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웅-32화 (32/620)

< -- 간웅 2권 -- >하늘을 바라본다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다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법 알아주는 명문대를 다녔고, 머리 좋고 잘생겼다는 소리도 제법 들었다. 또한 학자의 재능까지 보인다며 석좌 교수에게 제법 칭찬까지 받던 수재였다.사학자로 대성할 재능이 있다.

그것이 나를 칭찬한 교수의 말이었다.그런데 내가 드라마 각본에 빠진 것이다.

그 시작은 정말 내 천재성과 비슷한 요행 때문이었다.그냥 재미 삼아 쓴 사극 드라마 극본이 KBS 드라마 극본 최종 심의에 올라갔는데, 그것을 어린 치기에 자랑했고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부러움을 받게 됐다.

원래 유혹은 야릇하고 달콤한 것이 먼저 오는 법이다. 그렇게 나는 작은 유혹을 시작으로 늪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마흔다섯 살이 되도록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내일이면 된다, 이번엔 된다, 그렇게 집요하고 처절하게 죽어라 매달린 것이다.그러니 정상적이고 평범한 생활은 할 수 없게 되었고, 결혼 같은 것은 더더군다나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 그렇게 어리석고 고집스럽게 극본을 부여잡고 굶어 죽은 것이고, 세상에 태어나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정말 앙증맞은 아이 하나가 내게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그런 아이를 보고 나도 모르게 내 마음 한구석에 측은지심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귀엽기는 한데…….’난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아이를 째려봤다.

“어서 나오라니까.”

내 명령에 어린 환관은 울먹이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나왔다. 낑낑거리며 겨우 나오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너 왜 거기 들어가 있어?”

“그, 그냥요.”

하지만 절대 그냥 들어간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이 말이 돼?”

“그게요…….”

“그게 뭐?”

난 다시 어린 환관을 노려봤다.

“그냥 여기서 잠들었어요. 아앙!”

어린 환관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울지 마! 뚝!”

“제, 제발 죽이지 마세요.”

어린 환관은 어제 새벽에 일어났던 일을 모두 아는 것 같았다.‘귀엽기는 한데…….’난 어린 환관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스러웠다.

내게 가장 이롭고 현명한 방법은 저 어린 녀석을 죽이는 것이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이의 눈망울을 보자 그런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내 마음 어딘가에서 자꾸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이건 다시 말해 이 아이가 운이 좋아 이곳을 찾아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누군가 이곳에 이 아이를 숨겼다.

’그렇게 추측하며 아이의 머리 위를 봤다.‘왕흥선? 왕흥선! 왕씨다.

’난 깜짝 놀라며 미간을 좁혔다. 이 고려에서, 그것도 황궁에서 왕씨를 쓰는 어린 남자아이가 있다면 그것은 황족일 확률이 높다.

의종의 아들인가?’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의종에게 이렇게 어린 아들은 없었다.‘그럼 뭘까?’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왕씨 성을 쓴다는 점이고, 무척이나 측은한 마음이 내게 일고 있다는 점이다.

“너, 거짓말하면 이 형한테 혼난다.”

난 아이를 다시 매섭게 노려봤다.

“거, 거짓말 안 할게요.”

“여기다가 누가 너를 숨겼어?”

내 말에 아이는 놀란 눈으로 울먹울먹하며 나를 봤다. 아이는 거짓말을 못 하니 그 점을 이용한 것이다.

“누가 널 여기다 숨겨줬지?”

“그, 그게…….”

“그게 누군데?”

난 다시 낮은 음성으로 아이를 위협했다. 아마 이런 곳을 알고 있다면 아주 대단한 신분이거나 은밀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이 아이가 황족일까?’난 그런 생각이 계속 머리를 때렸다.

“어서 말하지 못해! 너 바로 말하지 않으면 정말 혼날 줄 알아!”

난 다시 한 번 위협을 가했고 아이는 울상이 됐다.

“우리 할배가요.”

“할배?”

“예, 형님! 사, 살려주세요.”

“너희 할배라는 자가 누군데?”

“우리 할배는요…….”

“그래, 누구야?”

“대전 내관 이숭겸이에요.”

“대전 내관?”

어린 흥선의 말에 나의 추론은 점점 더 신빙성을 더해갔다.‘대전 내관이 숨긴 아이라……. 그것도 왕씨 성을 가진 아이를? 어쩌면…….’난 잠시 흥선을 째려봤다.

