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2권 -- >
“그렇다네.”
“그럼 그 늙은이가 딴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황궁이 장악되면 그도 어쩔 수 없을 것이야.”
“그렇게 되는 건가?”
“가세, 이제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나.”
이의방은 그렇게 말하고 복도에 서있는 견룡군 대정 군관을 봤다.대정!대정은 고려 시대 종구품의 최하급 군관(軍官)으로, 2군 6위에 각 40명, 의장부에 열 명, 견예부에 네 명, 도부외와 충용사위까지 합쳐 174명이 배속되어 있다.
“너는 너의 수하들과 이곳을 단단히 호위해야 할 것이다.”
“예, 행수 어른!”
“누구도 이곳에 들어서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의방은 그렇게 말하며 힐끗 채원을 봤다. 그리고 이의방에게 지시를 받은 대정 군관은 이의방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아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을 따르겠나이다.”
이의방은 다시 채원을 봤다.
“가세! 마무리를 해야지.”
그렇게 이의방은 밖으로 나갔고 채원은 한발 늦었다는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아쉽게도 꼭 닫힌 태후의 처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4장 각자가 꿈꾸는 동상이몽!같은 시간 정중부는 태자와 독대하고 있었다.
태자는 상장군 정중부를 노려보고 있었고, 상장군 정중부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태자를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견룡행수가 모반을 했다고 했나?”
“거사이옵니다.”
“거사?”
태자는 상장군 정중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러하옵니다.”
“좋다, 거사라고 치자! 그런데 왜 내게 온 것이냐?”
“태자 전하를 모시기 위함입니다.”
“나를 앞에 세우려는 것은 아니고?”
태자는 정중부를 노려봤다.
“그런 마음은 절대 품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그대와 할 말이 없네.”
태자는 돌아섰다. 그 순간 정중부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지금 이 순간 저를 믿지 않으시면 다음 보위가 태자마마의 것이 되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것은 정중부가 태자에게 하는 충격 요법일 것이다.
“뭐라? 뭐라고 했느냐?”
“저를 믿으셔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옵니다.”
“그대를 믿어라? 황궁이 불타고 있고, 황상 폐하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데도 그대만 믿어라?”
“그러하옵니다, 태자 저하!”
“어이가 없군! 나는 그대를 믿지 못하겠다.”
“만약 황상 폐하가 폐위되신다면 태자마마께서도…….”
“그 입 닥치라!”
태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오나 저의 말씀을 들어주셔야 하옵니다.”
“그대의 말을 들으면 내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인가?”
“소신이 반드시 지켜내겠습니다.”
“그래, 들어보기나 하자.”
“소신에게 금군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옵소서!”
“금군을 지휘하게 해달라?”
“그러하옵니다. 또한 황제 폐하께서 없으시니 제가 이 황궁을 안정시킬 것을 명해 주십시오.”
“왜, 그대들의 모반에 금군이 걸리는 것이냐?”
“이미 대세는 기울었습니다.”
정중부는 태자를 뚫어지게 말했다.
“그래서 나보고 그대의 꼭두각시가 되라는 건가?”
“보위를 지키시라는 말씀이옵니다.”
정중부의 말에 태자는 한참이나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으음.”
“어서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으음.”
“태자마마!”
“알았다.”
“그럼 옥새는 어디에 있사옵니까?”
“옥새야 당연히 대전에 있지.”
이 순간 정중부는 속으로 태자의 어리석음에 한탄했다. 그리고 자신이 태자를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러하옵니까?”
“그래, 누가 감히 옥새를 건든단 말이냐?”
“하오나 이런 유사시에는…….”
“그럼 가지고 오면 그만이야!”
정중부는 속으로 자신에게 욕을 했다.‘이래서 늙으면 눈이 침침해져서 사람을 잘못 보는 것이야! 으음…….’
“알겠나이다.”
“그래, 나는 그대만 믿는다.”
