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1권 -- >바람을 가르는 거대한 도끼는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의 무기처럼 강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지.”
이의민은 거침없는 황소처럼 보현원 안으로 들어서며 다시 한 번 장졸들에게 지시했다.
“문신이든 환관이든 이곳으로 나오는 놈이 있다면 거침없이 베어야 할 것이다.”
장졸들은 여전히 놀란 눈으로 멍하니 이의민을 봤다.
“한 치의 망설임이라도 있는 놈은 내 부월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의민의 위협에 장졸들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예!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이의민은 마지막 다짐을 받고 보현원 안으로 들어갔다.의종이 보현원 아래 마련된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그를 호위하는 순검군(巡檢軍)이 연회장 안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보현원의 승려들은 의종의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승려의 안내로 의종이 먼저 연회장에 착석하자 그를 따르던 왕광취와 한뢰, 그리고 수십의 문신들과 그보다 더 많은 환관들은 마치 자신들이 재상이라도 되는 듯 거드름을 피우며 자리에 앉았다.
그 연회장에서 무신들의 자리는 역시 없는 듯했다.상장군 정중부가 순검군 앞에 서있으니 다른 장군들이야 더 할 말이 없었다.
의종에 의해 연회가 시작되자 악공들의 연주가 흘러나왔고, 무희들이 연회장 앞으로 나와 화려하게 춤을 추었다.그 순간 정중부의 주변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지금 정중부의 주변에는 이소응을 비롯해 진준, 그리고 기탁성, 양숙 등의 대장군이 같이 있었고, 또 오늘 실제적으로 행동할 이의방의 주변에는 이고와 석린, 박존위를 비롯한 젊은 무장들이 결연한 눈빛으로 정중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보현원을 경계하는 순검군의 무장 하나가 이의방의 눈에 들어왔다.
‘우선 저놈부터 제거해야 할 것이야!’이의방은 정중부가 지시를 내리는 순간 순검군 무장부터 제거할 생각이었다.그 때, 연회를 즐기고 있던 의종이 가만히 서있는 정중부를 봤다.
“그래도 짐이 한때는 무척이나 의지한 무장이었거늘…….”
의종은 정중부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의종은 젊은 날 정중부와 무인들을 무척이나 신뢰했다.하지만 권신들의 압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천대할 수밖에 없었다.
“상장군!”
의종이 상장군 정중부를 부르자 그는 급하게 연회장 상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르셨나이까? 황상 폐하!”
“그대도 이곳에 앉게.”
의종은 상장군 정중부에게 자리를 권했다.
“저의 소임은 황상 폐하의 안위를 지키는 일이옵니다.”
“그러니 내 옆에 앉아 짐을 지키게. 그리고 상장군이 잠시 쉰다고 해서 이곳에 뭐라고 할 자는 없을 것이야.”
의종은 모처럼 상장군을 생각해 줬다.하지만 이번 배려는 너무나 때늦은 배려일 뿐이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야! 어서 상장군께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고!”
의종의 말에 한뢰는 마지못해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했다.하지만 거기까지였다.옆에 있던 왕광취가 의종을 보며 비통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찌 황상 폐하께서는 불학무식한 무부를 이 고귀한 자리에 앉히시려는 것이옵니까?”
정말 해도 해도 너무했다.
“이 고귀한 자리에 이 나라의 군을 통솔하는 상장군이 앉으면 안 되는 것인가?”
“그는 겨우 무부에 불과하옵니다.”
“환관도 앉은 자리에 왜 상장군이 앉으면 안 되는 것인가?”
그 말에 수많은 환관들이 인상을 찡그렸다.
“소, 송구하옵니다.”
왕광취는 마지못해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닫았다.그리고 끝내 의종의 옆에 상장군 정중부의 자리가 만들어졌다.그 순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의방과 이고, 그리고 휘하에 있는 석린과 이영진이 인상을 찡그렸다.
“저러다가 물러 빠진 늙은이가 거사를 그만두는 것이 아닌가?”
이고가 답답한 마음에 조용히 이의방에게 말했다.
“오래 생각하시는 분이지만 그렇다고 흔들리실 분은 아니네.”
“그것을 어떻게 장담하나?”
“상장군은 그대의 검도 무서워할 테니까.”
이의방은 비릿하게 웃었다.그리고 자리에 앉아있는 정중부를 뚫어지게 쏘아봤다.
“상장군!”
