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웅-39화 (39/620)

< -- 간웅 2권 -- >난 최대한 대인배 같은 모습을 백화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정말 백화가 배은망덕한 년이라면 난 지금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으니.내 말을 듣고 백화가 순간 피식 웃고는 내 목에서 단검을 거뒀다.

그리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신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오면 좋을 텐데 왜 그 지랄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돌변한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뭔가 있나?’하지만 우선은 검을 거뒀다는 것이 중요하고 또 내게 은혜를 입었다고 말한 것이 중요했다.

“은혜를 갚고 싶나?”

나는 백화에게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겠다는 듯 말했다.

“은혜라면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화의 행동이 순식간에 고분고분해졌다.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원래 목숨을 빚진 은혜는 목숨으로 갚는 거 아닌가?”

내 말의 뜻을 몰라 백화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우선 일어나.”

내가 말을 하자 백화가 일어났다. 예쁜 것이 이제는 말도 잘 듣는다.

“은혜를 목숨으로 갚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보기에 너는 무인이다.”

내 말을 들은 백화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마 그녀는 지금 놀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려 초기까지만 해도 여장군과 여무사들이 꽤 존재했다. 하지만 이 고려 중기에는 여자가 검을 들고 있는 모습은 그저 웃긴 것에 불과했고, 또 무인으로 인정해 주지도 않았다.그런데 나는 지금 백화에게 무인이라고 했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돈 드는 것도 아닌데 말해 줘서 나쁠 건 없지.’난 그렇게 말하며 다시 백화를 봤다.

“이미 주인에게 버림을 받았고…….”

내 말에 백화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당장 이 위급한 순간에 갈 곳도 없고.”

“으음…….”

백화는 내 말을 들으면서 낮게 신음을 했다. 정말 지금 백화의 신세는 끈 떨어진 연(년!)이었다.

“부하들도 다 옥에 갇혀있고.”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내가 너의 주인이 되고 싶은데, 넌 어떻게 생각해?”

난 단도직입적으로 백화에게 물었다.

“주인이라고 하셨습니까? 저는 노예가 아닙니다.”

“말을 실수했군! 주군이라고 하지.”

난 그렇게 말하며 백화를 빤히 봤다.

“어때?”

“겨우 위의 직위를 가진 분이 주군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습니까?”

정확한 판단이다.

“겨우 견룡군 행수가 이 고려를 뒤집어놨어. 위가 어때서?”

난 백화를 뚫어지게 쳐다봤고, 그녀도 나를 봤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최소한 내가 위급하다고 해서 혼자 살기 위해 네 뒤에서 비수를 꽂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게.”

이건 무비를 떠올리라고 한 말이다.

“으음…….”

다시 한 번 신음이 이어졌다. 그리고 뭔가 결심을 한 듯 다시 나를 보다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이 순간 백화는 뭔가 큰 꿈을 꾸는 듯, 그게 아니면 망상에 빠진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백화는 다시 내게 무릎을 꿇었다.이렇게 해서 내게도 이 험한 세상을 같이 헤쳐 나아갈 첫 부하가 생겼다. 그리고 그 부하는 무척이나 예뻤다. 한마디로 그녀는 예뻤다.

“일어나!”

“예, 주군!”

백화는 바로 나를 주군이라고 불렀다. 그런 백화를 잠시 보다가 이숭겸의 품에 안겨있는 흥선을 봤다.

비밀 은신처에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흥선의 얼굴이 무척이나 귀티난다는 것을 깨달았다.‘역시 달라! 씨가 다른 거야!’난 흥선을 보며 씩 웃었다.

물론 당장 흥선이 내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일은 모르는 법이니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 약속을 지켰다.”

내 말에 이숭겸은 잠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응, 형! 고마워.”

이렇게 대충 정리가 끝났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렇게 노닥거릴 수는 없다.

“여기는 여전히 위험해. 그러니 우선 궁을 빠져나가는 게 좋겠다.”

“궁을 빠져나가?”

순간 흥선의 눈빛이 반짝였다.‘뭐지? 좋아 죽는 눈빛이잖아?’난 그렇게 흥선을 봤다. 그에 반해 흥선의 의조부인 척하는 대전 내관 이숭겸의 눈빛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내가 집을 마련해 뒀다. 그러니 이곳을 빠져나가자.”

“응, 형!”