“예, 말했으니까 제발 때리지 말아주세요.”

어린 흥선은 내게 애원을 했다.

“좋아! 그 대신 여기서 찍소리도 하지 말고 있어야 한다.”

“예?”

아이는 자신이 끌려 나갈 거라고 예상한 모양이다.그런데 이곳에서 찍소리도 하지 말고 있으라는 내 말을 듣게 되자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곳에 백화를 숨기면 되겠군.’백화는 분명 아직 살아있다. 칼을 맞은 지 최소 열 시간 정도가 지났을 텐데도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는 걸 보면 앞으로도 죽지 않을 것 같다.

이래서 남자는 예쁜 여자에게 약한 모양이다. 물론 나 역시 남자다.

“절대 여기서 나오면 안 된다.”

“예, 형님!”

아이는 이제 나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환관들 틈에서 살다보니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래, 좋아!”

난 다시 한 번 아이를 본 후 빠르게 움직여 여전히 쓰러져있는 백화에게로 뛰어갔다. 그리고 잠시 주변을 살피고 바닥에 쓰러져있는 백화를 낑낑거리며 업었다.‘술 취한 여자처럼 무겁네!’난 그런 생각을 하며 인상을 찡그렸지만 백화를 업는 순간 등에서 뭉클한 것이 느껴졌다.

여자를 업었을 때 뭉클할 정도로 느껴진다는 것은 그녀의 가슴이 무척이나 크다는 뜻이다. 검을 다루는 여자의 가슴이 이렇게 크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나는 다시 주변을 살피며 대전 전각에 있는 피신처로 걸음을 옮겼다.그 순간 다시 아이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지금 나를 보고 있는 아이는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나는 낑낑거리며 아이가 목을 쭉 빼고 있는 비밀 은신처에 겨우 백화를 밀어 넣었다.

“좀 도와! 잡아당겨!”

“예, 형님!”

“조용히 해!”

“예.”

아이의 목소리가 좀 크다는 생각에 아이에게 주의를 주었다.아이는 짧게 대답하며 시체처럼 처진 백화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안으로 잡아당겼다.

“됐다.”

난 짧게 말한 후 비밀 은신처의 입구를 두 팔로 잡고 뛰어올랐다.‘제법 넓은데!’은신처의 안을 보고 조금은 놀랐다.‘이건 전각 바닥이 이중으로 되어있다는 거야!’아마 처음 이 대전 전각을 건축할 때부터 은밀하게 설계된 모양이었다.‘왕건이 잔머리 좀 썼는데.’난 피식 웃었다.

“그런데 형님! 이 누나 죽은 건가요?”

이제 이놈은 아예 나를 형님이라 부르며 친밀감을 드러냈다. 이런 친밀감을 보인다는 것은 이놈이 나이는 어리지만 처세에 아주 밝다는 것을 의미한다.

“넌 날 언제 봤다고 나에게 형님이냐?”

“헤헤헤! 죽을 목숨 살려 주셨으니 형님이죠.”

꽤나 넉살이 좋은 아이가 분명했다.

“이 여자 안 죽었다. 하지만 죽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올 때까지 네가 간호를 잘해야 할 거다.”

“간호요?”

“그래, 간호!”

“아차! 이거!”

아이는 자신의 옷에서 작은 환약 하나를 꺼냈다.

“이게 뭔데?”

“청심환요.”

“청심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대전 내관들은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이 순간 백화가 죽지 않을 운명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의 맑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저요?”

“그래, 너!”

“전 이흥선인데요.”

“이흥선?”

그 순간 아이는 내게 거짓으로 대답했고, 이 거짓말이 나로 하여금 그가 황족일지 모른다는 강한 의심이 들게 만들었다.‘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네. 분명 뭔가 있어.’이제 추측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예.”

아이의 말을 듣고 녀석의 얼굴을 빤히 봤다.‘하여튼 이것도 인연이겠지.’난 여전히 쓰러져있는 백화와 날 빤히 보고 있는 흥선을 보며 이것도 인연의 일종이라고 느꼈다.

‘그나저나 이 청심환을 어떻게 먹이냐?’그리고 잠시 후 드라마에서 봤던 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그건 너무 드라마틱한데…….’보통 스타급 여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에서 그 여자가 정신을 잃거나, 아니면 상대 남자 배우가 정신을 잃은 위급한 상황에서 꼭 이런 환약이라는 소재가 나온다. 그리고 그 환약을 씹어 삼키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가 씹어서 넘겨주는 장면이 있다.