“예, 황상 폐하!”
“짐의 술을 한 잔 받게.”
의종은 손수 상장군 정중부에게 술을 따라줬고, 정중부는 다소 놀라며 그 술을 받았다.
“짐이 그동안 그대들에게 너무 소원했어.”
“황송하나이다.”
“짐이 곧 환궁하면 이번 노고를 크게 치하할 것이네.”
정말 의종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자신의 어가 행렬을 호위한 무신들을 치하하겠다고 말했다.그러자 문신들과 환관들은 마치 똥을 씹은 표정으로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아니옵니다. 저는 해야 할 소임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하하! 내 이래서 상장군이 좋아. 이 술 한 잔 들고 그동안 서운했던 것은 다 잊으시게.”
“황송하옵니다.”
“짐이 내리는 어주이네. 어서 쭉 들이켜시게.”
의종의 말에 정중부는 술잔을 잠시 봤다. 찰랑거리는 술잔 속에서 백발이 성성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수없이 많은 천대를 당하고 괄시당한 때가 떠올랐다.
“황상 폐하!”
“그래, 왜 그러는가? 상장군!”
“늦은 것 같사옵니다.”
“늦어?”
“그러하옵니다. 소신은 황상 폐하의 술을 받을 수가 없나이다.”
정중부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들고 있던 술잔의 술을 바닥에 부어버렸다.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신호 같았다. 그래서 난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이제 곧 천둥이 치는 칼부림이 일어날 것이다.싸움 구경을 하는 것은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내가 안전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나는 최대한 뒤로 물러났다.그와 동시에 이의방이 눈짓을 하자 이고를 비롯한 석린, 이영진이 이끄는 장졸들이 순검군을 포위했다.
“너희들도 무인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거사를 막지 말라!”
이의방이 소리를 지르자 순간 장중이 싸늘해졌다.그와 동시에 어주를 버린 것을 본 의종은 상장군 정중부를 봤다.
“무엇을 하는 것인가?”
“늦었습니다.”
정중부는 짧게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무엇을 하는 것이냐? 황상의 총기를 흐리는 난신적사를 처단하지 않고!”
정중부가 벼락처럼 소리를 질렀다.그와 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이의방과 이고가 문신들과 환관들을 향해 검을 뽑아 달렸다.
‘드디어 시작이군.’무신들은 앞으로 달려 나가고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완전히 뒤로 물러났다.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무신정변의 시초인 보현원 사건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우선 이고와 이의방의 밀담을 밀고하려던 장졸이 그 첫 번째였다.
그것을 막은 것이 나이다. 역사의 물꼬를 나도 모르게 무신들을 위한 방향으로 틀어버린 것이다.
그다음이 무신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던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의 간언이었다.그런데 그것을 어리석은 의종이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문신들에게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끝내 보현원 사건은 일어났다.난 검을 뽑아 들고 제일 선두에서 달려 나가는 이고를 봤다.
성정이 사나운 이고는 눈에 보이는 모든 문신들과 환관들을 요절내려는 듯 거침이 없었다.
“황실을 기만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는 난신적자들을 척살해라!”
이고는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이고는 앞에 있는 이복기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 순간 이고의 칼을 맞은 이복기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보현원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그 모습을 보고 연회장 상석에 앉아있던 한뢰와 왕광취, 그리고 임종식은 기겁하며 의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정중부가 의종을 봤다.
“황상 폐하! 이곳은 제가 일을 마무리할 것이오니 전각 안으로 들어가셔서 쉬십시오.”
정중부의 말에 의종은 정중부를 빤히 봤다.
“이, 이 무슨 일인가? 상장군!”
의종의 말에 상장군 정중부는 대답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오는 석린을 봤다.
“무엇을 하는 것이냐? 어서 황상 폐하를 전각 안으로 모시지 않고!”
정중부는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예, 상장군! 일어나시지요, 황상 폐하!”
석린은 명령하듯 의종에게 말했다.
“뭐라?”
“일어나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혼란 속에서 이 노신이 황상 폐하의 옥체를 보존키 어렵습니다.”
순간 정중부가 의종에게 무서운 소리를 했다.
“사, 상장군!”
의종은 상장군을 노려봤다.하지만 이미 분노한 무신들을 막을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의종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 때 왕광취와 임종식, 그리고 한뢰가 의종의 앞에서 애원했다.
“황상 폐하! 소신들을 살려 주십시오!”
