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2권 -- >난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백화를 봤다.
“병사들을 데리고 이곳을 좀 치우고 있어.”
“예, 그리고 꼭 부탁드립니다.”
“알았어, 나도 이제 수검대가 필요해졌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집이나 잘 치워.”
난 그렇게 말하며 급하게 다시 입궁하기 위해 병사와 함께 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10장 이의방의 책사 노릇을 하다태자궁.그 새벽에도 태자궁은 무인들의 환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무리 꾹꾹 눌러놨던 울분을 터트리는 순간이었지만, 공예태후의 처소와 태자궁에는 병졸들이 차마 난입하지 못했다. 덕분에 태자궁의 환관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태자는 탁자에 앉아 초조한 얼굴로 환관을 보고 있다.
“그 말이 사실이더냐?”
태자는 다급하게 앞에 서있는 환관에게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태후전 상궁에게서 나온 말이니 확실할 것입니다.”
“으음, 할마마마께서 나를 버리신다는 것이냐?”
태자는 비통한 마음으로 환관을 보며 다시 물었다.
“그것까지는 모르겠나이다. 하지만 익양후의 사택에 병사들이 달려갔다고 합니다.”
익양후는 후일 의종이 폐위되고 새 황제가 되는 인물이다. 공예태후와 손을 잡은 이의방이 익양후를 보호하기 위해 견룡군 병사를 보낸 거였다. 그리고 그것을 태자가 알게 된 것이다.
“이제 앞으로 진행될 일은 불을 보듯 자명해지는구나! 그리 되고 있음이야!”
분개한 태자는 눈에 살기까지 감돌고 있었다.
“하오나 태후마마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셨을 겁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해도 황상 폐하와 이 손자를 버리시는 결단이었다.”
“그 결단을 돌려놓으면 됩니다.”
환관이 비장한 표정으로 태자를 봤다.
“그 결단을 돌려놓는다?”
“그러하옵니다. 상장군 정중부는 그 위급한 순간에도 태자마마를 위해 달려왔습니다. 그건 상장군이 태자마마에게 뜻이 있다는 겁니다.”
환관은 정중부가 온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었다.뭐, 어떻게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 치 혀로 태자의 총기를 어지럽히는 것들이기에 이렇게 생각이 짧은 것이다.
“나에게 뜻이 있다?”
“그러하옵니다. 그러니 상장군에게 힘을 실어주시면 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모든 것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너희들이 한다고?”
“그러하옵니다. 그러니 태자마마께서는 그 역적을 불러 주시기만 하면 되옵니다.”
그 순간 환관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그 불꽃은 태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환관 자신의 야망을 위한 불꽃처럼 보였다.
“무, 무엇을 할 생각이냐?”
“신이 반역의 무리를 반드시 주살하여 마마의 성려를 덜어드릴 것이옵니다.”
환관의 말에 태자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대가 무슨 수로 늑대 같은 무부들과 대적해서 주살한단 말인가?”
태자는 환관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믿으소서! 태자마마께서 불충하게 화를 당하시면 소신들도 마마를 따라 생을 마감할 것이옵니다. 그러니 태자마마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힘을 모아 목숨을 버릴 각오로 이의방을 주살할 것이옵니다.”
환관의 말에 태자는 놀라 눈이 커졌다.
“이, 이의방을 너희들이 어떻게 주살한단 말이냐? 그게 가능하다고 보느냐?”
“그러하옵니다. 이고와 채원은 이의방이 없으면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이의방만 제거하면 모든 것이 끝이 나옵니다. 그러고 나면 상장군이 군을 장악할 것입니다.”
“상장군이 군을 장악한다?”
“그렇사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이옵니다.”
이 순간 환관은 자신의 야심 때문에 태자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었다.
“가능하겠느냐?”
“반드시 가능하게 만들 것이옵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이번 일을 행하지 않으면 태후마마의 처소에서 나온 말처럼 태자 저하는 끝내 폐서인이 되실 것이옵니다.”
“폐, 폐서인?”
“황망하오나 그렇사옵니다.”
“폐서인이라고?”
“그렇사옵니다.”
환관은 그렇게 말한 후 바로 무릎을 꿇었다.
“신들이 반드시 그런 일은 없게 할 것이옵니다.”
“성공을 한다고 해도 문제다. 이의방을 따르는 하급 군관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반드시 성공할 것이고 성공을 한 뒤엔 말씀을 올린 것처럼 바로 상장군을 부르시면 되옵니다.”
“상장군을 불러라?”
“그러하옵니다. 그렇게 되면 상장군이 다 알아서 할 것이옵니다.”
“그럼 내가 상장군에게 무엇을 주면 될까?”
“문하시중이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문하시중?”
