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웅-41화 (41/620)

< -- 간웅 2권 -- >

“하급 군관들과 회동을 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충성 맹세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비밀리에 하는 것이 아니라 정중부가 보는 앞에서 하는 겁니다.”

“세를 보여주라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황상도 보현원에 감금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대장군 몇은 그냥 단칼에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암중에 경고해야 합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은지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태후마마와 담판을 지으신 것들을 빠른 시일 내에 실행에 옮기셔야 할 것입니다.”

“공예태후와 했던 담판…….”

이의방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거사를 했다고 해도 스스로 황제를 폐위시키고 싶지는 않다는 표정이었다.

“폐위가 아니라 신황제를 옹립하시는 겁니다.”

“으음.”

“늦으면 정중부에게 다시 주도권을 빼앗기실 겁니다.”

“알았다.”

그 때 발소리가 들렸다. 사뿐히 걷는 소리로 보아 환관이나 여자인 듯했다.

“행수 어른!”

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가 이의방을 불렀다.

“무엇이냐?”

“태자전에 있는 상궁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상궁이?”

이의방은 병사의 말에 영문을 몰라 제일 먼저 나를 봤고, 이고와 채원도 나를 봤다.

“예.”

병사의 말에 다시 이의방이 나를 봤다.

“무슨 일로 태자궁에서 나를 보자고 한 것일까?”

“만나보면 알 것입니다.”

난 속으로 짚이는 것이 있었지만 그냥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렇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겠지.”

이의방은 그렇게 말하고 문 쪽을 봤다.

“태자궁 상궁에게 들어오라고 해라.”

이의방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난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태자면 정중부와 손을 잡았을 것인데…….’그것은 무비가 내게 했던 ‘황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다.

’라는 말 때문이다.‘혼자 꾸미는 일일까? 아니면 정중부와 같이하는 일일까?’난 그것을 판단해야 한다.

‘벽에도 귀가 있는 거야! 그러니 태후전에서 나눈 이야기가 태자에게도 들어간 것이야!’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 봤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끝내 명분을 쌓고 담판을 지을 기회를 하늘이 주는군.’난 이의방을 만나기 위해 들어오는 상궁을 봤다.

‘오, 예쁜데! 죽이기에는 아깝군…….’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왜 자꾸 이렇게 예쁜 것들만 보이는지 모르겠다.이의방은 태자궁에서 온 상궁을 봤다.

“무슨 일인가?”

“태자마마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우리를?”

이고가 상궁과 이의방의 대화에 나섰다.

“태자마마께서는 우선 이의방 행수를 만나고자 하십니다.”

젊은 상궁의 말에 난 피식 웃었다. 역시 태자도 이고와 채원을 움직이는 것은 이의방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의방만 어떻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너무 허술한데…….’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태자마마께서 나를 홀로 보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긴히 하명하실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젊은 상궁은 붉은 입술로 한 치의 떨림도 없이 잘도 이의방 앞에서 재잘거렸다.‘저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뭔가를 알고 있다면 저렇게 담담히 말을 전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네, 내 바로 가겠네.”

이의방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냥 보내서는 안 된다. 물론 나중에라도 이의방은 가야 할 테지만 지금 당장 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수 어른!”

난 이의방을 불렀다.

“왜 그러는 것이냐?”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긴히?”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이의방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나를 보며 되물었다.

“예,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태자마마께서 나를 부르셨다.”

“제가 드릴 말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난 고집을 부리며 힐끗 상궁의 표정을 살폈다.‘역시 표정의 변화가 없어. 모르는 것이야.’난 그렇게 추측했다.

“지금 내 처조카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이야기만 끝내고 바로 가겠네.”

이의방의 말에 태자궁 상궁은 도끼눈으로 이의방을 노려봤다.

“태자마마께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알고 있네, 그러니 곧 가겠네.”

“정말 불충이 하늘을 찌르십니다.”

난 상궁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그저 놀랍기만 했다. 전군을 통솔하는 상장군 정중부도 이의방의 눈치를 보는 형국이다. 그런데 태자궁의 일개 상궁이 지금 이의방을 꾸짖고 있는 거였다.