흥선은 막둥이처럼 잘도 대답했다.하지만 이숭겸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흥선이 황족이라는 증거일 거다. 그게 아니라면 위험한 사지로 변해버린 이 황궁에서 빼내 준다는데 눈빛이 파르르 떨릴 이유가 없다.

“비밀스러운 곳도 알고 있으니 궁을 빠져나가는 비밀 통로도 알고 있겠죠?”

나는 이숭겸이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는 투로 그에게 물었다.그 순간 이숭겸이 흥선을 봤다.

“모르는 겁니까? 당신이 모른다면 전 두 명의 죄 없는 병사를 백화에게 죽이라고 명령을 해야 합니다.”

이들이 빠져나가는 것은 아주 비밀스러워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대전에 들어오는 문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견룡군 병사 둘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이숭겸은 흥선을 보면서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다행입니다, 앞장을 서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 때 흥선이 내 옆에 서서 팔짱을 끼었다.

“궁 밖 구경을 하는 거야?”

흥선의 말에 난 순간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어린애라고는 하지만 이 순간에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그게 아니면 이 황궁이 무척이나 답답했기에 이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징그럽게 팔짱은 왜 끼는 거야!’그리고 다시 이숭겸이 인상을 찡그렸다.

“무겁다, 떨어져.”

난 그렇게 말하면서 흥선의 팔에 묻은 먼지를 털듯 털어내고 이숭겸을 봤다.

“가시죠.”

나와 흥선, 그리고 이숭겸과 백화는 그렇게 유유히 궁궐을 빠져나갔다.물론 내가 가는 곳은 이의방이 자기 마음대로 내게 준 김돈중의 사택이다.

권력의 중심에 서있던 김돈중의 사택이니 어마어마하게 클 것은 분명했다.난 김돈중의 사택으로 가는 동안 이숭겸과 흥선을 계속 관찰했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이숭겸은 흥선에게 지극정성이었다.‘확실해!’나는 씩 웃었다.

‘그나저나 황자가 분명한데 내가 형 소리를 듣네.’공예태후의 처소.공예태후는 상궁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뭐라? 아직도 찾지 못했단 말이냐?”

“화, 황송하옵니다.”

상궁은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어서 찾아라, 어서!”

공예태후는 무척이나 다급한 표정으로 소리를 쳤다.지난 새벽에 난이 일어났을 때도 이런 표정은 보이지 않았던 공예태후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다급한 표정이 역력했다.

“어서 찾으란 말이다, 어서!”

“예, 태후마마!”

상궁은 대답을 하고 기어서 밖으로 나갔다. 그만큼 공예태후는 화를 내고 있었다.김돈중의 사택.내가 김돈중의 사택으로 들어선 순간, 사택을 지키고 있던 견룡군 병사들은 나를 확인하고는 바로 내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오셨습니까?”

병사들 중에서 대장 격인 병졸 하나가 내게 말하며 옆에 가만히 서있는 백화와 흥선, 그리고 이숭겸을 힐끗 봤다.마치 내게 누구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물론 내가 대답해 줄 필요는 없는 일이다.

“안은 어떻지?”

“보시기에 거북스러운 것들은 제법 치웠지만 워낙 난장판이어서 다 정리하지는 못했습니다.”

난 병사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신들이 들고일어난 순간, 무신들을 가장 크게 겁박했던 김돈중의 식솔들부터 사달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니.

“다 죽은 거야?”

“김돈중의 피붙이들은 다 죽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노예들은 다 도망치고 몇 남지 않았습니다.”

“노예들이 남아있다고?”

“그렇습니다, 도망칠 때를 놓친 것 같습니다.”

노예는 재산이다. 그러니 그들이 도망을 쳤다는 것은 내 재산이 사라졌다는 말이 된다.물론 그들을 다른 사람들처럼 다시 잡아들일 생각은 없다.

이 순간 중요한 것은 그들이 도망칠 때 창고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갔느냐는 점이다.‘경황이 없었겠지.’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김돈중의 사택에는 김돈중의 재산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의방 덕분에 나는 단단히 한밑천 챙겼다는 뜻이다.

물론 이의방도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내게 이 집을 주겠다고 호언장담했을 거다.‘얼마나 있는지가 중요하겠지.’물론 이 집에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황실로 회수될 거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숫자 놀음에 불과한 것이니 조사를 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우선 들어가 보자.’난 그렇게 생각하며 옆에 있는 병사를 봤다.

“너도 좀 챙겼나?”

