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2권 -- >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말을 하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래, 이제 새벽도 지났으니 죽일 놈은 거의 다 죽였고 살 놈은 살려야겠지.”
“예, 맞습니다. 후일 정사를 이끌어 나가시려면 무인들로는 절대 역부족입니다.”
“맞는 말이다. 문신들이 야비하고 치졸한 면이 있지만, 진정 학식이 높은 자들은 그 사람됨이 다르기는 하지.”
“그렇습니다. 그러니 저자를 유심히 보십시오.”
내 말에 이의방은 채원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문극겸을 봤다.
“왜, 죽기 전에 할 말이 있다는 것이 살려달라는 말이냐?”
채원의 조롱에 문극겸은 채원을 노려봤다. 저렇게 사람을 노려볼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의기와 자존심이 죽지 않았다는 증거다.
“여기에 끌려오는 놈하고 내 앞에서 벌벌 떨던 놈 중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 자가 없지. 개처럼 기면서 말이야!”
지금 채원은 예전 문신들이 무신들을 괄시하고 천대한 것처럼 문신들을 조롱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의방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래서는 안 되는데 말이야! 저렇게 해서는 우리와 문신 놈들이 다를 게 무엇이냔 말이야!”
이의방은 나에게 들으라고 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채원의 못마땅한 행동에 대한 반발인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할 말이 있다니 어디 해보고 죽어라!”
채원은 문극겸을 노려봤다.
“네놈이 이번 불충한 모반의 수괴인 것이냐?”
“수괴? 모반!”
순간 채원의 눈동자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그의 발이 무릎을 꿇고 있는 문극겸의 가슴팍을 크게 한 번 걷어찼다.퍼어억!
“으윽!”
문극겸은 바로 뒤로 넘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저놈 일으켜 세워! 저놈은 내가 직접 벤다.”
채원은 옆에 서있는 장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송악산 미친 불곰의 뚜껑이 열린 것이다.
“예, 산원 나리!”
장졸은 머리를 베기 좋게 문극겸을 일으켜 세웠다.그 때 이의방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도 밝았는데 언제까지 피를 보려는 건가?”
이의방의 말에 채원은 이의방을 봤다.
“이놈이 우리의 거사를 모반이라고 하는 것을 자네도 듣지 않았나? 그리고 나를 수괴라고 하는 것도 듣지 않았나?”
“전자는 모르겠으나 후자는 자네가 장군처럼 위용이 있어서 그렇게 한 말이겠지.”
“그 소리를 듣고 나보고 좋아하라는 건가?”
채원은 인상을 찡그리면 이의방을 봤다.
“저자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 더 들어보려고 하는 거네.”
“들어서 뭐하는가? 대쪽 같으신 문신 나리께서 일장 연설을 통해 우리를 꾸짖으려고 하는 것이지.”
채원은 문극겸 같은 문신을 많이 봤다는 투로 말했다.그리고 난 채원을 째려봤다.
‘항상 저 채원이 걸리네…….’그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채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이런 곳까지 끼면 안 되지.’이미 낄 때 안 낄 때를 구분하지 못하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뛴 나다.
더 이상 누구 말처럼 부화뇌동하면 일이 점점 커지게 될 것이다.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의방은 혹시라도 채원이 바로 문극겸의 목을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단상에서 내려가 문극겸의 옆에 섰다.
그리고 문극겸은 이의방을 보며 다시 물었다.
“네가 이 모반의 수괴인 것이냐?”
그러자 채원이 더 심하게 인상을 구겼다. 조금 전 똑같은 질문을 이의방에게 다시 되풀이하는 것은 자신을 이의방보다 못한 인간이라고 본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채원은 어떻게든 문극겸을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하는 눈빛을 보였다.‘아주 불곰 같네, 불곰!’난 그런 생각을 하며 이의방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내가 그렇게 보이나?”
“최소한 저 불곰 같은 놈보다야 높게 보인다.”
순간 채원의 얼굴에 핏대가 섰다.
“뭐, 불곰? 네놈은 내가 들고 있는 검이 보이지 않느냐?”
“육신은 찰나의 순간, 굽히지 않는 충절은 영원한 것이지.”
문극겸의 말에 채원은 인상을 찡그렸다.
“뭐라는 거야? 내가 이래서 갓을 쓴 문신 놈들이 싫다는 거야!”
그렇게 채원은 씩씩거렸고 이의방은 문극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내가 이 거사의 주동자다!”
