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웅-31화 (31/620)

< -- 간웅 2권 -- >

“당신, 뭐라고 했어?”

나는 장졸 하나를 노려보았다.

“뭐, 뭐라고 했느냐? 당신?”

“그래, 당신!”

“이놈 봐라!”

장졸 하나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내가 견룡행수 이의방의 처조카가 아니었다면 바로 주먹이 날아왔을 것이다.

“그래, 분명 견룡행수께서는 이곳에 아무나 들이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명을 하셨을 때 나도 옆에 있었다. 기억나지 않나? 잘 생각해 봐!”

내가 좀 더 세게 나가자 장졸은 나를 보며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 것 같았다.

“그래, 너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강하게 나가니 장졸 둘이 조금씩 꼬리를 내리는 기색이 역력했다.‘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되겠네.’틈이 보이면 그 틈을 최대한 뚫고 지나가는 것이 사람 사는 이치고 생리다. 이제 저들은 내게 틈을 보였으니 난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면 된다.

“난 당신들이 말하는 아무나가 아니야! 몰라, 나?”

난 매서운 눈으로 장졸들을 응시하며 그들을 다그쳤다.

“알긴 하지만…….”

“거사도 성공으로 끝났는데, 왜, 성공한 거사 뒤에 옥살이를 해보고 싶은 거야? 내가 급하다고 했잖아.”

“하지만…….”

“견룡행수께서 무비에게서 받아 오라는 것이 있어서 급히 가는 거야.”

“그래도 아무런 통보를…….”

장졸들은 조금 전보다 기가 죽은 것 같았다. 목소리가 큰 놈이 이긴다는 말이 있으니.

“에이, 썅! 비키라니까. 급하다고, 급해!”

난 바로 장졸을 밀치며 앞으로 나갔다. 물론 이렇게 말을 하는 동안에도 가슴속은 두 근 반, 세 근 반 강하게 뛰고 있었지만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나는 태연해 보였다.

“하, 하지만…….”

“나중에 견룡행수께 여쭤보면 되잖아.”

“…알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들이 앞으로 이의방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이다. 이의방은 오늘이 지나면 이 고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가 될 것이고, 겨우 장졸이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서 나는 이렇게 말을 했다.

“나 급해! 아니, 견룡행수님께서 급하시다. 만약 너희들 때문에 일을 망치게 되면 너희들은 절대 무사하지 못해!”

이렇게 위협하면 저들도 어쩔 수 없을 거다.장졸들은 어쩔 수 없이 내게 길을 열어줬다. 그들이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이의방의 처조카라는 신분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3일 동안 나를 항상 옆에 두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 거고.그리고 저들이 의심을 하지 못하게 한마디를 더 남겨야 한다.

“이제 좋은 세월이 올 거야! 그러니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게 해.”

내가 눈을 흘기자 장졸 둘은 마른침을 삼켰다. 좋은 세월이 올 거라는 이 말은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저들에게도 좋은 세월이 온다는 말이고, 또 나를 이렇게 통과시켰으니 잊지 않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을 거라고 저들은 받아들일 것이다.난 그렇게 말하고 조금은 거만하게 대전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장졸 둘을 힐끗 봤다.

‘그런데 빼돌린 옥새로 뭘 하지?’난 순간 옥새를 빼돌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동안 했다. 당장 옥새가 없으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무비와 나는 처지가 다르다.

‘뭐, 옥새로 무비와 거래를 할 수도 있겠지.’난 김돈중이 말한 출생의 비밀을 풀기 위해 어떻게든 무비와 담판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젠장! 김돈중도 있잖아.”

내 출생의 비밀을 제일 먼저 입 밖에 낸 자는 김돈중이다. 그럼 그자도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거다.‘왜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 한 거야!’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잔뜩 고심했다.

“곧 감악산에서 죽을 텐데…….”