내 말에 병사는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예? 무, 무슨 말씀이신지…….”

“집을 좀 치웠다면 줍는 게 좀 있었을 거 아냐?”

내 물음에 병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나를 빤히 봤다.

“토하지 않을 만큼 적당히면 된다.”

난 그렇게 말하며 병사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러자 병사는 나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이 말에는 경고와 격려가 섞여있다.

너희들이 나 모르게 뭘 챙겨도 내가 다 알고 있으니 앞으로는 함부로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경고가 담겨있지만, 너희들의 대장인 나는 이만큼 배포가 크고 너희들에게 신경을 써준다는 점도 내포하고 있다.

“아닙니다.”

병사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결 표정이 밝아져 있었다.

“알았다, 이곳을 잘 지켜야 할 것이다.”

“예, 위장 나리!”

병사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내게 머리를 조아렸다.나는 말없이 세 명을 데리고 김돈중의 집으로 들어섰다. 그 때 이숭겸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그의 표정은 한마디로 어찌 하찮은 위장이 이런 곳을 차지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이럴 때는 일침을 가해줘야 한다.

“왜? 내가 이 집을 가지면 안 되나요?”

“그렇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래도 뭐요?”

“사태가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 되었든 이 집의 재산은 거의 대부분이 몰수될 겁니다. 그것을 막을 힘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순간부터 이숭겸은 내게 존댓말을 했다.이숭겸은 오랜 환관 생활 때문인지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역시 나이는 그냥 먹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야 다른 사람들이 가지는 거고, 나는 그냥 누가 주니까 와본 겁니다. 당장 갈 곳도 없고.”

김돈중의 사택에 들어서자 나는 인상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병사들이 조금 정리를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엉망진창이라는 표현이 딱 맞을 것 같았다.

“이거 집만 크지 치우려면 엄청나게 시간이 들어가겠네.”

난 그렇게 말하며 백화를 봤다. 한마디로 네가 치우라는 뜻이다. 그리고 내 말을 들은 백화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걸 혼자서 다 치우기에는…….”

“노예들이 있잖아.”

“하지만 그들은 믿을 수도 없고.”

백화의 말에 난 그렇기도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기는 하네. 그래도 누군가는 치워야 하잖아. 저기 몸에서 떨어져 나간 팔 보이네. 저런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잖아.”

“그렇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백화는 내 눈치를 봤다.

“뭐?”

“옥에 수검대가 있습니다.”

“수검대?”

“예, 그렇습니다. 제가 거느리던 계집 무사들입니다.”

난 속으로 얼굴도 예쁜 것이 계속 예쁜 짓만 한다는 눈빛으로 백화를 봤다.

“네 부하들을 구해달라는 것이냐?”

“밑에 두고 쓰시면 배신 잘하는 열 사내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울 것입니다.”

백화의 말이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한 열 명쯤 되었지?”

내 말에 백화는 나를 뚫어지게 봤다.

“어찌 아십니까?”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

“그 아이들을 구해 주십시오.”

백화가 내게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김돈중의 사택 정문을 열고 견룡군 병사 둘이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내 부하가 된 놈이 아닌데…….’난 무릎을 꿇은 병사 둘을 봤다.

“무슨 일이야?”

“견룡행수께서 급하게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내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내 부하들이 된 병사들만 아는 사실이다.다시 말해 내가 무비를 이의방의 사택으로 데려다 놓은 이후가 모두 보고되고 있다는 것이다.‘내가 기고만장해 있을 때 나도 모르게 감시를 당하고 있었네.’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곳에 있는지 어떻게 알았지?”

“저는 잘 모릅니다. 견룡행수께서 모시고 오라고 하셔서 달려온 것뿐입니다.”

오라고 하니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감시를 당하고 있는지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다시 백화를 힐끗 봤다.‘어쩔 수 없이 처음부터 내 부하로 쓸 수 있는 것들을 키워야겠네.’이번 일로 인해 경각심을 느끼고 백화의 부하들인 수검대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수께서 다른 말씀은 없었느냐?”

난 병사를 보며 물었다.

“황상께서 환궁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렇게 전하시면 알 거라고 하셨습니다.”

“뭐라?”

“그리 전하면 안다 하셨습니다.”

난 병사의 말에 이의방이 왜 이렇게 나를 급하게 찾는지 알 것 같았다. 황제인 의종이 환궁한다면 일이 커진다.

“알았다, 일이 급하게 돌아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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