태자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정중부는 이곳에서 더는 볼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조심히 물러났다.한마디로 닭 쫓던 개 꼴이 된 정중부였다.이의방이 공예태후의 침소에서 나왔을 때, 한 무리의 금군이 공예태후를 보위하기 위해 태후의 처소로 달려왔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저기 반란군들이 있다!”
금군을 지휘하는 중랑장이 이의방과 채원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이 순간 공예태후의 명을 받은 이의방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무엇이라고 했나?”
“네 이놈, 의방아! 썩 내려와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저런 아둔한 머리로 어떻게 중랑장까지 올라갔는지 나는 의아하기까지 했다.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은 너희들이다.”
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린놈이 감히!”
“우리는 공예 태후마마의 뜻을 받들어 어지러운 조정을 쇄신하기 위해 일어선 것이다.”
그러자 중랑장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 때 벌컥, 소리를 내며 공예태후가 밖으로 나왔다.
“왜 이리 늦는 것이야?”
공예태후는 중랑장을 보며 말했다.
“송구하나이다. 제가 곧 저 반역 도당을 모두 척살하겠나이다.”
“누가 반역 도당이라는 것이야? 견룡행수는 나의 명을 받아서 이 혼란한 황궁을 안정시킬 것이다.”
공예태후의 말에 금군의 중랑장은 순간 당황했다. 만약 이 순간 공예태후가 처소에서 했던 말과 다르게 말을 바꾼다면 또다시 피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공예태후는 말을 바꾸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이의방의 군사와 금군의 군사가 대등하기 때문일 거다.
‘늙으면 모험을 하지 않는 법이지.’난 힐끗 공예태후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태, 태후마마!”
“너희들은 견룡행수를 따라 이 황궁을 빠르게 안정시켜라.”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났다. 황궁은 불탔고 거사는 성공을 거둔 것이다.
공예태후를 보며 역시 늙으면 그냥 죽는 법이 없다는 것을 나는 다시 한 번 알게 됐다. 그녀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의방과 채원을 보며 이제 그들이 곧 논공행상으로 서로 으르렁거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렇게 무신정변은 성공을 거두었다.
지금 드디어 무신정권이 열리는 새벽이 온 것이다.하지만 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이제 이의방과 슬슬 거리를 둬야 한다는 점이다.
‘권불십년이라고 했어, 권불십년!’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이의방을 멀리한다고 해서 이의방이 나를 놓아줄 것 같지는 않았다.그러나 나는 어떻게든 이의방의 품에서 벗어날 것이다.
어떠한 핑계를 만들어서라도.‘아파 죽겠다는데 뭐라고 하지 못하겠지.’나는 앞으로 6개월 정도 지난 후에 와병을 핑계로 이의방으로부터 멀어질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그동안 내가 평생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의 재물을 모으겠다고 다짐했다.‘권력은 위험하다.
목숨을 내놓아야 할 만큼.’이의방이 실권할 때 절대 같이 죽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이래서 미래를 안다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다.
피를 부르는 새벽은 끝이 났고 황궁을 장악한 무신들은 아직까지 살아남은 문신들을 색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그리고 그 일의 중심에 채원과 이고가 있었다.
이들은 이의방과 같이 무신정변의 핵심 인물이지만 가슴속에 품은 뜻이 다른 듯했다.채원은 자신의 부하 중 하나인 박철우라는 교위의 말을 듣고 황급하게 공예태후의 처소로 달려갔지만, 이의방 때문에 한발 늦게 되었다.
그래서 그 분을 문신들에게 풀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검은 피를 뿌리는 살인검으로 변해있었다.또한 이고는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채원보다 더 악랄하게 문신들과 환관들을 죽여나갔다.
무슨 영문인지 이고는 특히 환관들을 더 모질게 대했다. 이의방은 그런 모습을 보고도 그의 사연을 아는지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 때, 군사들이 문신의 관을 쓴 중년의 문신 하나를 마치 개나 돼지를 대하듯 끌고 와서 채원 앞에 무릎을 꿇렸다.