“최고의 자리입니다. 무신들에게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자리입니다.”
“그렇기는 하지.”
“그렇사옵니다.”
태자와 환관은 그들이 생각하고 싶은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래서 사람인 거다.
“그럼 차후에 태후마마는 어떻게 해야 하지?”
태자는 이 순간 마치 이의방을 죽이기라도 한 것처럼 한발 더 나가 태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냈다.
“그 역시 신들이 다 알아서 하겠나이다.”
환관의 말에 태자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알았다, 너희들은 정말 나의 총신들이다. 내 너희들의 공을 후일에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태자는 무릎을 꿇고 있는 환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분명 태자에게는 아주 위급한 순간이다. 하지만 잡은 것이 썩은 동아줄이었으니…….
“태, 태자마마! 황공하나이다.”
환관은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에 진실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직 태자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대만 믿을 것이오.”
“예, 태자마마!”
살육이 자행되었던 새벽은 지났지만 황궁의 암투는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다.난 서둘러 이의방이 있는 견룡군 행수방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아마 지금 이의방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초조해하고 있을 것이다. 이의방을 안심시켜 주고 나는 수검대를 가질 생각이다.
내가 견룡군 행수방 앞에 섰을 때 이의방과 이고, 채원은 심각하게 토의를 하고 있는 듯했다.저들은 하급 무인들로 괄시와 천대를 한 몸에 받던 위인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참지 못하고 무신정변이라는 난을 일으킨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한번 잡은 기회를 다시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은 굴뚝같을 것이다.‘살살 달래 줘야겠지.’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왔음을 알렸다.
“회생입니다, 행수님!”
“어서 들어오너라!”
이의방은 침착하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한껏 담겨있었다.
“예, 행수 어른!”
끼이익!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이의방을 비롯한 이고와 채원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가 준 집은 잘 보고 왔나?”
“그렇습니다, 행수 어른!”
“그래, 오는 길에 이야기는 들었겠지?”
“예, 들었습니다.”
“정말 둘 다 태평이군. 지금 황제가 환궁을 한다는데 그렇게 태평하게 이야기할 수 있나?”
성질 급한 이고가 이의방을 보며 쏘아붙였다.
“위급할수록 여유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내 말에 이고는 나를 째려봤다.
“어린놈이 재간이 좀 있다고 해서 이제 눈에 보이는 게 없느냐? 겨우 병졸이었던 주제에 의방이 위장의 자리를 주니, 왜, 황상이라도 된 것 같으냐?”
이고는 마치 나를 시험하듯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알고 있는 이고는 성질이 급하면서도 어떨 때에는 자신을 속내를 무척이나 잘 숨기는 위인이었다.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내게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시험을 해보고 싶은 거군.’
“위장이 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은 사실입니다. 또, 김돈중의 사택을 받고나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급한 순간에 저마저도 다급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여유를 가지려는 겁니다. 황상의 환궁은 아마 상장군 정중부가 이야기하셨을 겁니다.”
내 말을 듣고 이고는 살짝 놀라는 기색을 숨기기 위해 눈살을 찌푸렸다.
“네놈은 마치 점쟁이 같구나.”
이건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누구나 찾을 수 있는 답이다.정중부는 지난 새벽에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사실 정중부는 태자를 등에 업고 황궁을 장악하여 후일을 도모하려고 했다.만약 그것이 성공했다면 이의방과 이고, 채원은 반역 도당의 수괴로 몰려서 정중부가 이끄는 진압군에 죽임을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정중부가 무척이나 조심성이 많은 인물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무척이나 현실적인 사람이기도 했다.지금 이 순간 정중부는 이의방과 이고, 채원과 손을 잡는다고 해도 자신에게 떨어질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세 사람이 눈엣가시 같은 문신들과 환관들을 어느 정도 제거했으니, 태자와 작당을 해서 그들을 역도로 몰아 진압하여 후일 정국의 판세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짜려고 하는 것이다.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태자를 앞세우는 것과 황제의 옥새가 필요하다. 하지만 정중부는 그 새벽에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에 반해 내 의견을 받아들인 이의방은 비록 옥새를 얻지는 못했지만 공예태후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이의방과 같이 가기로 결단을 내린 공예태후는 용호군을 이끌 수 있는 권한을 그에게 주었고, 그 덕분에 황궁은 빠르게 이의방의 손안으로 들어온 거였다.
그러니 상장군 정중부는 판세를 뒤집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그러기 위해서는 보현원에 감금되어 있는 황상이 궁으로 들어와야 한다. 물론 그러려면 장군방 회의를 통해 황상을 자유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이의방은 그의 의견대로 행해지는 것을 손 놓고 볼 수밖에 없었으니 답답한 마음이 가득할 것이다. 주관이 없는 양탁을 비롯한 이소응 같은 노장군은 정중부에게 불만은 있지만 그를 어찌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냥 봐도 나오는 겁니다.”