“이놈! 하늘이 두렵지 않으냐? 백성에게 부끄럽지도 않으냐! 어찌 네놈들은 황상 폐하가 내리신 검으로 이 사직을 이렇게 어지럽힌단 말이냐!”
그 순간 옆에 있던 채원이 문극겸을 향해 다시 발길질을 하고, 옆으로 쓰러진 문극겸을 지근지근 밟았다.퍽퍽퍽!
“으악!”
“너같이 입만 산 놈은 죽어야 해!”
채원은 그렇게 문극겸을 모질게 구타했다.
“그만하시게.”
“뭘 그만해! 이런 놈은 죽이기 전에 아예 죽고 싶다고 애원할 정도로 매질을 해야 한다고.”
“그만하시라고 했네!”
이의방이 처음으로 채원에게 소리를 지르자 순간 황궁 공터는 찬물을 뿌린 듯 싸늘하게 변했다. 놀란 채원은 이의방을 노려봤다.
채원의 부하들은 명령만 떨어지면 검을 뽑을 기세로 이의방과 그의 견룡군을 노려봤다. 그리고 이의방의 부하들인 견룡군도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이 순간 이의방과 채원이 싸우게 된다면 상대적으로 부하들이 약한 자신이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채원이었다.
“왜 그렇게 역정을 내시나?”
“사람은 말일세,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네. 왜 우리가 거사를 하게 됐는지 생각을 해보게. 성심을 흐리게 한 난신적자들을 처단하는 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모진 괄시와 천대를 이기지 못해 일어선 것이 아닌가.”
이의방의 말에 채원은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돌렸다.
“알았네, 알았어.”
그리고 이의방은 다시 문극겸을 봤다.
“그래, 좋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하고 죽어라.”
“오냐! 황상 폐하께오서 신하들의 바른말을 좇지 않는다고 해서, 검을 들고 이런 만행을 저지른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은 훗날 후인들이 심판할 것이다. 역사는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문극겸의 말에 이의방은 그를 뚫어지게 보다가 나를 한 번 잠시 봤다. 나는 그를 살려야 한다는 눈치를 이의방에게 보냈다.그러자 이의방은 문극겸을 보며 물었다.
“너의 이름이 뭐지?”
“내 이름을 알아서 뭘 하려는 것이냐?”
“비록 검은 들지 않았지만 그 기개가 고려 무인이다.”
이의방의 말에 문극겸은 그를 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문극겸이다.”
“문극겸?”
그 때 이의방의 머릿속에 예전 일이 스쳐 지나갔다.
“지난해 황상께 환관들과 무비의 극악무도한 죄를 물으라고 간언한 것이 그댄가?”
“그것이 지금 이 마당에 무슨 상관이 있느냐?”
“살고 싶으면 살고 싶다고 해라. 내 너의 기개를 봐서 살려줄 수도 있다. 너 정도면 살려줄 용의가 있다.”
“닥쳐라! 내 오늘 살아서 훗날 죽은 문신들의 얼굴을 어떻게 보겠는가? 그리고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로, 비굴하게 반역 도당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는 않다.”
살려 주겠다는데도 정말로 죽으려고 작정을 한 것처럼 문극겸은 단호했다.나는 어쩔 수 없이 단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힐끗 이의방을 봤다. 그러자 이의방은 살짝 뒤로 물러나줬다.나는 허리를 숙여 문극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렇게 도도하게 죽으시면 이 사직을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내 말에 문극겸은 나를 빤히 봤다.
“좀 비겁하다고 스스로 생각지 않나요?”
“뭐라고 했느냐?”
“부처가 그랬잖아요. 지옥이 거기에 있어서 내가 간다고.”
“으음.”
“비겁하게 놀지 마세요.”
난 그렇게 말하고 문극겸을 보며 씩 웃은 후 숙였던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다시 이의방을 보며 말했다.
“이런 자는 그냥 죽일 수 없습니다. 제가 이놈을 옥에 가두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이래서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는 말이 있는 거다.내 말에 이의방은 바로 허락을 했고, 문극겸은 나를 뚫어지게 보다가 왔던 것처럼 장졸들에게 개 끌려가듯 끌려갔다.
‘그럼 1단계는 성공인가?’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뭔가 놓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옥새를 깜박했네. 그것도 챙겨볼까?’나는 급히 인상을 찡그렸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그러자 이의방이 나를 봤다.
“왜 그런 것이냐?”
“장이 꼬였나 봅니다. 저 변소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아직 위험하다.”
“제, 제 몸 하나 건사할 정도는 됩니다.”
나는 이의방에게 보란 듯이 배를 움켜쥐고 다급하게 말했다.
