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웅-26화 (26/620)

< -- 간웅 2권 -- >마음만 고쳐먹으면 이 몸은 내 기억과 영혼을 담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런 껍데기의 근본을 알기 위해 내가 지금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무비와 김돈중은 알 만한 신분이다. 그럼 뭔가 있는 거야!’난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몇 보 이상 걸음을 떼지 못했다.

검을 들고 있는 앙칼진 백화수검대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나는 더는 못 나가겠다는 눈빛을 이의방에게 보냈다.

그 때, 내 얼굴을 보고 무비가 소스라치게 놀랐다.‘왜 저렇게 놀라지?’견룡군의 장졸들과 야차 같은 이의방, 이고를 보고도 당당하기만 했던 무비다. 그런데 앞으로 나선 나를 보고 놀라다니? 무비가 수상하다.

‘정말 뭔가 있는 건가?’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의방은 백화수검대를 노려보며 말했다.

“검을 내려놓지 않으면 모두 척살할 것이야!”

이의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백화수검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고쳐 잡고 이의방을 노려봤다.

“안 되겠군! 모두 베어라!”

이의방의 명령과 함께 대정의 직위를 가진 군관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와 동시에 견룡군 장졸들이 백화수검대를 포위했다.

쉬웅!바람을 가르는 이름 모를 대정 군관의 검이 백화수검대를 향해 뿌려졌다. 아무리 앙칼진 여자들이라고 해도 병졸과는 다른 대정 군관의 검을 피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순간 검을 피하지 못한 백화수검대의 계집 무사 하나가 어깨에 검을 맞고 쓰러졌다.

“으윽!”

비명 소리와 함께 여자의 피가 대전에 뿌려졌다.

“어서 칼을 버리지 못할까!”

이의방이 소리를 질렀다.아마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이대로 끝까지 저항하면 백화수검대는 모두 도륙당할 판이었다.그 순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무비가 앞으로 나섰다.

“모두 다 검을 내려놔라!”

그 순간 백화수검대는 무비를 봤다.

“하오나 저들이 무비 마마를 해할 수도 있습니다.”

계집 무사 하나가 무비에게 말을 했다.

“너희들을 다 죽인 후에도 나를 해할 수 있다.”

“하오나…….”

“괜찮다, 쉽게 나를 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서 검을 내려놔라!”

무비의 명령에 하나둘 검을 내려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저 앙칼진 년들을 포박해라!”

이의방의 말에 백화수검대를 향해 장졸들이 달려 나갔다. 나는 백화수검대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정말 충성심 하나는 타고났네. 그리고 미모도 대단하고 말이야.’내 눈에 비친 백화수검대는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붉은 장미 같았다.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의방이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어서!”

“예.”

이제 정말 내가 무비의 몸을 뒤질 차례다.난 홀로 서있는 무비를 향해 성큼 걸어 나갔다.

무비는 떨리는 눈빛으로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그녀의 눈빛은 마치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어 돌아온 것을 보기라도 하는 듯 떨리고 있었다.

‘뭐야? 저 눈빛은!’난 무비의 눈빛을 보며 정말 김돈중이 내게 한 말처럼 이 몸을 둘러싼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저 눈빛 때문이라도 살려야 한다!’난 무비의 눈빛을 보면서 뭔가를 기대하고 싶었다.

그리고 난 주저 없이 의종의 애비(愛妃)인 무비의 몸을 뒤졌다.정말 뭉클한 것이 생각 이상으로 잘 다듬어진 몸이었다.

물론 옥새를 찾기 위해 뒤진 건 아니다. 이미 난 무비의 몸에 옥새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로 무비의 귀에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살고 싶으면 입 꼭 다물고 있어.”

순간 내 작은 소리에 놀라 무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라고?”

“옥새가 곧 네 목숨이다. 살고 싶으면 입 꼭 다물고 있으라고.”

난 그렇게 속삭이고 돌아섰다.

“없습니다.”

내 말에 이의방이 인상을 찡그렸다.

“없다고?”

“그렇습니다.”

“그럼 왜 무비가 이 대전에 온 것이냐?”

“이곳이 가장 안전할 거라고 생각해서 온 것 같습니다.”

“그럼 옥새는 대전 안에 있다는 거겠군.”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니면?”

“태후나 태자가 가지고 갔을 수도 있습니다.”

