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2권 -- >채원은 원하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같은 시간, 채원의 명령을 받은 장졸들은 존엄한 궁궐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보이는 족족 문신들을 베고 있었다. 환관들은 겁에 질려 숨기에 바빴다.
그 때 이의방과 정중부, 그리고 이고와 내가 당당히 황궁으로 진입했다.쫘아악!거칠고 급하게 궁궐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우리는 견룡군 장졸들과 함께 일제히 들이닥쳤다.
“문신의 관을 쓴 놈들은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내가 문신들을 다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이의방은 스스럼없이 문신들을 모두 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나는 그 명령을 듣고 얼굴을 강하게 찌푸렸다.
‘피를 갈망하는 야차 같다.’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의방의 명령을 받은 견룡군 장졸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궁궐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던 정중부가 이의방을 보며 말했다.
“나는 지금 바로 태자 전하를 모시러 가겠네.”
“예, 상장군!”
“그대는 이 궁궐을 장악하는 데 힘을 써주게.”
정중부는 한마디로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풀겠다는 심보인 것이다.지금 이 순간 누가 태자를 장악하고, 또 누가 옥새를 손에 넣느냐에 따라서 거사 후의 자리가 결정된다.
정중부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의방에게 말한 것이다.난 입이 간질거려 미칠 지경이었으나, 이의방에게 그 사실을 말한다면 바로 정중부와 척을 질 것 같아 꾹 참았다.
“예, 알겠습니다.”
이의방은 상장군인 정중부가 그렇게 말하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정중부는 바로 장졸들을 이끌고 태자궁으로 향했다.이의방은 그를 말리지 못하고 인상만 찡그리고 있다가 나를 보며 말했다.
“왜, 내가 멍청해 보이느냐?”
“예?”
“너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옵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를 저지할 명분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가?”
“그렇습니다. 우선은 누구보다 먼저 무비 마마를 손에 넣어야 합니다.”
“무비를?”
김돈중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순간 무비를 살릴 수 있는 자는 오직 이의방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때, 지금까지 말이 없던 이고가 나를 노려봤다.
“그 악독한 계집을 손에 넣고 무엇을 도모하려는 것이냐?”
“가만히 생각을 해보십시오.”
“가만히 무엇을?”
“누가 옥새의 행방을 알겠사옵니까?”
“옥새?”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옥새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에게 추궁을 하실 것 같습니까? 상장군께서 마각을 드러내며 태자마마를 손아귀에 넣으러 가셨습니다.”
“그렇지, 드디어 상장군이 늙은 여우 짓을 시작했지.”
이의방이 인상을 찡그렸다.
“맞습니다. 상장군은 상장군 나름대로 후일을 도모하겠다는 것이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비를 손에 넣고, 옥새를 손아귀에 넣어야 합니다.”
어느새 나는 이의방의 책사 비슷한 것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렇구나! 너의 말이 옳다, 회생아!”
이의방은 어느 순간부터 친근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아마 정말 나를 처조카로 삼을 생각인 모양이다.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느낄 때 잘해준다. 물론 뒤통수를 치려고 일을 꾸밀 때도 마찬가지지만 지금 이의방은 분명 전자일 것이다.
“정중부가 태자마마에게 달려간 것은 태자마마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의도도 있지만 감언이설로 태자마마를 속여 옥새가 어디 있는지 알기 위함입니다.”
“그럴 것이다. 워낙 사람을 잘 속이는 위인이니…….”
“황제 폐하가 보현원에 감금되어 있는 현 상황에 옥새는 곧 황상 폐하이십니다.”
“옥새가 곧 황상 폐하라고?”
이의방이 나를 보며 물었다.
“누가 옥새를 들고 찍든 그것을 찍은 문서는 황상의 명령인 것입니다.”
“그렇구나!”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정중부가 태자마마에게 달려간 것입니다. 하지만 태자마마는 절대 정중부에게 옥새를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내 설명을 듣고 있던 이의방의 표정이 굳어졌다가 잠시 후 내 말이 옳다고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을 보였다.이렇게 반응하면 말하는 사람이 흥이 난다. 원래 말이라는 것이 듣는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니 말이다.
“태자도 바보가 아니니 거부하겠지.”
“그렇사옵니다. 행수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대의를 위한 거사이지만, 황실과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변란이니 태자는 분명 시간을 끌려 할 것입니다.”
