐냐? 이제 나는 정말 모르겠네.”

그 때 상장군 정중부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나갔던 채원이 돌아왔다.

“왔는가?”

제일 먼저 이고가 채원을 반겼다.

“어떻게 되었나? 그 늙은 여우도 이번 일에 연관이 되어있나?”

“그건 아닌 것 같네.”

“정말인가?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이고는 조금 전보다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다행이지. 내가 상장군의 휘하에 있는 자와 친분이 있어서 미리 동태를 살피고 있었는데 병력의 움직임이 전혀 없다고 하더군.”

“그래? 요즘 상장군이 늙어서 그런지 행동이 둔해지기는 했어.”

이고의 말에 이의방은 입꼬리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안도의 미소일 것이다.

“맞네, 지금 상장군의 휘하에 있는 장졸들은 모두 보현원에 있는 황상을 황궁으로 모셔오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네.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준비를 하는지, 참!”

채원 역시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정중부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황상의 마음을 자기 쪽으로 돌리고 나서 커가는 이의방과 이고를 제거하기 위해 준비를 해야 할 테니 아주 중요한 일일 것이다.

“결국 그것도 없는 것들이 이 일을 도모했다는 거군.”

이의방은 태자궁 쪽을 노려봤다.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긴장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난 그렇게 말하며 옥으로 가서 수검대를 데리고 나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려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그러니 여기쯤에서 빠지는 것이 최선이다.

“회생! 너도 같이 가자.”

순간 이의방의 말을 듣고 나는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지금 이 순간 이의방이 나를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래서 사람은 자기만 생각한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난 명분을 얻기 위해 거사의 핵심인 이의방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을 스스럼없이 말했다. 그런데 자기랑 같이 가자니, 이 순간 이의방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예?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너와 같이 갈 것이다. 너도 너의 다리로 나를 따라라! 우리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에게도 이 세상을 경영할 명분을 주마! 그리고 나와 같이 앞으로 나가자. 우리에게는 굳센 의지와 명분이 있다.”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싶어 나는 다시 이의방을 봤다.

“제가 가서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나만 사지로 몰아넣고 너는 그렇게 너의 뱃속만 채우려는 것이냐?”

“하, 하오나…….”

“싫은 것이냐?”

“싫은 것이 아니라…….”

“네가 생각해 둔 계집은 나와 함께 태자궁에 다녀와서 품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 죽을 팔자라면 너는 벌써 벼락을 맞고 죽었을 것이다.”

이의방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봤다.

“그, 그건 그렇지만…….”

난 어떻게든 이의방과 같이 태자궁으로 가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의방은 어떻게든 나를 데리고 갈 생각인 것 같았다.

“네가 있어야 태자와의 담판에서 유리하게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태자에게 가는 길이 무척이나 험난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나가 없는 것들이 너는 무서운 것이냐?”

난 이의방의 물음에 당연히 무섭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래, 너도 가자. 네가 검 한 자루 정도 차고 가는 것을 뭐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역시 살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쩔 수 없는 일이 나에게도 온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백화를 데리고 오는 건데…….’나는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가자! 난 준비가 다 되었다.”

이의방은 탁자를 탁 치고 일어났다. 이 순간이 지난 새벽보다 내게는 더 위험할 것이다.

물론 이의방에게도 마찬가지다.그가 내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다음 정국을 이끌어가기 위한 명분을 찾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난 이 순간이 정말 싫다. 난 다음 정국을 이끌어갈 마음도 없고, 또 이의방과 같이 공신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최소한의 준비를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만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젠장! 정말 일이 꼬이네.’난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의방을 따라가야 한다.

나는 한 자루의 검을 들고 마치 이의방의 충복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정말 이러다가는 이의방과 절대 떨어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이의방이 장기 집권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항마라고 할 수 있는 이고와 채원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해야 한다. 생각이 거기까지 뻗어나가고 있었다.

‘채원은 너무 탐욕스러워! 그에 반해서 이고는…….’사실 역사는 이고를 흉악무도한 자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이고는 그저 성정이 급할 뿐 진정한 무인이었다.그가 힘을 가진 후에 그의 옆에 간악한 자들이 많이 붙어서 그런 평가를 받게 되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자! 오늘이 지나면 내게 태자와 황제를 압박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이의방은 태자궁을 노려봤다.어찌 보면 범처럼 무서운 자가 이의방일 거다. 저렇게 홀로 수십 명의 흉수들이 있는 곳으로 당당히 걸어가는 저 배포를 보니 그는 정말 대단한 자다.‘저러니 무신정변의 주요 인물이 된 거지.’난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