내 말에 이의방은 인상을 찡그렸다.

“가서 대전을 뒤져라!”

이의방의 명령에 대정 군관이 장졸을 이끌고 무엄하게 대전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무비는 나를 봤다.

정말 뭘 의미하는지 모를 눈빛을 하고서. 그리고 이고는 무비를 죽이지 못해 여전히 안달이 난 눈으로 무비만을 노려보고 있었다.나는 이의방의 눈빛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무비를 보는 눈빛이 다른 이들과 사뭇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다.

‘저건 사내의 눈빛이야!’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짐작한 순간 이곳에서 무비가 살아날 확률이 더 늘었다는 것을 느꼈다.

“옥새만 찾아내면 네년을 찢어 죽일 것이다!”

그동안 노려보기만 하고 분노를 참아내고 있던 이고가 무비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지금 이고가 참고 있는 것은 이의방 때문이고, 또 옥새 때문일 것이다.

“너는 절대 나를 못 죽여! 아니, 넌 내가 하는 일을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어, 그때처럼!”

무비는 이고를 보며 당당히 말했다.

“이년이!”

“무엄하다. 겨우 행수 주제에 어찌 이리도 무엄한 것이냐?”

무비는 이렇게 위급한 순간에도 이고를 꾸짖었다. 여걸의 모습이다.이고는 이의방을 보며 말했다.

“내게 저년을 내어주게.”

“개인적인 원한을 풀 때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자네도 자네의 누이가…….”

“그만하시게.”

이의방은 다부지게 이고의 말을 끊었다.

“으음.”

이고는 이의방을 노려보며 신음을 했다.그 때, 대전으로 들어섰던 대정과 장졸들이 이의방에게 달려왔다.

“누가 대전을 뒤진 것 같습니다.”

“옥새는 어떻게 되었느냐?”

이의방의 물음에 난 속으로 피식 웃었다.‘당연히 무비가 숨겼겠지.’

“옥새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젠장!”

이의방은 무비를 노려봤다.

“옥새는 어디에 있소?”

“그것을 어찌 내게 묻는가?”

“그대의 목숨을 구명할 것은 그 옥새뿐이오.”

“그렇지, 내 목숨을 구할 것이 옥새뿐이니 쉬이 말해 줄 수는 없지.”

이의방은 무비를 노려봤다. 무비가 자신이 옥새를 숨겼다는 투로 말을 했기 때문에 이의방은 무비를 죽일 수도 없었다.

“젠장!”

이의방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대정 군관을 보며 소리쳤다.

“무비를 대전에 가둬라!”

“예, 행수!”

그렇게 무비는 대전에 감금이 됐다.이로써 무비는 목숨을 구한 것이다. 이의방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무비의 말을 들어보면 무비가 옥새를 숨기고 있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면 이제 공예태후를 손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공예태후?”

“그렇습니다. 정중부가 태자께 달려갔으니 행수님께서는 공예 태후마마를 손아귀에 넣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후일을 도모하는 데 편하실 겁니다.”

“그래도 태자가 더 좋지 않을까?”

이의방은 나를 보며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이러니 스스로 황제가 될 생각도 못 하는 거다.

지금 뒤늦게 태자를 확보하기 위해 간다면 먼저 그곳으로 향한 정중부와 칼부림을 해야 할 것이다.이 상황에서 노장군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이의방은 거사를 성공시키고도 죽을 쒀서 개 주는 꼴이 된다.

‘이러니 답답해서 나한테 의지하는 거야!’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닙니다, 공예태후입니다. 행수님의 손에 옥새를 쥐진 못했지만 분명 무비는 옥새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옥새를 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다름이 없다?”

“그렇습니다. 무비는 살기 위해 행수님을 방패막이로 삼으려는 겁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옥새를 가지고 담판하려 할 겁니다.”

“그렇지, 맞아!”

“그러니 이제 공예태후에게 달려가서 담판을 지으셔야 합니다.”

“내가 공예 태후마마와 담판을 지어야 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정중부가 먼저 손을 쓰기 전에 하셔야 합니다.”

“공예태후를 내 쪽으로 끌어들인다?”

“그렇습니다. 공예태후 입장에서는 누가 세력을 잡든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아들이 황제가 된다면 말입니다.”