김돈중은 종복의 배신으로 감악산에 숨었다가 죽게 된다. 그러니 이제 무비와 담판을 지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대전 뒤편으로 향했다.사실 내가 대전 뒤편으로 간 것은 옥새가 그곳에 있다는 추측에서 나온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분명 대정 군관들이 대전을 뒤졌는데 옥새는 없었어. 그리고 무비의 몸에도 없고, 백화수검대 년들의 몸에도 없었어. 게다가 무비의 손에 흙이 묻어있었어.’난 다시 한 번 그때를 떠올려봤다.

“그럼 묻어놓은 거겠지.”

나는 씨익 웃으며 무비가 옥새를 묻어놓은 곳이 대전 뒤편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고 보면 내 머리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다.하지만 말이 대전 뒤편이지 그곳은 아주 넓었다.

“그런데 어떻게 찾지?”

나는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대전 뒤편에 도착했을 때 잘 찾을 수 있도록 무비가 고맙게 표시를 해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옷에 묻은 피! 그리고 시신? 그럼 답은 하나지.”

난 대전 뒤편에 홀로 쓰러져있는 계집 무사의 시체를 보고 씩 웃었다.

“저 시체 밑에 없으면 내가 혀를 깨문다.”

난 그렇게 씩 웃으며 죽은 계집 무사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시체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원래 사람이든 동물이든 죽게 되면 모두 다 한 덩이 고기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무척이나 무겁다는 소리다.난 죽어있는 시체를 돌리려고 힘을 썼다. 그리고 잠시 후 엎드려 죽은 시체가 내 편을 향하게 만들 수 있었다.

“백화?”

죽은 사람의 머리 위에도 이름이 뜬다는 사실에 나는 잠깐 당황했다. 하지만 이 궁궐에 죽은 사람은 많고 난 그 시체를 무수히 보면서 이곳까지 왔다.그런데 그들 중에 이렇게 머리 위에 자신의 이름이 둥둥 뜨는 자는 보지 못했다. 이건 다시 말해서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

“아, 안 죽은 건가?”

난 당황스러워하며 죽은 계집 무사의 얼굴을 봤다.

“뭐 이렇게 예뻐!”

나는 그녀의 미모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녀가 숨을 쉬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본능적으로 코에다가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순간 콧바람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아, 아직 살아있어!”

난 이 백화라는 이름의 계집 무사가 왜 이곳에 죽어있는지 생각해 봤다. 물론 조금만 생각하면 답은 간단히 나온다.무비의 명으로 옥새를 숨기기 위해 땅을 파다 뒤에서 칼을 맞은 거겠지.

“죽지 않은 사람을, 그것도 미녀를 버리고 가면 남자가 아니겠지.”

하지만 문제가 있다. 옥새를 품에 넣고 이 여자까지 데리고 어떻게 장졸 둘을 지나가느냐가 문제다. 그리고 또, 나간다고 해도 어디다가 이 여자를 데려다 놓아야 하는지도 문제였다.

“이거 정말 당장 둘 곳이 없네.”

멀쩡한 사람도 아니고 죽어가는 계집을 둘러업고 나가서 어딘가에 두고 치료를 한다는 것은 지금 내 처지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부스럭!그 때 내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본능적으로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뽑아 들고 빠르게 돌아섰다.하지만 시야에 보이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인기척을 분명 느꼈다.

‘이 근처에 뭔가 있다.’난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처음 내가 이곳에 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그런데 왜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을까? 내가 오기 전부터 이곳에 누군가 숨어있었던 건 아닐까?하지만 아무리 봐도 숨어있을 만한 곳은 없었다.

‘원래 궁궐이라는 곳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비밀 통로가 있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는데…….’이건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난 드라마를 쓰다가 죽은 놈이니 내가 가진 지식 중에 대부분이 드라마에 대한 것이다.

‘이럴 때는 보통 대전 전각 아래 뭔가 있는데…….’보통 역사 소설이나 약간 엉뚱한 설정으로 만들어진 판타지 역사 소설에는 대전 전각 몇 번 주춧돌 옆에 비상계단이나 비상구, 아니면 은신처 같은 숨을 곳이 있다.그런 곳에 왕의 후손이나 주인공이 숨어서 살아남아 위기를 피하고 후에 복수한다는 설정이 많다.

