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웅-20화 (20/620)

< -- 간웅 1권 -- >

“예! 그러셔야 해요.”

이의민은 내가 한 말 때문에 은연중에 혹시나 내가 자신의 아비가 다른 동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그리고 내게 신통력이 있다고 믿는지 내 말을 무시하지 못했다. 미신이라면 정말 뭐든 찰떡같이 믿는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냐?”

“그러셔야 하기 때문이니까요.”

“뭐라?”

이의민은 나를 노려봤다.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어젯밤에 한 이야기가 아직까지 잘 먹히고 있었다.

“지금 달려가신다고 해서 무엇을 더 얻으실 것 같습니까?”

“내가 무엇을 얻고자 거사에 동참한 거라고 생각하느냐?”

이의민의 말에 난 그를 보며 씩 웃었다.

“왜 나를 보고 웃는 것이냐?”

“침 바르세요.”

“뭐?”

“입술에 침 바르고 거짓말하시라고요.”

“나 참…….”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속내를 들켜버리니 저런 표정이지.

“그래, 좋다. 내가 남아야 할 이유를 자세하게 들어보자.”

“그러죠, 우선은 이의방 행수나 이고 행수, 그리고 정중부 상장군의 틈바구니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기 있는 것보다 많이 얻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니냐?”

“거사가 성공한 후, 한 5등 공신쯤 되면 현리는 되시겠네요.”

“현리?”

이의민은 인상을 찡그렸다.물론 현리가 낮은 직급은 아니다. 개경만 벗어나면 지방 수령이나 현리가 그 고을에서 황제처럼 힘없는 백성들에게 군림하며 권력을 휘두르니 백성들에겐 멀리 있는 황제보다 지방 수령이 더 무서운 존재였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가만히 의종 폐하를 지키면서 관망하십시오.”

“관망하라고?”

“그렇습니다. 아주 조금 시간이 지나면 장수님의 때가 올 것입니다.”

“나의 때가 온다고?”

그 순간 이의민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렇게 보입니다.”

“네게 그런 게 보인다고?”

“예, 보여요.”

미신을 믿는 자에게는 미신으로, 명분을 떠받드는 자에게는 명분을 주면 그만이었다.

“정말이냐?”

“그렇다니까요.”

난 씩 웃었고 그 웃음에 이의민은 고민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예, 그동안 의종 폐하와 친하게 지내보세요.”

내 말에 다시 한 번 이의민은 인상을 찡그리다가 입맛을 다셨지만 내가 한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어 보일 것이다.

“알았다, 그래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이렇게 난 이의민을 사전에 만났다. 그리고 점점 더 이들과 인연을 깊게 만들고 있었다.그리하여 이의민은 이의방의 명에 의해 보현원에 남게 되었다.난 정중부와 이고, 그리고 나를 이상할 만큼 존중해 주는 이의방과 함께 황도로 진격했다.

“전서구는 날렸겠지?”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던 정중부가 이의방을 보며 물었다.그러고 보니 지금 이 진격에는 병졸의 수와 장수, 그리고 장군 수의 차이가 별로 없어 보였다.

정중부를 중심으로 진준과 기탁성, 그리고 양숙 등의 노장군들이 말을 타고 황도로 향하고 있었다.이의방의 옆에는 자신의 속을 숨기고 있는 이고를 비롯한 젊은 장수들이 황도로 향하고 있었다.

이 두 세력은 평온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은연중에 서로를 경계하는 듯 보였다.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대장군과 장군들을 구군파라고 부른다면 이의방을 중심으로 모인 젊은 무장들은 신군파일 것이다.

그들은 같은 방향으로 거사를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노선은 분명 달랐다.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구군파가 다소 온건적인 거사를 생각하고 있다면, 이의방을 중심으로 한 신군파는 아예 이 고려를 뒤집으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문신들을 제거하고 의종을 폐위하고자 하는 것이 신군파의 입장이라면, 정중부의 구군파는 자신들이 하는 이 거사의 걸림돌이 될 문신들만 제거하고 의종과 함께 나아가고자 했다. 이것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정중부의 물음에 이의방이 고개를 돌려 상장군 정중부를 바라보았다.

“예, 보현원의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전서구를 날렸습니다.”