순간 이의방은 내 말에 놀랐고, 주변에 있는 군졸들 역시 경악하는 눈빛이었다. 어린 나에게서 이런 혜안이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지, 지금 뭐라고 했나?”

“정해진 수순입니다. 그러니 이제 공예태후입니다.”

내 말에 이의방은 잠시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결심한 듯 나를 보며 흐뭇하게 말했다.

“회생, 너의 말이 옳다. 너는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다. 어서 가자!”

이의방은 그렇게 말하고 공예태후가 있는 처소로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무신정변이 성공의 끝을 향하고 있다.

무신정변이 성공한 후에 이제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의 싸움이다.‘그래, 역사처럼 이의방이 권력을 잡는 것이 내게도 좋겠지.’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내가 이의방을 돕고 있는 것이다.

무신정변이 끝이 나고 조정이 안정기에 접어들면 난 병을 핑계로 빠져나가면 된다.‘아프다고 골골하면 누가 잡겠어.’난 속으로 피식 웃었다.

공예태후의 처소.공예태후는 깊은 상념에 잠겨있고, 그 옆에 늙은 상궁이 침울한 표정으로 서있다.

“지금 무부들이 황궁에서 번을 서는 문신들을 참하고 도성 안에 있는 문신들까지 도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몸을 피하시는 것이…….”

“내가 이 제국의 태후다. 태후가 황궁을 버리고 어디로 피한단 말이냐!”

“하오나…….”

“기다리면 그들이 올 것이야!”

공예태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래서 산 세월이 녹록치 않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지금 숙직을 서는 문신들 몇이 죽고, 또 도성 내에 있는 문신들이 도륙을 당하는 건 공예태후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그들이 어떤 의미의 변란을 일으켰냐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만약 하늘을 바꾸고자 한다면 그것은 큰일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리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 누가 자신에게 달려올 것인가가 무엇보다 중대한 관심사다.

‘정중부가 오면 순간은 평안하겠지만 후일이 곤란해질 것이고, 다른 것들이 온다면 잠시의 치욕은 있을 것이나 후일을 도모하기 편할 것이야!’공예태후는 그렇게 생각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그 때, 처소 복도에서 다급하게 느껴지는 묵직한 발소리가 공예태후의 귀에 들렸다.

공예 태후는 지그시 감았던 눈을 떴다.

“아뢰어라!”

우렁찬 이의방의 목소리가 공예태후의 귀에 들렸다. 그 순간 공예태후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무장의 목소리에 누굴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난 표정으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젊은 무장의 목소리다. 이 급한 순간에 나를 찾은 걸 보면 녹록치 않은 놈이야!’공예태후는 다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뢰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의방은 더 크게 소리를 질렀고 겁에 질린 상궁이 떨리는 눈동자로 이의방을 보며 물었다.

“누, 누구라고 하오리까?”

“견룡행수 이의방이라고 아뢰어라.”

“뭘 그렇게 격식을 따지는가? 그냥 들어가면 되지.”

이고는 이의방을 보며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의방이 잘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의방과 나만 알고 있었다. 그의 행동을 통해 역천의 꿈이 없다는 것을 공예태후에게 간접적으로 알린 셈이다.

“태후마마! 견룡행수가 알현을 청하옵니다.”

“들라 해라!”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이의방은 이고와 나를 번갈아 봤다.

“자네는 황궁의 일을 마무리하게. 나는 회생이랑 들어가서 공예태후와 담판을 짓겠네.”

이고는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이의방에게 물었다.

“뭐라는 건가? 지금 나보고 뒤처리를 하라는 건가?”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네. 거사가 끝나고 나서 우리가 세상을 주도해야 하지 않겠나?”

“으음.”

뭐, 이의방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알았네.”

이고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이의방은 나랑 같이 공예태후의 처소로 들어갔다.이의방은 바로 공예태후의 앞에 무릎을 꿇었고, 나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이놈! 네가 이 변란을 주도한 놈이냐!”

공예태후가 앙칼진 목소리로 이의방을 꾸짖었다.

“그러하옵니다. 이번 거사는 저와 상장군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이 쓰러지는 고려를 다시 세우기 위해 행한 것이옵니다.”

이의방의 말에 공예태후는 겉으로는 시름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 보였다.‘역시 늙으면 그 성정이 녹록지 않아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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