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웅-36화 (36/620)

< -- 간웅 2권 -- >진준까지 이의방의 말에 동의를 하니 정중부는 할 말이 없어졌다.

“맞는 말이라고 해도 젊은것들이 노련하게 국정을 운영할 수 있겠소?”

“김돈중을 비롯한 늙은것들이 나라를 망쳐먹는 것보다야 더 좋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견룡이면서 행수인 이의방이 처음으로 정중부에게 도전하는 거였다. 그리고 정중부는 이의방의 말에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이 순간 권력을 가지려는 암투는 표면화되었다.

“으음!”

정중부는 이의방을 보며 신음 소리를 냈다. 그가 낸 신음 소리는 식견이 부족한 하급 군관이 낄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정중부가 계급과 직급으로 이의방을 제지하기에는 지난 새벽에 한 일이 너무도 없었다.‘이쯤에서 한발 물러나야겠지.’이의방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정중부를 보았다.

“식견이 부족한 소인이 괜한 말을 올린 것 같습니다.”

“아닐세! 틀린 말은 아니야!”

이소응이 이의방의 편을 들고 나섰다. 그리고 이소응은 정중부를 봤다.

“상장군! 지금 우리가 온건한 자세로 나가 쥐고 있는 칼을 버린다면 어제 목숨을 연명한 문신들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김돈중을 잡아 죽이지도 못했으니 저희가 아직은 안심을 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김돈중이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아직 그를 추포하지 못했습니다.”

이의방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가 아직 잡히지 않았다면 큰일이군.”

정중부 역시 인상을 찡그렸다. 그만큼 김돈중은 무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이었다.

“상장군!”

이의방이 조심스럽게 정중부를 불렀다.

“뭔가?”

“소인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이의방이 몸을 낮췄다. 지금 이의방은 회생이 알려준 대로 철저히 행동하고 있는 거였다.

자신이 강경하게 나가지 않아도 이미 노장군들이 강경하게 나가고 있으니 일부러 정중부와 척을 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이의방은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회생이 자신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래 등 같은 집에 삼 처 구 첩만이 아니라 원한다면 이 고려의 공주도 줄 것이야!’이의방은 이만큼 회생에게 푹 빠져있었다. 하지만 회생은 이의방과 다르게 착착 발을 뺄 준비를 하고 있었다.이의방이 정중하게 청을 하자 정중부는 마지못해 허락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인의 짧은 생각으로도 살아난 문신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악착같이 황상 폐하를 부추겨 이번 거사의 대의를 왜곡할 것이고, 저희들과 같이 거사에서 선두에 서신 상장군을 역도의 수괴로 몰 것입니다.”

이의방의 말에 정중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누가 역도의 수괴라는 것인가?”

“상장군이지 않사옵니까?”

이의방의 말에 정중부는 이 순간 빼도 박도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의 의지를 꺾을 정중부였다면 이 장군방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황상 폐하를 모시고 온다면 황상 폐하는 우리의 거사를 불문에 부칠 수도 있을 것이야!”

“그건 두고 볼 일입니다.”

노장군들이 일제히 합창을 하듯 정중부에게 말을 했다.

“당연히 황상 폐하는 황궁으로 모시고 와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이의방이 정중부의 편을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나?”

정중부의 물음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만약 도주한 김돈중이 보현원에서 황상 폐하를 빼내 가기라도 하면 일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옳은 말이네. 역시 자네는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어.”

“과찬이십니다.”

“아닐세, 나도 자네의 생각과 같네. 그러니 하루빨리 황상 폐하를 황도로 모시고 와야 할 것이야. 그러고 나서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어야 할 것이야!”

그 말에 이고와 채원은 인상을 찡그렸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다 죽이면 저희가 부릴 문신들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 그게 바로 내 생각이야!”

이소응을 비롯한 노장군들은 갑자기 나타나 정국을 주도하려는 정중부를 보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물론 이고와 채원의 눈에는 그런 노장군들 역시 아무 일도 한 것 없는 뒷방 늙은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의방이 참으로 비위가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의방이 줄타기를 잘했기에 무신정권 초기를 장악하는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어린 병사의 죽음을 슬퍼한 측은지심이 가져다준 보은인지도.