“이놈은 뭐냐?”
채원은 마치 야차의 눈으로 장졸을 보며 물었다.
“내가 문신의 관을 쓴 놈은 보는 족족 죽이라고 했잖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 왜 여기까지 데리고 와?”
채원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이것만 봐도 채원은 이고처럼 성정이 무척이나 급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에게까지 송악산 성난 불곰이라고 불릴 정도였다.먹는 것이 다른 이들의 수배가 넘었고, 그래서인지 힘도 다른 자들보다 곱은 세서 팔씨름을 할 때 지는 경우가 없었다.
“죽기 전에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데리고 오기는 했는데 눈빛이 남다른 것이…….”
다시 말해 장졸은 지금 무릎을 꿇고 있는 문신의 눈빛에 겁을 먹어 그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였다. 난 이의방의 옆에 서서 무릎을 꿇고 있는 문신을 봤다.
내가 얼굴을 확인하자 반투명으로 이름이 그의 머리 위에 둥둥 떴다.‘문극겸?’난 그의 이름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문극겸에 대한 정보가 순식간에 떠올랐다.문극겸은 고려 시대 의종, 명종 때의 문신이다.
우승선어사중승으로 많은 문신들을 화에서 구하고 무신들의 고사 자문에 응했다.‘무신들과 교류할 수 있는 인물이네.’문극겸의 정보를 확인한 나는 이의방의 옆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나의 대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용호대장군, 상장군을 겸임하게 된다. 훗날 이의방의 눈에 들어서 발탁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문무 겸직의 시초가 되었다.본관은 남평이고 자는 덕병, 시호는 충숙이다.
병부상서 문공유의 아들이고 큰아버지 문공인의 음보로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이 되었다.‘음보로 벼슬을 했어? 그럼 낙하산이잖아.’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세상 사는 것이 다 그렇지만 난 유독 낙하산에 두드러기 증상이 생긴다.그건 어쩌면 내가 굶어 죽기 전, 어디어디 방송국 예술대학 출신이네! 또 누구누구의 친구네 하는 것들 때문에 내가 번번이 드라마 공모전에서 떨어졌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나의 구차한 변명이라는 것을 요즘에서야 알게 되었다. 아마 그들은 나보다 글을 더 잘 쓸 것이다. 하지만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글을 써야 했던 나는 누군가를 미워해야 살아갈 힘이 생겼었다.
하여튼 나는 그렇게 낙하산 출신들을 싫어한다. 그러나 문극겸은 예외로 두기로 했다.내가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를 이의방의 옆에 붙여줘야 하니, 무인들과 교류를 했던 문극겸이 나의 대타로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의방의 책사 비슷한 것으로 맞춤이야!’이래서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그런데 내가 추천을 해서 이의방과 사돈까지 되는 게 아닐까?’그런 생각이 들자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건 아주 먼 훗날의 일이다.
그는 나를 위해서 이의방의 측근이 되어야 하는 인물인 것이다.‘당신으로 정했어.’난 문극겸을 보며 씩 웃었다.
그는 생각보다 성정이 대쪽 같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가 실록 편찬의 책임을 지게 된 후 의종이 살해된 사실을 거짓 없이 기술한 것으로 봐서 마냥 이의방에게 휘둘릴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일로 문극겸은 아주 약간 곤욕을 치르게 되고 무신들의 반발까지 사게 된다. 그래서 실록은 최세보에 의해 재집필이 되지만, 그것은 승리자들의 변명을 들어주는 사설밖에 되지 않는 거였다.하여튼 그는 이의방을 만나서 한 세월 문신으로 잘 먹고 잘 산 인물이었다.
난 이의방의 옆에 서서 그를 보았다.
“제법 눈빛이 살아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
내가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의방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