“맞는 말이네. 하지만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후에 찾아뵙는다고 전해주시게.”

정말 황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예, 꼭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상궁은 그렇게 말하고 획 몸을 돌려 나갔고, 난 그 상궁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얼굴은 예쁜데 싸가지가 저렇게 없으니 오래 살기는 틀렸군! 역시 미인박명이라는 소리가 맞아. 하지만 예뻐서 빨리 죽는 게 아니라 싸가지가 없어서 빨리 죽임을 당하는 거야.’하여튼 상궁이 예쁘기는 예뻤다.

백화에게 투박한 야성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저 상궁에게는 잘 가꿔진 난초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요즘 눈에 자꾸 여자만 보이네.’난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상궁이 문을 닫고 나간 뒤, 나는 곧바로 이의방과 이고, 그리고 채원을 봤다.

“지금 당장 상장군의 휘하에 있는 중랑장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어디로 이동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뭐라고?”

이고는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그것은 또 무슨 말이냐?”

“왜 이 순간 태자께서 이의방 행수님을 불렀겠습니까? 적적하니 술이라도 한잔하자고 불렀겠습니까?”

“그럼 무엇이냐?”

“제 생각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너의 생각이라고 하면…….”

“행수 어른을 제거하려는 음모입니다.”

내 말에 순간 이의방의 눈썹이 하늘로 치켰다.

“그런데 태자가 의방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인데 왜 상장군의 병력 움직임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냐?”

채원이 영문을 몰라 하며 내게 질문을 던졌다.

“아주 중요합니다. 이 일을 상장군 정중부와 같이 도모했느냐, 그게 아니면 태자 혼자 했느냐에 따라서 대응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내 말에 이의방은 인상을 찡그렸다. 사실 이의방은 거사만 성공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거사 후가 더 혹독한 살얼음판이니 미칠 노릇이었다.

“상장군과 같이 도모했다면?”

이의방이 나를 뚫어지게 보며 물었다.

“모든 대장군들을 제거하고 상장군까지 제거할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내 말에 이의방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그 말은?”

“지방군들을 모두 적으로 돌린다는 겁니다.”

“으음.”

이의방은 다시 신음을 했다.지금 이 순간 대장군과 상장군을 제거하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을 성공한다고 해도 지방군의 반감을 사게 될 것이고, 그것이 훗날 화로 돌아올 거라는 점을 이의방은 아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복잡한 거야?”

채원은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이의방은 이번 일의 심각성을 절실히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럼 태자마마 혼자서 일을 도모한 것이라면?”

“혼자 태자궁에 가셔야 할 것입니다.”

“혼자?”

이의방은 놀랐다.

“그렇습니다. 충성스러운 신하가 태자를 찾아가는데 당연히 혼자 가셔야 할 겁니다.”

“태자궁에는 나를 죽이고자 하는 것들이 매복하고 있을 터인데?”

“왜, 두려우십니까?”

내 말에 이의방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 두렵다.”

이의방은 그렇게 말했고 나는 이 순간 이의방을 다시 보게 되었다.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영리하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며, 닥칠 위기를 대비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천둥벌거숭이처럼 두려운 것이 없는 사람들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인 거다.

“그래도 혼자 가셔야 합니다.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고 가셔야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는다?”

“그러하옵니다. 관복 안에 두꺼운 갑주를 입고 가시면 됩니다.”

내 말에 이의방은 나를 빤히 봤다.

“결국 네가 나를 사지로 몰아넣는구나.”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살아 돌아오시면 고려는 행수 어르신의 발밑에 엎드리게 될 것입니다.”

“회생! 너는 사람을 격동하게 만드는 재간이 있다.”

“죄송합니다.”

“알았다! 너의 생각대로 할 것이다. 지금까지 너의 생각이 옳았으니 그리할 것이다.”

이의방은 다짐하듯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지금 위험을 알고도 나가시지만, 후일 모든 것은 행수님의 뜻대로 되실 것이옵니다.”

“하지만 아주 아름답고 포부만 컸던 최후가 될 수도 있겠지.”

