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2권 -- >황궁 안이 환하게 일렁거리는 탈춤처럼 붉은 빛을 잔뜩 머금고 있다. 혁명군으로 변한 채원의 순검군들은 닥치는 대로 살육을 자행하고 있었다.
왜 이런 환란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궁녀들은 여기저기서 마주치는 칼과 창을 든 순검군을 피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지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아비규환이었다.
“수염 없는 것들은 모두 다 참해라!”
순검군 위의 직위를 가진 군관이 소리를 질렀다. 그때마다 죄 있는 목숨과 죄 없는 목숨이 죽어나갔다.순검군을 앞세운 채원이 닥치는 대로 문신들을 베고 있다.
“문신 놈들을 살려두지 마라!”
채원은 마치 혁명군의 수장처럼 명령을 내렸다.
“살려주시오, 채원 산원!”
그 때, 문신들이 채원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을 했다. 그러자 채원은 마치 살생부를 쥐고 있는 염라대왕처럼 거만한 표정으로 문신들을 내려다봤다.
“거드름을 피우며 우리 무인들을 개나 돼지처럼 보던 놈들이 이제 와서 목숨을 구걸해? 이런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
“그, 그것은 우리가 잘못했소. 채원 산원, 우리를 살려주시면 우리가 황제 폐하께 간청해서 채원 산원을 중랑장에 명해 달라고 직언하겠소.”
“중랑장?”
“그렇소, 채원 산원은 산원으로 있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물이오.”
문신의 말에 채원은 씩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문신들을 노려보며 조롱했다.
“그 뱀 같은 혀로 황상 폐하의 성총을 흐렸겠지. 그리고 중랑장? 겨우 중랑장? 대장군도 아니고 상장군도 아닌, 중랑장?”
채원은 문신들을 조롱하면서 검이 들린 팔을 힘껏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자신의 혀로 스스로를 구명하려던 문신의 목이 바닥에 덜렁 떨어졌다.
“간사한 유자 놈들!”
채원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그 때 부하 하나가 채원을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이러시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산원 나리.”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박 교위!”
채원의 옆에 있는 자는 박철우라는 교위였다. 순검군에서 제법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 채원이 항상 옆에 두는 자였는데, 달리 보면 채원의 책사와 같은 인물이기도 했다.
“공예 태후마마를 모셔야 합니다.”
“공예 태후마마를 모셔?”
“그렇습니다. 그래야 후일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박철우 교위가 머리가 있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채원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태로 계시다가는 이의방 행수의 다음이 될 뿐이옵니다.”
“내가 이의방의 다음?”
“그렇사옵니다. 거사는 같이할 수 있어도 권력은 나눌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
박철우 교위의 말에 채원은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이 지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 것이다.
“그렇군. 그래, 자네의 말이 맞네.”
“예, 어서 공예 태후전으로 가셔야 하옵니다.”
“옳다. 그래, 가자!”
그렇게 채원은 박철우 교위의 말을 받아들여 부하들을 이끌고 공예태후가 있는 궁궐로 뛰었다.이렇게 무인들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휩쓸고 지나가는 곳마다 황궁은 불타는 바다 같았다.
여기저기 화염이 치솟는 와중에 모두 다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같은 시간, 회생의 생각을 따르는 이의방과 이고는 견룡군 군사들을 이끌고 무비를 찾기 위해 무비의 처소로 난입했다.
무비의 처소를 지키는 병졸들은 이의방의 검을 보고 기겁을 하며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악독한 무비는 어디에 있느냐!”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이고가 앞으로 나섰다. 이것만 봐도 이고는 무비에게 좋은 감정이 없는 것 같았다.
이고의 눈빛도 차가우리만치 서늘했고.‘역사를 보면 의종이 무비의 배신으로 끝내 크게 신음을 했다고 했어. 그 여자가 어떤 배신을 했을까?’문뜩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이의방에게 시선이 갔다.‘이의방이지! 그래, 여기까지는 드라마하고 똑같구나!’드라마 속에는 픽션과 논픽션이 섞여있는 경우가 많다.
이의방의 눈빛을 통해 그가 아주 조금은 무비를 걱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마 그런 생각이 든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기억 때문일 것이다.
‘이래서 훗날 서로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나게 되는 것인가?’난 이의방과 이고가 싸웠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무비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이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곳에는 없습니다.”
목숨을 구걸하고자 하는 장졸들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없다?”
이의방이 장졸들을 보고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궁궐 안이 요란스러워졌을 때, 어디론가 바로 호위대를 이끌고 사라졌습니다.”
“호위대?”
이의방은 되물었다.
“거 왜, 있지 않나? 계집년들로 만든 호위대 말일세!”
장졸 대신에 이고가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계집들이 무슨 칼을 든단 말이야?”
“그래도 제법 앙칼진 것들이라네.”
“그래? 하여튼 어디로 갔단 말이냐?”
이의방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를 봤다. 마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라도 하듯.
“아마 옥새가 숨겨진 곳으로 갔을 겁니다.”
“옥새가 숨겨진 곳?”
“자신이 살 방법은 그게 전부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역시 무비는 영악하옵니다.”