“시간을 끈다?”
“그렇사옵니다. 시간을 끌면 거사를 한 우리가 불리해질 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러니 상장군께서는 이 밤에 얻는 것이 없을 것이옵니다.”
“상장군께서 얻을 것이 없다?”
“예, 만약 상장군의 생각대로 된다면 내일 해가 뜨기 전에 이 고려는 상장군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내 말에 이의방은 인상을 찡그렸다. 대의를 위한 거사였다고 외치지만 은연중에 거사 후의 이익도 얻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황상의 어머니가 되시는 공예태후도 절대 옥새를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목을 벨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우리가 무비에게 가는 이유는?”
“우리는 무비를 겁박할 수 있습니다. 그게 안 된다면 거래라도 할 수 있습니다.”
“거래?”
이의방은 내게 반문을 했고, 그 순간 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년이 우리랑 거래를 할 거라고 보느냐?”
이의방도 무비를 그년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무비는 무신들과 척을 많이 지고 있었다.
“비는 황제의 여자지 황족은 아니옵니다.”
오묘한 말이다.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듯도 하고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듯도 한.
“비는 황족이 아니다?”
“그렇사옵니다. 황족은 불변하는 존재이나, 비는 변하는 존재지요. 위급한 상황에선 어찌 될지 모르는 위치입니다.”
고금을 통틀어 권력자의 여자가 배신을 하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다. 나는 그것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리고 김돈중의 말 때문이라도 어떻게든 무비를 살려야 한다.그녀가 나, 아니 이 몸뚱이의 주인에 대해 뭔가 알고 있으니 그녀를 살려야만 한다. 참으로 대단한 일을 벌이기 위해 나는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었다.
“사람들 중에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난 무비를 살리기 위해 어쩌면 무비를 가장 위험한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는지도 몰랐다.
“겁박이 안 통한다면 거래를 해라?”
“그렇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옥새를 차지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건 그렇지.”
“예, 그렇습니다. 그다음이 공예 태후마마와의 담판이고, 또 그다음이 태자마마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무비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네 말이 옳다. 그래, 가자!”
“예.”
난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검을 뽑아 든 이의방이 마치 숲에서 나온 범처럼 무비의 처소로 성큼성큼 향했다.난 앞장을 선 이의방의 모습을 보고, 내 옆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이고도 보았다.
이 순간 나는 이고가 내게로 뿜어대는 살기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하지만 중요한 것은 김돈중이 비겁하게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서 나로 하여금 무비를 살리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거사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이 거사만 성공시키고 나서 뒤로 빠질 것이다, 뒤로!’난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권력과 부는 너희들이 가져라! 그래 봐야 권불십년이라고 했어. 난 그냥 안락을 가질 테니까.’나는 앞으로의 삶을 그리며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렇게까지 깊게 관여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내가 깊게 개입해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생각과 행동, 그리고 현실은 이리도 다른 법이다.‘역시 역사를 알고 있다는 것은 해가 되기보단 득이 되는 것이었어.’나는 피식 웃었다.
나와 이의방, 그리고 분을 삭이고 있는 이고는 장졸들을 이끌고 무비의 처소로 향했다.지금 이 순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제각기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정중부는 태자를 자신의 손에 넣고 후일을 도모할 생각을 하고 있고, 내 의견을 받아들인 이의방은 무비를 압박해서 옥새를 손에 넣으려 하고 있다.그리고 난 당연히 무비를 살리려고 움직이고 있다.
‘우선 어떻게든 살려낸다. 그다음에는…….’이 몸을 둘러싼 출생의 비밀이 무엇일지 갑자기 궁금함이 몰려왔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이 몸의 출생의 비밀에 목을 매는 거지?’그러고 보니 이 몸은 내 영혼과 기억이 들어있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이 몸뚱이가 어떤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든 결과적으로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어떤 것이든 내가 외면하면 그만이니.‘아니야! 무비가 알고, 김돈중이 알고 있는 출생의 비밀이라면 내게 도움이 될 거야.’나는 껍데기라고 할 수 있는 이 몸뚱이의 출생의 비밀까지 이용할 마음을 품었다.고려의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무비와 문신의 거두인 김돈중만이 알고 있는 내 출생의 비밀이라면 아마 엄청난 것일지도 모른다.