“그래, 잘했군!”

“지체할 시간이 없기에 바로 움직였사옵니다.”

“잘했네, 우리는 병력의 수가 적으니 어떻게든 황도 안에서 내응을 해 거사를 마무리해야 해.”

역시 정중부는 산 세월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치밀했다.그 때, 아무 말도 없던 기탁성이 이의방의 눈치를 보다가 지금 자신이 누구의 눈치를 보냐는 듯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피식 웃었다. 이래서 사람은 환경에 충실하다는 얘기가 있는 거다.기탁성은 잠시 피식 웃다가 차분한 표정으로 얼굴을 바꾸고 정중부를 봤다.

“김돈중, 그 쥐새끼가 시체들 틈에 없다고 합니다.”

“없다?”

지금까지 차분하게 마상에 앉아있던 정중부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그렇소, 상장군!”

기탁성의 말에 정중부는 다시 이의방을 봤다.

“어떻게 된 건가?”

“낌새를 눈치채고 미리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미리 빠져나가?”

“그렇습니다.”

“이런! 일이 안 좋게 되었군.”

정중부가 인상을 찡그렸다.

“김돈중을 놓치면 거사의 성공 확률은 희박하네.”

“그렇기 때문에 채원에게 전서구를 날린 것입니다.”

난 사실 이번 일도 이의방에게 몰래 이야기했다.김돈중이 빠져나갈 것이니 미리 황궁에서 내응하기로 한 채원에게 연락해, 절대 황도의 출입 성문에서 김돈중을 막아 황도 안으로 들여놓지 말게 하라고 단단히 지시해 둔 상태였다.

적재적소에 정확하게 핵심을 찌르는 내 의견을 듣고 이의방도 당연히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고, 그것을 통해 나를 점점 더 믿는 눈치였다.이런 믿음은 이의방이 그저 식견이 부족한 무장이 아닌, 부하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무장이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을 했다.

‘절대 어리석지 않아.’난 힐끗 이의방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전서구를 날리는 것으로 될 일이 아니야.”

정중부는 이의방의 조치를 듣고도 착잡한 마음을 숨기지 않는 듯 말했다. 이래서 늙으면 걱정이 많다는 소리를 듣는 모양이다.하지만 이것은 신중함에서 나오는 행동이 분명했다.

“김돈중이 황도 안으로 들어갈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채원의 부하들이 황도로 들어서는 성문마다 이미 지키고 서있을 것입니다.”

“사대문을 모두 다?”

“사대문이 아니라 이 거사만 성공시킬 수 있다면 지옥문이라도 지키라고 단단히 일러뒀습니다.”

“그런가? 그럼 다행이군.”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거침없이 말하던 이의방이 정중부의 눈치를 봤다.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는 정중부가 얼굴마담이 되는 이유가 이제 나올 차례이다.‘책임져야 할 사람은 있어야 하니까.’난 아무 말 없이 정중부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의 희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약간의 희생?”

“그렇습니다. 제가 전서구를 통해 채원에게 사대문을 지키는 수문장들이 반항을 하면 죽이라고 적었습니다.”

“아무리 대의명분이 충실하다고 해도 무장들끼리 죽고 죽이면…….”

“어쩔 수 없는 조치이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무인끼리 죽고 죽이자는 건가? 그렇게 하다가는 반감을 사는 법이네.”

정중부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쩔 수 없는 작은 희생이라고 생각해 주시옵소서.”

“하지만…….”

“지금 우리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면 구족이 멸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피를 흘리는 것보다 다른 이가 피를 흘리는 것이 더 이롭지 않겠습니까.”

“으음…….”

정중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내게 하는 이유가 뭔가?”

“상장군께서 마무리해 주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내가 마무리를?”

“그렇습니다. 그래도 일개 행수의 명령보다는 군을 이끄시는 상장군의 영이 더 높게 울리는 법이지 않습니까?”

“설마 자네……. 나의 영으로 전서구를 날린 것인가?”

“송구하옵니다.”

“으음!”

정중부는 다시 한 번 신음했다. 이제부터 모든 악행은 정중부의 명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누군가를 참살하는 일은 의종의 명으로 진행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혼란한 틈에도 이의방은 의종을 만난 거였다.그 때 가만히 듣고 있던 양숙 대장군이 이의방을 봤다.