“젠장!”
“그나저나 그렇게 되면 큰일 아닌가? 이 큰 궁궐 안에서 어떻게 무비를 찾나? 그리고 정중부나 채원의 부하들에게 발각이라도 되면 옥새를 빼앗기는 것은 시간문제야!”
이고의 말에 이의방은 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군! 어서 무비를 찾아야겠어.”
이의방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같은 시간, 무비는 자신이 만든 호위대를 거느리고 의종이 있던 대전으로 급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이곳은 황궁을 빠져나가는 길이 아닙니다.”
호위대가 무비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호위대의 수장인 백화는 아무 말도 없이 차분히 무비를 지켜볼 뿐이었다.
“아무것도 가지고 나가지 않는다면, 여기서 살아난다고 해도 곧 죽은 목숨이야!”
“예?”
“우린 대전으로 갈 것이다.”
“대전이라고요?”
“그래, 대전이다. 어서 길을 열어라!”
“예, 알겠습니다, 무비 마마!”
그렇게 무비의 친위대는 대전으로 길을 열었다. 그리고 무비를 향해 달려드는 장졸들이 나타날 때마다 거침없이 베어나갔다.정말 이고의 말처럼 앙칼진 계집년들이 칼을 잘도 휘둘렀다. 황궁을 수비하기 위해 뽑은 최정예 순검군들도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저년들을 죽여라!”
이십여 명의 순검군들이 무비와 그녀의 호위대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무비에게는 이 순간이 최대의 고비 같았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비를 호위하고 있는 열 명의 여무사들이 그들을 베어내며 길을 열었다.
“이얍!”
여무사가 앙칼진 기합 소리를 내뱉으며 손에 들린 검으로 장졸의 목을 베었다.
“으악!”
“뭐 저런 년들이 다 있냐?”
순검군들은 검을 들고 있는 계집을 보고 놀랐는데, 그녀들의 실력을 보고 다시 놀랐다.
“죽고 싶은 것들은 덤벼라!”
무비의 호위대가 앙칼지게 소리를 내질렀다.
“저, 저거 무비의 백화수검대야!”
순검군 장졸들 중에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뭐? 백화수검대!”
“그래, 맞아! 저기 뒤에 서계신 분이 무비다.”
이 외침 속에는 두려움이 묻어 나옴과 동시에 무비를 잡으면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엇을 하는 것이냐! 어서 길을 열어!”
무비는 다급했다. 저런 장졸들에게 시간을 빼앗길 여유가 없었다.
“예, 무비 마마!”
계집 무사는 바로 대답한 후 포위하고 있는 장졸들에게 달려 나갔다. 그와 동시에 무비의 백화수검대도 앙칼진 외침을 쏟아내며 장졸들을 죽이기 위해 달려 나갔다.쉬웅!계집이라고 해도 그녀들이 들고 있는 검은 날카롭고 예리했다. 십여 명의 백화수검대가 삼십여 명의 장졸들을 일시에 제거하는 순간이었다.
“길을 열었나이다. 어서 가십시오.”
“그래, 대전으로 가자!”
그렇게 무비는 목숨을 걸고 대전으로 향했다.지금 황족과 황제의 여자들 중, 가장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무비일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영악했고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여자였던 것이다.그리고 무비는 끝내 대전에 도착했다.
무비는 급하게 계단을 뛰어올라 대전으로 들어갔고, 백화수검대의 수장만이 무비를 호위하며 그녀를 따랐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지켜라!”
“예, 수장!”
무비는 대전으로 들어가자마자 고려 왕조의 옥새를 찾기 위해 도둑년처럼 대전을 뒤지고 다녔다.이곳저곳을 뒤지다가 한곳에 놓여있는 나전 칠기로 된 보함을 끝내 찾아낸 무비는 급하게 그 보함을 열었다.그 안에는 이의방과 정중부, 그리고 채원까지 찾고 있는 고려 왕조의 옥새가 들어있었다.
“찾았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옥새다.”
무비의 말에 백화수검대의 수장인 백화는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옥새라고요?”
“그래! 이것이 있어야 우리가 산다.”
무비는 그렇게 말한 후 옥새를 들고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황궁은 붉은 노을처럼 타오르고 있었고, 그것을 본 무비는 인상을 찡그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신의 품 안에 옥새를 숨기고 이 황궁을 빠져나가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안 되겠다.”
“예?”
“이렇게 나가다가는 끝내 잡히고 말 것이야!”
“그럼 어떻게 하옵니까?”
“할 수 없지. 백화, 너만 나를 따라라!”
무비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대전 뒤편으로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백화수검대의 수장인 백화만이 무비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여기를 파라!”
“땅을 파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파라!”
“예.”
그렇게 백화수검대의 수장인 백화가 급하게 검으로 땅을 팠고, 무비는 그런 백화를 한참이나 노려보고 있었다.‘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다.
’백화의 등을 노려보고 있던 무비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변하며 살기를 뿜어냈다.백화가 어느 정도 땅을 판 것을 확인한 무비는 품에서 조심스럽게 단도를 꺼내 열심히 땅을 파고 있는 백화의 등을 강하게 찔렀다.
