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웅-35화 (35/620)

< -- 간웅 2권 -- >이고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고, 이의방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우선 너의 소원부터 들어주지. 그 집을 너에게 주마!”

이의방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저에게요?”

“그래,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고래 등 같은 집에 마누라 셋이면 충분하다고.”

이 순간 나는 이의방을 다시 봤다.‘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이건 이의방에게 상당한 장점이 될 것이다.

부하가 한 말을 기억하고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아랫사람에게 아주 좋은 점으로 비쳐질 테니.그리고 한편으로는 이의방이 조금씩 건방져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역신이 된 자의 사택을 내게 내어준다고?’나는 이게 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백화를 숨길 곳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면 아직 많은 것이 있을 거야!”

이고는 나를 보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예?”

“시체도 많고 창고에 쌓여있는 것도 많고. 내 수하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가보면 알아. 하하하!”

난 지금까지만 봐서는 이고가 그렇게 물욕이 강한 자는 아니라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도 그렇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고는 후안무치의 무부로 변해갈 게 분명했다. 역사서에서도 그렇게 적혀있으니 말이다.

“어서 가서 무비를 피신시켜라!”

이의방은 다시 나를 채근했다.

“예, 견룡행수님!”

난 짧게 부복하고 대전으로 뛰었다. 그리고 나의 뒤를 따라 이십여 명의 견룡군 장졸들이 따랐다.내 뒤를 따르는 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난 벼락출세한 사람일 것이다.

‘위라고? 위라…….’난 당장 위라는 직위에 만족했다. 당장은 움직임에 불편이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살 집도 생겼으니 나쁘지 않은 출발이라고 나를 다독였다.

‘문신의 거두 김돈중의 집이라면 상당히 클 거야!’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비록 삼 처는 얻지 못했지만 고래 등 같은 집이 지금 생긴 것이다.

‘이의방! 약속은 칼이네! 하하하!’8장 정중부의 계략회생은 스무 명의 견룡군 장졸들을 이끌고 무비를 이의방의 집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대전으로 이동했다.‘위라……. 위의 직위라……. 나쁘지 않아.’나는 이곳으로 온 후에 최하급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군관의 직위를 받게 됐다.

물론 평상시라면 절대 견룡행수 따위가 나에게 위의 직위를 하사할 수 없다.하지만 이미 이의방은 상장군 정중부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존재로 부각되어 있었고, 하급 군관 출신인 이의방은 하급 군관들과 장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다져나갔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엉뚱한 이고와 불곰 같은 채원이 지금까지 이의방을 돕고 있기 때문이다.난 대전으로 가면서 임시 감옥으로 사용하고 있는 전각을 봤다.

그 안에는 새벽의 거대한 폭풍에서 살아남은 문신들이 감금되어 있었다.물론 그들이 오늘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목을 붙이고 있을 거라는 보장은 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안에 내 대타로 쓸 문극겸이 있다는 것이다.

‘문극겸도 어떻게 좀 빼내 와야 하는데…….’내가 이의방의 옆에 있은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지만 내 눈치를 보는 것들이 많아졌다.그것은 나와 이의방을 같은 축으로 보고 있다는 거다.

이건 이의방이 통치할 동안은 아주 유용하게 쓰이게 될 것이다.하지만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게 이의방이 죽임을 당하는 순간 내게 비수로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훗날 이의방이 암살된 후 이의방의 혈족들 중 살아남은 자들은 함경도로 갔다. 그곳에 정착한 후손들은 고려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왕조의 주인공이 된다.

어쩜 조선의 탄생은 이미 무신정권 때부터 하늘이 정해준 것인지도 모른다.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대전으로 걸어갔고 내 뒤에 있는 스무 명의 견룡군 장졸들은 내 부하가 되어 나를 따랐다.

이들을 이끌고 다니니 누구 하나 나를 함부로 쳐다보는 이가 없었고 모두 나를 두려워했다. 정말 우습게도 난 스무 명의 장졸을 뒤에 세우고 호가호위하고 있는 거였다.