난 이의방의 말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만약 그가 내 의견대로 태자궁에 갔다가 죽임을 당한다면 나 역시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울 게 분명했다.지금 이 순간 이의방만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딸린 나도 마찬가지 신세인 것이다.

“송구하옵니다, 행수 어른!”

그 때 가만히 있던 채원이 혀를 차며 나와 이의방을 봤다.

“참, 일을 왜 그렇게 어렵게 푸는 건지. 거사 때처럼 쓸어버리면 되는 거잖아?”

역시 단순한 채원이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정중부에게 우리를 제거할 빌미만 주는 겁니다.”

내가 따지듯 채원에게 말하자 채원은 나를 노려봤다.

“어린놈이 귀엽다고 해주니까 보이는 게 없는 것이냐?”

“저는 살아야겠습니다. 그러니 저의 뜻에 따라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실 거면 왜 저를 부르셨습니까?”

난 입에 거품을 물고 채원에게 따져 물었다.

“참나, 기고만장한 꼴이라니.”

채원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를 가는가?”

“우리의 제갈량께서 상장군의 군사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라고 하시지 않나?”

“제갈량?”

“그래, 촉한의 제갈량!”

채원의 말에 이고와 이의방은 피식 웃었다.

“맞네! 우리의 제갈량인지도 모르지. 아주 욕심이 많은 제갈량이지.”

이의방은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정말 말에 뼈가 있는 것 같았고, 그 뼈는 내 목에 걸리는 것 같았다.

11장 가장 큰 힘이 되는 명분을 위하여!태자에게 이의방을 제거하겠다고 말한 환관이 다른 환관들을 모아놓고 은밀하게 앉아서 서로를 보고 있었다.이곳에 모인 환관들은 총 이십여 명. 원래 태자궁에 있던 환관들은 열 명이었고 무신들을 피해 온 자들이 또 열 명이었다.

“이 순간 우리가 일어서서 역적을 처단하지 않으면 훗날 우리의 목은 저잣거리의 놀림감이 될 것이오.”

태자와 이야기를 한 환관의 말에 모두 인상을 찡그렸다.

“박 공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오나 우리가 어찌…….”

“우리라고 못할 것은 없소.”

“허나 저들은 무인이오. 칼잡이란 말이오.”

“그건 몇 명을 상대할 때의 이야기요.”

박 공이라고 불린 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가 모두 덤벼든다면 어렵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이번 모반은 견룡행수 이의방과 이고, 그리고 순검군 산원인 채원이 젊은 하급 군관들을 동원해서 벌인 일이오. 그리고 어제 새벽 상장군이 태자마마를 뵙고 가셨소. 태자마마께서는 상장군에게 은밀히 밀명을 내려놓은 상태요.”

박 공이라고 불리는 환관은 다른 환관에게 거짓말을 했다.

“상장군에게 밀명이라고요?”

“그렇소, 태자마마께서 이의방을 스스로 제거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나머지 하급 군관들의 동요를 막으라는 밀명을 내리셨소.”

“그렇게 밀명을 내리실 거라면 바로 이의방의 목을 베라고 명하시는 것이 더 빠르지 않겠소?”

꼭 이렇게 따지고 드는 인간들이 있는 법이다.

“그렇소, 하지만 하급 군관들의 반발이 있을까 염려가 되는 거요. 지금 하급 군관들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이의방과 이고, 그리고 채원이오. 하지만 그들 중 정말로 하급 군관들을 장악하고 있는 자는 이의방이오. 그러니 이의방만 제거하면 노장군들이 다 알아서 할 거요.”

“상장군과 대장군들 역시 이의방의 눈치를 보고 있는 만큼 지금 이의방의 기세가 대단하다는 거 아닙니까?”

“맞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번 일이 저들의 뜻대로 끝나면 우리들이 설 곳은 없고, 우리는 저들이 겪었던 천대와 괄시보다 더 큰 천대와 괄시를 받아 불알 없는 고자라 놀림을 당하며 살 것이라는 것이오.”

박 공의 말에 환관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으음…….”

누구 하나 뭐라고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태자마마와 황상 폐하, 그리고 이 고려의 사직을 위하여 우리의 힘을 모을 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