수욱!
“으윽!”
그 순간 백화는 고통에 겨운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무비의 얼굴을 보았다. 무비가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마, 마마…….”
“너에게는 미안하구나.”
“마, 마마!”
“너는 나를 위해 죽기로 했다. 그러니 나를 위해 죽어다오.”
“저, 저는…….”
“이곳에 옥새가 묻혀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라야 한다.”
백화는 자신이 이렇게 버려졌다는 것이 분한 듯, 서글픈 표정으로 무비를 노려봤다.
“후, 후회하게 될 것이오.”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부터 살아야겠다.”
“모, 모, 모진 년!”
백화는 가물거리는 눈빛으로 무비를 노려보다가 끝내 정신을 잃었다. 무비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 이렇듯 무비는 치밀한 여자였다.털썩!무비는 안간힘을 쓰며 백화를 옆으로 치우고 나서 고려를 상징하는 옥새를 구덩이 안에 넣었다.그리고 급하게 흙을 덮고 돌아섰다.
“나만이 알아야 해! 그래야 살 수 있고 후일도 도모할 수 있어.”
회생이 생각하는 것처럼 옥새가 이 순간 얼마나 중요한지 무비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무비는 급하게 걸음을 옮겨 백화수검대가 있는 곳으로 갔다.
3장 무비를 만나다이미 백화수검대는 이의방이 이끄는 견룡군에 포위되어 있었다.‘저 여자가 무비인가?’앙칼진 눈매로 견룡군과 이의방 그리고 이고를 노려보고 있는 여자가 내 시야에도 들어왔다.
“모두 다 검을 버리지 못할까! 어찌 계집이 검을 잡고 있는 것이냐!”
이의방이 범처럼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백화수검대 중 누구 하나 검을 버리는 계집은 없었다. 역시 여자는 독한 구석이 있다.‘견룡군보다 칼질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세는 더 당당하다.’난 백화수검대를 보며 놀랐다.그 때 이의방이 무비를 향해 말했다.
“어디서 급하게 나오는 거요, 무비!”
“무비? 겨우 산원 따위가 내게 무비라는 망발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냐!”
역시 앙칼지다.무비는 이 위급한 순간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자신이 칼 앞에 비굴해지면 견룡군과 이의방이 자신을 쉽게 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나 이고는 당장이라도 무비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눈빛으로 무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악독한 년! 나라를 망친 년을 그냥 놔둘 줄 알았느냐!”
“나라를 망치고 있는 것은 너희들이지. 어디서 무부들이 변란을 일으키는 것이냐!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
무비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런가? 그럼 망친 나라를 다시 반듯하게 세우면 되는 것 아닌가?”
이의방의 말에 무비는 이의방을 노려봤다.‘이렇게 대립을 하면 안 되는데…….’난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무비를 봤다.
그런데 무비의 옷에 핏자국이 선명하게 묻어있었다.‘왜 핏자국이 묻어있지? 그리고 손에는 왜 흙이 묻어있는 거지?’그러다 번뜩 뭔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무비가 나타난 곳을 찬찬히 훑었다.‘어쩌면 저 뒤편에 있을 것이다!’무비가 영악하게 옥새를 숨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스스로 살 길을 여는구나!’난 그런 생각을 하며 무비를 봤다.
“이곳에 온 게 모두 옥새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옥새는 어디에 있소?”
이의방이 다급했는지 무비에게 직접 물었다.
“그것을 내 어찌 알겠는가?”
“모른다 하면 나는 돌아설 것이오. 그럼 이고가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점은 당신이 더 잘 알 것이오.”
이의방의 말에 난 다시 한 번 이고와 무비를 봤다. 내가 모르는 원한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 죽었다 깨어나도 옥새는 찾지 못할 것이야!”
그제야 무비는 자신의 살길을 도모하기 위해 협상에 들어갔다.정말 다시 생각해 봐도 영악한 계집이 분명하다.
“옥새가 어디에 있는지 알긴 아는 모양이군!”
이의방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옥새만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다면 이 고려가 반쯤은 자신의 수중에 들어온 거나 진배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을 주입한 건 바로 나다.
“알아도 모르고 몰라도 모른다.”
그 순간 이의방은 나를 보며 눈짓을 했다. 가장 어린 내가 무비의 몸을 뒤지라는 지시였다.
‘몸을 뒤져도 옥새는 없을 텐데…….’하지만 이 사실을 이의방에게 말해 주면 이의방은 무비를 죽일지도 모른다. 아니, 옥새를 손에 넣었으니 이고와 척을 지지 않기 위해 범의 아가리 같은 이고에게 무비를 내어줄지도 모른다.그럼 무비는 이고의 칼에 죽게 되는 거고, 난 끝내 무비를 구해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나는 이 몸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이 순간 정말 사람의 말은 검보다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김돈중! 개새끼!’그 순간 김돈중의 얼굴이 떠올랐다.
김돈중의 말 한마디가 어쩔 수 없이 나로 하여금 무비를 살리게 만들고 있는 거였다.‘젠장!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그냥 흘려보내도 되는 것인가?’난 순간 고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