“모두 다 내 의견을 따라주게.”

상장군 정중부는 그렇게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제일 먼저 이의방이 대답했고 노장군들은 마지못해 대답했다.보현원에 감금된 의종은 그렇게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보현원에서 돌아올 의종은 이제 황제라기보다는 허수아비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위장 이회생이 무비 마마를 뵈옵니다.”

내 말에 무비는 나를 빤히 봤다. 사실 난 무비가 어떻게 나올까 궁금하여 새롭게 지은 이름을 말한 거였다.‘역시 뭔가 있는 것 같아. 정말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눈빛이야. 뭐지? 나와 저 무비의 관계가 뭘까? 분명 내 엄마는 아닐 거야.’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위장 이회생이라고 했느냐?”

“그러하옵니다.”

“너의 이름이 이회생이 확실한 것이냐?”

무비는 내 이름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다. 그녀가 처음 나를 봤을 때도 저런 눈빛을 했었다.

“원래 다른 이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번 황상 폐하의 어가 행렬 때 강인번을 들고 이동하다가 번개를 맞고 죽었다 살아나서 회생이라 개명을 했습니다.”

“죽었다 살아나서 다시 태어났다는 건가?”

“그러하옵니다. 그리고 전의 기억도 없습니다.”

이 역시 무비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기억이 없다고?”

“그러하옵니다. 그날 이전의 기억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날 이렇게 감금해 놓고 무슨 일로 다시 찾아온 것이냐?”

“이제 이곳을 나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무비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이미 이 궁궐이 다 장악이 되었다는 거군.”

무비는 내가 한 말을 듣고 그 숨겨진 뜻을 단번에 파악해 냈다.

“그러하옵니다. 상장군 정중부와 함께 산원과 행수들이 모두 대장군들과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 얼마나 오래갈지는 두고 보자고.”

무비는 장군방이 있는 담 쪽을 봤다.‘뭔가 나를 정말 잘 아는 것 같은데, 눈빛으로 봐서는 절대 대답을 해주지 않을 모양이야.’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내 궁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냐?”

무비는 안정이 되었다는 말에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도 되냐고 물었다.

“이제 궁에는 가실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무비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대장군과 견룡행수가 날 폐위시키라고 하더냐?”

이 순간 무비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의종의 총애를 받던 총비인 무비는 무신정권 전까지만 해도 무서울 것이 없는 여자였다.

“그건 아니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궁에서 나가시는 것은 확실합니다.”

“뭐라? 폐위는 아니지만 궁에서는 나가야 한다?”

“그러하옵니다. 지금 무비 마마에게 앙심을 품은 자들이 많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게 앙심을 품은 자?”

“그렇습니다.”

“그럼 너도 그중에 하나인 것이냐?”

이 상황에서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무비가 무척이나 담이 큰 여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이러니 백화의 등에 비수를 박지.’무비는 내가 어떻게 대답할지 관찰하는 것 같았다.‘정말 뭔가 있어. 무비가 알고 있는 나에 대한 비밀이라면 절대 평범한 것이 아닐 거야.’난 그런 생각을 하며 무비를 봤다.

“그럼 그런 무부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겠다는 것이냐?”

“예, 무비 마마를 노리는 자들은 그저 무부에 불과합니다.”

“그럼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이냐?”

지금 무비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우선 견룡행수의 사택에 머물게 되실 겁니다.”

내 말에 무비는 무신정변이 일어났을 때보다 더 크게 눈을 떴다.

“견룡행수 이의방의 사택으로 몸을 숨겨라?”

“그러하옵니다. 견룡행수가 무비 마마를 무척이나 걱정하고 계십니다.”

“이의방이?”

“그러하옵니다.”

내 대답에 무비는 씩 웃었다. 그리고 난 그녀의 웃음이 뭘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무비는 무척이나 영악하다.’그 생각과 더불어 무비와 백화를 동시에 궁에서 빼돌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나저나 몸은 좀 괜찮을까?’무비의 발아래, 고려의 비밀 은신처에 있는 백화가 떠올랐다.