“싸, 쌀 것 같습니다.”
“그래, 알았다.”
이의방은 문신들의 목이 잘려 피가 낭자한 이 상황에서, 겨우 똥이 마려워 이렇게 안달을 하는 내 모습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허락을 했다. 싸고 싶다는데 말릴 사람은 없는 거다.
이의방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난 종종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물론 내가 가는 곳은 대전 뒷마당이었다.
‘손에 묻은 흙으로 봐서 분명 대전 뒷마당이야!’난 그렇게 짐작하며 대전을 향해 뛰었다.중간에 이소응과 노장군들이 이의방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보고 나는 급하게 서서 허리를 굽혔다.
“가만!”
“예, 이소응 대장군!”
난 머리에 쓰여있는 이름을 보고 나를 부른 자가 이소응이라는 것을 알았다.
“너는 이의방 행수와 같이 있던 병사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대장군!”
“듣자니 네가 이번 거사의 책사로 이것저것 이 행수를 많이 도왔다고?”
이소응의 말에 나는 다급하게 도리질하며 대답했다.
“어린 제가 무슨 재주가 있어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냥 처조카가 혹시 이 거사에 실수로 화를 당할까 해서 이 행수가 옆에 둔 것입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너는 죽다가 살아났다지, 아마?”
이소응은 내가 깃발을 들고 어가 행렬 제일 앞에 서서 가다가 쓰러진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갔던 곳이 극락이더냐? 지옥이더냐?”
“예?”
난 이소응의 말뜻을 몰라 그를 빤히 봤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이소응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이건 내 능력이 게임처럼 업그레이드가 된 증거일 거다.이소응!그는 고려 중기의 무신이다.
무신들이 극도로 천대받고 있는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 반란을 일으켜 문신들을 죽이고 왕을 폐위시켜 무신정권을 세웠다.간략하게 정보가 뜨는 것으로 봐서 역사에도 그리 많은 족적을 남긴 위인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대장군이라고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채원만큼 영 꼴 보기 싫었다.
그리고 그는 아마 우리 역사상 거의 최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정치 군인일 것이다. 군인이 정치를 하면 나라를 망치는 법이고, 그런 면에서 이소응은 그 시초가 되는 존재였다.
무신정권이 성립된 후, 그는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되고, 이어서 참지정사에 올랐다. 그러나 봉록(俸祿)과 지위에 대한 미련 때문에 나이 일흔이 넘어서까지 벼슬을 버리지 못하였다는 비난을 들었다.‘벽에 똥칠을 할 때까지 세금 도둑질을 했네.’역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번 자리를 차고앉으면 쉽게 내놓는 자는 없는 듯하다.
‘그러니 칼 맞아 죽고 총 맞아 죽지.’그러고 보니 1세기에 걸친 무신정권에서 편히 천명(天命)을 다하고 죽은 자는 몇 되지 않았다. 이의방과 함께 정권을 잡았던 이고는 목이 잘려 저잣거리에 효수되었고, 채원 역시 그 운명을 같이했다.
그리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이의방도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에 의해 암살되었다.정중부도 명종 이전으로 복귀하겠다는 슬로건을 가슴에 팍 꽂은 경대승에 의해 제거가 되니 처음 무신정변을 일으킨 3인 중에 편히 다리 뻗고 죽은 자는 없었다.
그다음이 경대승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절한다.
그다음은 이의민인데, 이의민 역시 최충헌에 의해 제거됐다. 결국 최씨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편히 죽은 자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최씨 정권에서도 최충헌과 최우만이 편하게 다리 뻗고 죽었고 나머지 인물들은 편히 죽지 못했다. 그리고 최충헌의 가복인 김인준 역시 파란만장하게 살다가 어이없는 죽임을 당했다.그러니 내가 항상 생각하는 대로 권불십년인 것이다.
이소응이 나에게 다시 물었다.
“넌 어디에 다녀온 것이냐?”
지금 이소응은 거사가 거의 성공한 것이 기꺼워 어린 내게 농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이소응은 속이 좁은 위인인 듯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모르겠지. 그런데 이제 극락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하하하!”
“예?”
난 말귀를 못 알아먹는 척했다. 무신정변을 일으켰을 때의 초심은 3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변질된 것 같았다.
“이제 두고 보면 안다. 하하하!”
“예, 대장군!”
“어디를 급히 가는 것이냐?”
“그게…….”
난 똥 냄새가 진동하는 것같이 썩은 이소응을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게 뭐?”
“그게 그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