내 말에 이고는 이의방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자네가 좋아할 만하군.”
“그래, 요상한 기운이 감돌면서 판세를 읽는 눈이 보통이 넘어.”
나는 이의방의 말을 듣고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모르겠지만 나에겐 대략적인 기억이 있다. 그것을 지금 이 상황에 접목시키는 것이니 쉬운 일일 수밖에.
“그래, 대충 이야기는 들었을 테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이의방이 내게 물었다.
“우선은 관망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우선은 관망?”
“그렇습니다. 당장은 정중부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 같지만 그건 정해진 수순을 밟기 위한 디딤돌에 불과합니다.”
“정해진 수순?”
“그렇습니다.”
“으음.”
이의방은 내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건 내가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알 것 같다는 신음이었다. 하지만 채원은 무슨 말인지 몰라 나를 봤다.
“답답하네, 답답해! 둘만 알지 말고 같이 좀 알자고.”
역시 송악산 불곰 채원은 조곤조곤 설명을 해줘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역시 송악산 불곰이라니까.’
“예, 정해진 수순이라는 것은 황상 폐하의 폐위입니다.”
내 말에 채원은 깜짝 놀라며 커진 눈으로 나를 봤다.
“뭐, 뭐라고 했나?”
“정중부도 황상을 잠시 이용한 후 폐위시킬 궁리를 할 것입니다.”
“그, 그래?”
영 모르겠다는 표정의 채원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이제 내가, 아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지?”
이의방이 나를 보며 물었다. 그는 차분히 내게 묻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준 집도 빼앗아버릴 것 같은 초조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우선 힘을 비축하셔야 할 겁니다.”
“힘을 비축하라고?”
“그렇습니다. 전군을 통솔할 수 있는 상장군 정중부와 기탁성 대장군, 그리고 이소응 대장군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어떻게 단시간 만에 힘을 키운단 말이야, 젠장! 뜬구름을 잡는 것은 점쟁이 무당이나 하는 거야!”
이고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렇습니다. 단시간 내에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방법이 뭐냐?”
이렇게 저들을 조바심을 내게 만들어놓고 내가 필요한 것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냐고 묻지 않아!”
이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역시 이고도 다급한 모양이다.
“그전에 청이 하나 있습니다.”
순간 이의방이 나를 노려봤다.
“이 급한 상황에 청?”
순간 이의방은 나를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나를 벨 기세였다. 하지만 나를 쉽게 베지는 못할 것이다.왜냐? 내가 없으면 절대 이들은 정중부를 상대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무엇이냐?”
이의방은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내게 물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역시 걸렸어.’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실 내가 이런 행동을 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첫 이유는 옥에 갇혀있는 수검대를 내가 데리고 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진짜 숨기며 얻어내려는 것은 이의방에게 내가 점점 속물로 인식되게 하여 그가 어느 순간부터 내 말을 무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성공한 거다. 이의방의 곁에서 바로 도망칠 수는 없다.
이렇게 하나씩 틈을 보이며 내가 없어도 되겠다는 판단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그리고 그가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내 말은 잔소리가 될 것이고, 내 잔소리가 듣고 싶지 않은 이의방은 끝내 나를 멀리하거나 외지로 보내게 될 것이다.
이번 행동은 머지않은 미래를 위한 사전 포석인 거다. 그리고 그 사전 포석은 조선 시대에서 말하는 귀양을 가기 위한 준비인 것이다.‘완전히 눈 밖에 나도 안 된다.
’줄타기를 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고래 등 같은 집을 얻었으니 이제는 삼 처가 필요한 것이냐?”
이의방의 말에 이고와 채원은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 주마.”
“제가 고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래라, 누구를 원하는 것이냐? 원한다면 내 딸이라도 주마.”
그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가 싫다.
“무비 옆에 있던 계집들이 미모가 빼어나다고 들었습니다.”
이고는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가져라!”
이의방은 마치 자신이 황제라도 된 것처럼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방법을 말해 봐라.”
“예, 행수 어른! 우선 용호군은 우리 편에 서있습니다.”
“그렇지, 태후마마의 언질을 받은 용호군 장군이 내게 협력하고 있지.”
“그게 아닙니다.”
“뭐라? 그건 또 무슨 말이냐?”
“공예태후께서 언질을 줘서 용호군 장군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용호군 장군의 부장이 행수 어른과 뜻이 같기에 용호군 장군을 설득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군은 장군 혼자 이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장군이 높다고 해도 부관의 칼에 속절없이 가는 것이 목숨입니다.”
“그 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