“이 행수가 날 그곳으로 피신시키려는 이유가 뭐지?”

서로 눈빛으로 모든 것을 주고받았는데 무비는 내게 물었다. 이건 나를 떠보기 위함일 거다.

“제가 어떻게 아옵니까?”

“그러냐? 그렇지, 네가 어찌 알겠냐?”

“그러하옵니다.”

“반드시 내가 그곳으로 가야 하겠지?”

“그러하옵니다.”

“물론 내가 그렇게 자리를 옮기는 것은 모두 다 옥새 때문일 거고.”

이래서 헛똑똑이라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저는 그것까지는 모르옵니다.”

“그래, 모르겠지. 알아도 모른다고 하겠지.”

“예?”

“공예태후와 이의방, 그리고 네가 무슨 거래를 한 것이냐?”

순간 절대 무비를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곳에 감금당한 상태에서도 어제 새벽에 일어났던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저러니 의종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겠지!’난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무비를 봤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나이다.”

“너는 계속 모른다고만 하는군. 그런데 네 이름이 회생이라고 했느냐?”

무비에게 내 이름이 회생이라고 몇 번을 말해 줬다. 하지만 무비는 황비로서 나 같은 자의 이름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회생아!”

“예, 무비 마마!”

“이 궁에는 말이다, 벽에도 귀가 있단다.”

이건 아주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입조심을 하라는 뜻도 되겠지만 자신의 능력을 내게 보이기 위함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또 공예태후의 처소에 있는 상궁들을 제법 많이 포섭해 놓았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를 살려주려고 노력한 것은 은혜로 알겠다.”

이 순간 난 황족의 일원인 무비에게 은혜를 내린 위가 되었다.

“내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자꾸 날 본 사람들은 나를 잊지 않겠다고 말한다. 나는 계속 그들로부터 잊히려고 하는데 말이다.

“황공하나이다.”

“그래, 가자. 내가 무슨 힘이 있겠느냐.”

무비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모시겠나이다.”

“알았다.”

그렇게 무비는 나를 따라 대전에서 나왔다. 그리고 난 대전 전각 밑을 봤고 무비는 대전 뒤편을 봤다.‘아무리 봐도 그곳에는 옥새가 없다.

’난 그렇게 무비를 이의방의 사택으로 피신 아닌 피신을 시켰다.견룡군와 용호군, 그리고 순검군들이 황궁을 장악했다고는 해도 무척이나 어수선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은밀하게 무비를 이의방의 사택으로 보낸 것이다.이제 곧 무비는 이의방의 여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의종이 시름에 빠지는 계기가 된다.

사실 이번 조치는 내게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다. 무비는 능력 있고 영악한 여자로, 그녀가 후일 나와 이의방 사이에 어떠한 역할을 할지 아직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녀를 이대로 죽게 둘 수는 없다. 그렇게 된다면 이 몸의 주인이 누구고, 또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게 된다.물론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이 몸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보다 내가 지금 이 몸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하지만 누군가를 해하였을 때 그가 이 몸의 혈족이나 친분이 있는 자가 아니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것은 이유라기보다는 구차한 변명일 것이다.그렇게 나는 무비를 이의방의 사택으로 피신을 시켰다.

그리하여 의종은 폭군으로 집권 말년에 모든 것을 잃는 황제가 되었다.권력과 여자! 그 모든 것을 잃고 마지막에는 목숨까지 잃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을 잃은 자의 최후일 것이다.‘이제 무비는 살려놨고…….’난 그렇게 이의방의 사택에 들어간 무비를 보며 생각했다.

아마 무비는 이제 이의방의 처와 경쟁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평민 출신인 이의방의 본처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냥 밀려나는 수순이 되겠지.내가 무비를 이의방의 사택으로 보낸 것은, 이의방이 그녀를 계속 옆에 두고 보면 눈감고 거부하려고 해도 흑심이 생길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반대로 계속 가까이에서 보게 되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가까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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