‘그나저나 무비와 백화를 같이 내보내면 안 되는데…….’분명 백화의 등에 비수를 박은 것은 무비일 거다. 원래 인간은 한 번 죽이기로 마음을 먹으면 후환을 걱정해서라도 반드시 죽이려드는 습성이 있다.

여자인 무비에게 백화는 그냥 버린 무사 하나 정도이지만, 나처럼 혈기왕성한 젊은이에게는 아름다운 아가씨로 보일 뿐이었다. 물론 검을 든 무사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검을 꽤 쓰면서 뒤에서 찌르는 것을 왜 올랐을까?’문득 그런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아마 그것은 무비를 너무 깊이 믿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난 오늘 여기서 또 중요한 한 가지를 배우게 됐다.‘어떠한 경우라도 사람을 51% 이상 믿지 않는다.

’이건 내 처세술 중에서 가장 큰 핵심이 되는 점이다.‘어떻게 하지? 그냥 막 옮길 수는 없는데…….’난 여전히 백화가 걱정이 됐다.

그곳에 오래 둘 수도 없다.‘젠장! 할 수 없지. 무비는 지금 초조해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백화를 알아보지 못할지도 몰라.

’참 치밀하게 생각하는 나는 이런 부분에는 무척이나 단순하게 접근했다.그리고 난 끝내 무비가 있는 대전 앞에 섰다.

“너! 너! 둘은 나를 따라와.”

“예, 위장님!”

내가 호명한 병사는 바로 복명복창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고려의 군사 계급 중 위는 종구품 수정보다 상위의 계급으로 정구품에 해당되는 직위였다. 다시 말해 일개 졸에 불과했던 내가 수정을 뛰어넘어 바로 위가 된 것은 대단한 파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권력의 단맛이구나!’난 스스로를 보며 놀랐다.겨우 위장인 내가 이렇게 어깨에 힘이 들어갈 정도면 앞으로 고려를 좌지우지할 이의방과 이고, 그리고 채원과 정중부의 어깨는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바로 대전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대전 앞에는 상궁이 서있었다.

‘상궁이 왜 여기에?’분명 이의방이 무비를 이곳에 감금할 때만 해도 상궁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상궁이 무비를 모시고 있었다.

“아뢰어 주시게.”

내가 ‘주시게’라는 말을 쓰자 상궁은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이건 놀랍고도 신기한 일이었다.

겨우 위장 주제에 어떻게 무비를 모시고 있는 상궁에게 하대를 한단 말인가.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이라면 당장에 치도곤을 당할 죄다. 하지만 지금은 천지가 개벽된 상태다.

그리고 눈치로 살고 눈치로 죽는 상궁들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내게 조금 불편한 표정을 보였던 상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날 보며 웃었다.

“알겠습니다.”

상궁은 내게 짧게 말했다.

“무비 마마! 견룡행수 이의방의 조카가 알현을 청하옵니다.”

난 상궁의 말을 듣고 인상을 찡그렸다.‘정말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는 법이네.’이제는 정말 빼도 박도 못 하는 상황이 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들어오시라 하게.”

순간 난 더욱 놀랐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의종의 총애를 받던 무비가 내게 하대를 하지 않고 반존대를 한 것이었다.물론 이것은 이번 무신정변을 주도한 이의방의 처조카라는 간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들어가십시오.”

“감사합니다.”

난 짧게 대답하고 병사 둘을 봤다.

“너희들은 여기에 대기하고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위장 나리!”

그리고 난 바로 무비가 있는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이의방과 이고, 그리고 채원은 정중부에게 반기를 들 준비를 하고 있는 노장군들을 지원해 주기 위해 장군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거사 전이라면 그들이 장군방으로 들어가는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의방이 용호군을 장악했고, 채원이 금군과 순검군들을 장악했다. 이제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을 보면 역시 역사는 돌고 도는 법이다.대한민국 쿠데타의 주역들인 박정희와 전두환 역시, 쿠데타 세력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었지만 가장 높은 계급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와 지금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계급보다 쿠데타나 거사에 얼마나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지가 중요했고, 얼마나 강한 부대를 장악하고 있느냐가 중요했다. 또한, 급박하게 변화하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를 하냐가 중요했던 것이다.