‘시간이 좀 있는데 뒤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내가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지금 백화라는 여자가 엎드려있는 곳에 흙을 팠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옥새는 분명 저곳에 잘 묻혀있을 거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면 내가 옥새를 발견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훗날 누군가에게 나를 밀고하면 옥새 때문에 위험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이소응 일행부터 대전 앞에 있던 두 장졸까지 나를 본 사람은 많다.‘모든 것을 조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어쩌면 이것은 기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선명하게 들었다.

그래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난 대전 전각 아래로 천천히 걸어갔다.내 생각대로 대전 전각 아래 뭔가가 있다면 나만큼이나 지금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또 다른 실수를 할 것이고 그 실수는 소리를 더 내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물론 나도 지금 이 순간 잔뜩 긴장한 건 마찬가지다.

나는 검을 움켜쥐고 천천히 대전 전각 아래로 들어갔다. 대전 전각은 살짝 허리를 숙이면 밑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딱 은신처 같은 곳을 만들어놓기 좋은 구조네.’이렇듯 드라마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허구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다.조심히 소리를 죽여 주변을 살폈다.

너무 쉽게 찾을 수 있게 만들어 놨다면 환란을 대비해서 만들어놓은 게 아닐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져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발상의 전환? 발상의 전환!’그 단어만 계속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럼 아래보다는 위?’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보통 은신처나 몸을 숨길 만한 곳은 밑에 만들어두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수색을 하는 자들은 항상 아래부터 찾게 된다.

그런데 만약 그 생각을 뒤집어보면 위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대전 안에서는 아무리 밑을 찾아도 입구가 없을지 몰라.

’대전에서 여기까지 뛰어오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앞에는 대리석으로 막혀있고 뒤만 이렇게 뚫려있다.

‘여기까지 뛰어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1분도 안 돼!’정말 이곳에 황제나 그의 근친들이 위기 시에 숨을 만한 장소가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계속해서 내 머리를 때렸다.‘그래! 위다.

’조심스럽게 위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난 너무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했다.

이렇게 놀란 것은 내 머리 바로 위에서 아주 어린놈의 눈동자와 마주쳤기 때문이다.‘뭐, 뭐야?’정말 경악하리만치 놀랐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난 그 어린놈과 눈이 마주친 후 위를 힘껏 잡아당겼다.

끼익!역시 내 생각대로 위에 이 고려의 비밀 은신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나와 눈이 마주친 어린놈이 환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와!”

나는 무섭지만 낮은 톤으로 명령했다. 당장이라도 어린놈을 죽이겠다는 듯 눈을 부릅뜬 상태였고 그것을 어린놈도 아는 듯 보였다.울먹이는 것이 불쌍하기는 했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안전이고, 내가 하려는 일에 대한 비밀 유지였다.

“내가 나오라고 했다!”

다시 한 번 낮고 음산하게 명령을 했다.

“사, 살려주세요.”

“살고 싶으면 나와.”

눈알을 부라리며 어린 환관에게 계속 명령했다. 아니, 녀석은 어리다고 표현하기에도 어색할 만큼 어린애였다.절에 가면 간혹 동자승을 볼 수 있다.

딱 그 정도로 귀엽고 어린 환관이었다. 어쩌면 그냥 환관의 옷만 입혀놓은 아이인지도 모른다.

마음 한구석에 이 어린 환관이 귀엽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자리 잡기 시작했다.내가 현대에서 평탄한 생활을 하고 안정된 가정을 꾸렸다면 저런 아들 하나쯤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그런 마음이 드는 순간 사람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 또한 사람이다 보니 조금 전 무섭게 나오라고 위협하던 말투가 어느새 조금은 누그러져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나오라니까.”

“사, 살려주시는 거죠?”

놈은 두 손을 모아 내게 사정을 했다. 그런 어린 환관을 보며 내 마음 한편에 측은지심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나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저만 할 건데…….’마흔다섯 살!내가 굶어 죽는 순간까지 나는 죽어라 드라마 극본에 매달렸다. 늪처럼 빠져들었고 그 늪은 작가 데뷔라는 성공 말고는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그런 꿈을 가지기 전까지는 제법 성공할 수 있는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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