“황상 폐하! 이 한뢰를 살려 주십시오!”
조금 전까지 한없이 당당하고 근엄하던 문신과 환관의 두 거두가 의종에게 애원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의종 자신도 몸을 보존하기 어려워 보였다.
“난신적자는 그냥 두고 가시지요.”
석린이 재촉했다.이고가 이끄는 병사들이 당황한 순검군과 일전을 벌이고 있었다.이의방은 처음 생각해 둔 것처럼 순검군 장수에게 달려가 그의 목을 가차 없이 베었다.쉬웅!바람을 가르는 이의방의 검이 순검군 장수를 베자 검을 들고 있던 순검군 장졸들의 사기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누가 감히 대업을 행하는데 앞길을 막는 것이냐!”
이의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신적자를 비호하는 자는 난신적자로 간주하여 무인이라도 목을 벨 것이다!”
이의방의 단호한 외침에 순검군 장졸들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이래서 전투할 때는 그 우두머리부터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자신들을 지휘해 줄 사람을 잃은 순검군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모두 다 이 대고려의 무인이다. 오늘 황상 폐하의 총기를 흐리는 문신, 난신적자를 베고 대고려를 부흥시키자!”
이의방의 외침에 순간 순검군 장졸들도 창을 고쳐 잡고 돌아섰다. 이제 문신들과 환관들을 비호해 줄 군사는 아무도 없었다.
“저희는 견룡행수를 따를 것입니다.”
순검군 하나가 소리치자 나머지 순검군 군사들도 따라 외쳤다.그와 동시에 이의방은 하늘로 검을 치켜 올렸다.
“가자! 난신적자를 제거하자!”
이의방은 당황하며 허둥대고 있는 난신적자를 향해 달려 나갔다.이제 남은 것은 무신들이 문신들을 도륙하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앞으로 달려 나가는 이의방의 눈에 석린에게 이끌려 전각으로 들어가는 의종이 보였다.이제 자신들을 막을 그 어떠한 존재도 보이지 않았다.
의종이 그렇게 전각으로 들어가자 한뢰와 임종식, 그리고 왕광취는 어찌할 바를 몰라 두리번거렸다.이의방은 지금까지 자신을 괄시하던 환관 한뢰를 보고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이 고자 놈아!”
이의방은 사납게 외치며 한뢰의 앞에 섰다.한뢰는 이의방을 보자 기겁을 하곤 옷에 오줌을 쌌다.
“내 오늘 네놈의 목을 베지 않으면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다.”
“사, 살려주시오! 견룡, 견룡행수!”
조금 전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한뢰는 울음을 터트리며 이의방에게 간곡하게 애원했다.하지만 그 애원의 답으로 돌아온 것은 이의방의 날카로운 검이었다. 한없이 차곡차곡 쌓인 울분이 겨우 눈물 몇 방울에 풀릴 리가 없었다.
“제발! 제발! 살려주시오, 견룡행수! 살려만 주신다면 내 견룡행수의 충견이 될 것이오. 제발 살려주시오, 제발!”
눈물, 콧물로 엉망진창이 된 한뢰는 살기 위해,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이리도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네놈이 어찌했는지도 모르고 살려달라는 것이냐, 이 염치없는 놈아! 문신들보다 네놈들이 우리 무신들을 더 괄시하고 천대한 것을 잊은 것이냐!”
“어리석어 그런 것이오. 김돈중을 비롯한 난신적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어쩔 수 없이 한 짓이오. 그러니 제발! 가엾게 여기시어 살려주시오, 견룡행수!”
“참으로 구차한 놈이다.”
“제발 살려주시오! 죽고 싶지 않소!”
“닥쳐라! 네놈을 죽이지 않고는 이 고려를 바로 세울 수 없다. 이야!”
이의방은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둘러 끝내 한뢰의 목을 베었다.같은 시간 이고 역시 임종식의 복부에 깊이 검을 쑤셔 넣었다.
“여기 난신적자 임종식의 목이 있다!”
이고의 외침에 장졸들은 환호성을 쳤다.
“와와와!”
“난신적자 임종식이 죽었다.”
“베어라! 문신의 갓을 쓴 자는 모두 도륙해라!”
이고는 피에 흥분했는지 거침없이 소리를 질렀다.
“난신적자들을 모두 베어라!”
이고의 명이 떨어지자 장졸들은 그동안의 울분을 터트리듯 모두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