“아무리 그렇게 단단히 일러뒀어도 처음부터 김돈중을 놓치지 말았어야 했어.”

“송구하옵니다, 대장군!”

이의방은 처음에는 머리를 숙였다.

“만에 하나라도 김돈중이 사대문을 넘어서 황궁으로 들어가 태자 전하께 우리의 거사를 알린다면 우리는 졸지에 반역 도당이 되는 것이야. 으음!”

이의방이 한 번 머리를 숙이자 양숙은 기고만장해서 더욱 설레발을 쳤다.

“지금 이 상태에서 진압군이 온다면 낭패가 아닙니까?”

지금까지 입도 뻥긋하지 않던 이소응 대장군이 양숙의 말에 힘을 얻어 이의방을 압박하려는 듯 말했다.이것만 봐도 신군파와 구군파는 대립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더욱 분명한 것은 대장군들이 일개 산원에 불과한 이의방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 우리는 다 죽은 것이지.”

정중부는 인상을 찡그리며 양숙에게 눈빛으로 그만하라는 신호를 줬다.하지만 정중부의 신호를 알아차릴 정도의 눈치가 있었다면 이의방에게 이렇게 무모하게 이죽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투항하면 목숨이라도 건질지 모르지.”

이소응의 말에 드디어 꾹꾹 누르고 있던 이의방의 분이 한숨에 폭발했다.

“투항이라니요! 투항을 하려고 보현원에서 칼을 뽑았습니까? 그리고 제가 장담을 드립니다. 김돈중은 절대 황도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이소응은 지지 않고 이의방을 노려봤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제가 당장 병력을 풀어서 김돈중 그 쥐새끼를 찾겠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구나!”

사실 며칠 전만 해도 이의방은 그저 행수에 불과한 존재였다.그에 반해 정중부를 비롯한 노장군들은 문신들에게 괄시를 받기는 했지만 무신들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였다.그런데 지금 그런 질서가 깨지고 있는 거였다.

“그만들 하시게. 지금 우리끼리 이럴 때가 아니네.”

정중부의 말에 모두 다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상장군!”

먼저 머리를 숙인 것은 대장군 이소응이었다.

“소장, 젊은 혈기에 대장군들에게 무례를 범했사옵니다.”

이의방도 머리를 숙였다.어떻게 되었든 완벽하게 거사를 성공시키기 전까지는 같이 가야 할 위인들이었다.

“그래, 자중들 하시게. 대의를 위한 거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우리끼리 이리 반목해서야 되겠는가? 이 행수의 말처럼 도망친 김돈중은 잡아들이면 그만일세.”

정중부는 현재 누가 가장 실세인지를 파악하고 이의방의 편을 들었다.

“하오나 일 처리가…….”

“그 정도면 아주 잘한 것이야.”

정중부의 행동을 보고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저 늙은이는 하여튼 처세술의 달인이야!’만약에 김돈중이 황도로 들어가 태자를 만난다면 이의방과 장군들은 채원을 만나기 전에 수천의 군사들을 먼저 만나야 한다.

그러면 당연히 죽는 거였다. 나도 속절없이 죽는 것이고. 절로 인상이 찡그려지는 일이었다.

‘그렇게 될 수도 있겠구나.’이제 황궁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채원을 믿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어떻게든 채원이라는 장수가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해줘야 하는데…….’난 얼굴도 모르는 채원에게 진심으로 부탁하고 싶었다.

“그래도 만일을 대비할 필요는 있을 것이야.”

조금 전까지 이의방의 편을 들던 정중부가 노장군의 체면을 살짝 살려 주려는지 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상 폐하가 저희들의 손안에 있으니 만약 김돈중 그 쥐새끼가 태자 전하를 만난다고 해도 태자 전하께서는 쉽게 거병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렇기는 하지.”

“그래서 제가 용맹한 이의민을 보현원에 남긴 것입니다. 어떻게든 이의민이 황상을 잘 지킬 것입니다.”

이의방의 말에 정중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우리는 황궁으로 들이닥치기만 하면 되는 거군.”

“그러하옵니다. 바람처럼 몰아붙이면 될 일이옵니다.”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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