지금 이의방과 정중부는 서로를 견제하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스윽!마치 검이 적의 목을 베듯 장군방의 빗장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리고 이의방을 선두로 채원과 이고가 조심스럽게 장군방 안으로 들어가 말석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노장군들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지만 뭐라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이들의 입장에 가장 마음속으로 화가 치미는 존재는 고려 무인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상장군 정중부일 것이다.

지금과 대한민국 근대의 쿠데타는 그다지 모양새가 다르지 않다. 이의방이 박정희나 전두환이라면, 정중부는 정승화 육군 총장과 같은 위치인 것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이의방은 박정희처럼 위태로운 국가를 걱정하지 않았고, 정중부는 정승화 육군 총장처럼 진정한 군인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위해 달리는 역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대들이 무슨 일인가?”

그래도 정중부는 세 사람 앞에서 근엄함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이 순간 정중부 자신에게 남은 것은 근엄한 상장군의 직위뿐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도 알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절대 계급으로 밀어붙일 때가 아니라는 것을.

“상장군께서 오셨다고 하시기에 왔습니다.”

이의방이 정중히 말했다.

“그래? 그대들은 고생이 많았다고 해서 부르지 않았는데, 왔으니 앉게.”

정중부가 그렇게 말했지만 세 사람은 이미 자리에 앉아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하던 말을 계속하겠소.”

정중부는 이소응을 비롯한 노장군들을 봤다.

“이번 거병은 여러분들이 충심으로 결사 단결하여 성공으로 끝이 났소.”

이렇게 뭔가 꿍꿍이가 있는 자는 먼저 타인의 공을 치하하고 말을 꺼내는 것이 기본일 것이다. 지금 그런 면에서 정중부는 기본을 걷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모두 다 고생이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던 진준이 정중부를 보며 말했다.아마 지금 이 장군방 상석에 앉아있는 장군들 중에 진준이 정중부와 가장 가까이 지내는 인물일 것이다.

다시 말해 정중부 계파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그건 어떤 면에서 보면 가는 길이 같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진준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진준은 무척이나 온후한 인물이었다.

“그래요, 다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하루빨리 이번 거병을 수습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서 흔들리는 사직을 받치는 튼튼한 주춧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중부의 말에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장군들과 하급 군관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상장군! 하지만 그동안 조정을 어지럽힌 난신적자들은 아직도 차고 넘칩니다.”

지금까지 상장군 정중부의 말이라면 꼼짝도 하지 못하던 이소응이 상장군의 뜻에 반하는 의견을 냈다.이것이 지금 상장군 정중부의 입장이 달라졌다는 증거였다.그리고 이의방은 회생이 가기 전에 자신에게 했던 말대로 되고 있는 것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이 대장군,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의 피를 봐야 한단 말이오?”

“이미 흘린 피입니다. 인정을 두고 일을 처리하면 도리어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기탁성이 정중부를 보며 말했다. 지금 누구 하나 정중부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노장군은 없었다.

그들 역시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권력은 가지고 싶은 모양이었다.기탁성!그는 본관이 행주다.

궁술, 마술(馬術)에 능하였으며, 음보로 무관직인 교위가 되고 의종에게 뽑혀 숙위군의 하나인 견룡으로 발탁된 뒤, 왕의 측근으로 권세를 부려 위장군이 되었다.한마디로 평생 잘 먹고 잘 산 인물이었고, 또 낙하산이었다.

음보로 관직을 받았으니 낙하산이 분명할 것이다.

“얼마나 더 많은 문신들을 죽여야 한단 말이오. 그리고 또, 그렇게 많은 문신들을 죽이고 나면 누가 국정을 운영한단 말이오.”

정중부의 말에 이번에는 다른 노장군들이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거의 이름 석 자 정도만 쓸 수 있는 까막눈에 가까운 인물들이었기에 국정을 논한다는 말에 겁을 먹은 거였다.이때 이의방은 자신이 나설 때가 되었다고 했다.‘이럴 때 나서라는 거겠지.’이의방은 대전으로 간 회생을 떠올렸다.

“후일의 국정은 참신한 젊은 문신들을 기용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의방의 말에 진준은 다시 한 번 이의방을 봤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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