그러면 은근슬쩍 야릇한 키스신이 되어버리고, 이럴 때는 시청률이 못해도 1%는 오르곤 한다.여주의 목욕신, 그리고 키스신은 남자를 설레게 하니 말이다.

‘어쩔 수 없지.’난 드라마의 한 장면을 야릇하게 떠올리며 흥선이 건넨 청심환을 입에 넣고 씹었다. 잘게 부스러진 환약을 죽은 듯 쓰러져있는 백화의 입에 흘려 넣어줬다.

그 모습을 본 흥선은 눈치 빠르게 재빨리 등을 돌렸다.‘눈치가 있네.’그 때 백화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정말 죽지는 않겠어.’난 그렇게 백화의 입에 고이 다져져 내 침으로 범벅이 된 청심환을 넣어주고 멋쩍은 표정으로 흥선의 등을 봤다.

“애가 그렇게 눈치가 빠삭하면 독해 보여.”

“헤헤헤!”

흥선은 그저 웃기만 했다.

“너 지금 이 궁궐 안이 위험하다는 거 알고 있지?”

흥선은 어리지만 생각 이상으로 영악해 보였다.

“예.”

“그러니까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절대 움직이면 안 된다.”

“예, 형님!”

“그리고 아까처럼 바스락거리며 밖을 내다봐서도 안 되고.”

“예, 형님! 그건 실수였어요.”

“하여튼 네가 이 빗장을 열면 너도 죽고 너의 할아버지인 이숭겸도 죽는다.”

내 말에 흥선은 금방 울상이 되었다.

“절대로 안 열게요.”

“그래, 절대로 열면 안 돼.”

“예, 형님!”

난 다시 다짐을 받고 조금 전보다 좀 더 편히 숨을 쉬는 백화를 잠시 내려다보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절대 열면 안 된다.”

“예, 절대 안 열게요. 그럴 테니까 우리 할배 좀 찾아 주세요.”

흥선은 이 순간에 자신의 할배를 찾아달라고 내게 부탁을 했다.

“알았어.”

난 그렇게 말하고 백화와 흥선이 들어가 있는 비밀 은신처의 빗장을 조심히 닫았다. 그 순간 나는 흥선의 차가운 눈을 보고 말았다.

마치 어둠 속에 숨은 살쾡이와 같은 매서운 눈빛!‘눈빛이 매섭다.’그 모습을 보고 황족일 거라는 내 추측을 강한 확신으로 바꿔버렸다.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것이니.’난 흥선을 숨겨두고 후일을 대비할 계획이다. 사람 사는 일을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아이를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6장 옥새를 품은 연못나는 바로 조금 전 백화가 쓰러져있던 곳으로 뛰어가서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구미호가 무덤을 파듯 급하게 땅을 팠다.

“있다!”

고려를 대표하는 상징! 옥새가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물론 이것을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그러니 이번엔 내가 나만 아는 곳에다 이것을 숨겨야 한다.

‘저곳에 넣어둘까?’난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뭐든 한 바구니에 담아두면 깨지는 법이지.’다시 주변을 살피다 50미터 정도 뒤에 작은 인공 연못에 시선이 꽂혔다.

‘의종이 저곳에서 술판을 벌였겠지.’아마 인공적으로 만든 호수에서 의종은 술을 마셨을 것이다. 주변에 누구 보는 이는 없나 매섭게 살피며 연못으로 다가갔다.

‘뭐야 이거?’난 인상을 찡그렸다.포석정의 형태로 만들어진 연못이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다시 깊은 연못이 있었다.

원래 포석정은 경주에 있는 신라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돌로 구불구불한 도랑을 타원형으로 만들고 그 도랑을 따라 물이 흐르게 만든 것으로써, 신라 귀족들은 이 물줄기의 둘레에 둘러앉아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화려한 연회를 벌였다.

‘이렇게 화려하게 연회를 벌이니 나라가 망하지.’난 신라가 망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고려가 만든 듯했다.이곳을 만든 자는 신라의 포석정을 완벽하게 카피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것처럼 중앙에 못을 파서 그 안에 연꽃을 심어놨다.

한마디로 불교가 핵심인 고려에서는 연못을 미륵보살의 상징으로 삼고 불교스럽게 술판을 벌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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