‘좋은 것이면 받아들이고 나쁜 것이면 버리면 그만이지.’난 달리며 그렇게 다짐했다.2장 표독한 무비순검군은 순식간에 혁명군으로 변해 황궁을 장악해 나갔다. 하지만 모두가 채원의 명령을 따라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졸이 궁밭에 난입하면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법이고, 비겁하고 더러운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지금이 기회야! 한몫 단단히 챙겨야지.”
장졸 하나가 옆에 있는 순검군들에게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지금은 시키는 일만 하는 것보다 우리를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이지.”
장졸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우리를 위해서 움직이자고?”
“그래, 황실 보고에 가면 그 안에 금은보화가 가득 있다고 하더군.”
“금은보화?”
“그래, 우리도 이번에 팔자 한번 고쳐보는 거야!”
장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다른 이들도 그제야 알겠다는 듯 비열하게 웃었다.
“좋은 생각이네!”
“그래, 황실 보고로 가는 거야!”
그렇게 한 무리의 장졸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황실 보고로 달려갔다.물론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많은 장졸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궁궐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보이는 족족 사람들을 죽이며 황실 보고로 달려갔다.하지만 그곳에는 이의방보다 더 대단한 무력을 가지고 있고, 또 무인의 본분을 아는 사람이 황실 보고를 지키고 있었다.
두경승!그가 지금 황실 보고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두경승은 큰 활을 들고 마치 불국사 입구에 서있는 사천왕처럼 문 앞에 서서 황실 보고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불타는 황궁을 보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결연하기만 했고, 오직 이 황실 보고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른 듯했다.조금 전 팔자 한번 고쳐보자던 장졸들이 황실 보고에 도착했다.
그 모습을 본 두경승은 살짝 눈썹을 찡그리더니 그들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퍼어억!순간 화살 한 발이 날아가 제일 먼저 황실 보고를 털자고 말했던 장졸의 가슴팍을 관통했다.
화살을 맞은 장졸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화살의 힘에 의해 뒤로 나가떨어졌다.이래서 천벌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누구든 이곳을 약탈하려는 놈이 있다면 이 두경승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팔자를 고치려고 했던 장졸들은 깜짝 놀라며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두경승을 봤다.두경승의 뒤에는 삼십여 명의 장졸들이 그의 명령을 기다리며 두경승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창을 고쳐 잡고 있었던 것이다.이래서 옳은 장수 밑에 사악한 장졸이 없고, 강한 장수 밑에 약졸이 없다는 말이 있는 듯했다.
“누구든 이곳을 넘어선다면 내 활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두경승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도 이곳을 넘어서는 자가 있으면 누구든지 베어라!”
“예, 나리!”
삼십여 명의 장졸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아마 이 궁궐 안에서 무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자들은 두경승과 그의 부하들뿐일 것이다.
두경승!그는 고려 시대의 무신이다. 김보당의 난을 평정한 후 반란 지구의 민심 수습에 진력했고,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키자 주변 도읍을 진압한 뒤 조위총을 죽였다.
타고난 무장으로, 용력이 이의민과 쌍벽을 이룬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무위를 가진 장수이다.학식은 없어도 무용이 출중하여 의종 때 공학군으로 뽑혔다가 대정으로 후덕전의 견룡이 되었다.
명종 초에 이의방에게 발탁되어 내순검지유를 거쳐 낭장이 된다.1173년 김보당의 난을 평정한 후 남로선유사로 반란 지구의 민심 수습에 진력하여 장군으로 승진, 서북면병마부사가 되었다.
하여튼 지금의 두경승은 이렇게 황실 보고를 지키고 있는 무인이었다.
“누구든 내 앞에서 부화뇌동하는 자는 용서치 않을 것이다.”
두경승은 다시 소리를 지르며 활시위를 당겼다.그 순간 팔자를 고치는 것도 좋지만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 더 급한 장졸들은 뒷걸음질을 쳤다.
“아, 아니옵니다. 저, 저희는 그냥…….”
“어서 썩 물러서라!”
“예, 산원 나리!”
“아, 아니옵니다. 저, 저희는 그냥…….”
“어서 썩 물러서라!”
“예, 산원 나리!”
그랬다. 지금 두경승의 직위는 채원과 같은 산원이었다. 그렇게 두경승은 끝내 그 환란 속에서도 황실 보고를 지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