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1권 -- >
“무, 무비 마마! 소인이 또 무슨 잘못을 한 것이옵니까?”
“그년이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
“그, 급살을 맞은 것이 천벌이 아니옵니까?”
“그게 천벌이라면 내가 하늘이겠구나. 호호호!”
순간 환관 김우치는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래! 나를 무시한 네년 때문에 네년의 아들은 그렇게 모질게 살게 될 것이다. 내 그 아이를 절대 편히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비가 이렇게 누군가를 모질게 저주하는 것은 그녀에게는 아직 소생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의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무비이지만 그녀에게는 아직 아이가 없었고, 그것이 무비의 최대 약점이었다.
남자의 사랑은 바람처럼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인지상인 황제의 마음은 더욱더 그럴 것이었다.신분이 비천한 무비였기에 황제인 의종의 총애가 사라지는 순간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세까지 사라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비는 이렇게 표독스럽게 행동하는 거였다.
그리고 의종의 총기를 흐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다. 이래서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의종의 생모인 공예태후와는 무척이나 사이가 좋지 않았다.
‘늙고 비루해서 금방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망할 년!’무비는 항상 마음속으로 그렇게 공예태후를 저주했다.의종에게 황후가 없는 상태인데도 무비가 황후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런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황후에 오르는 것을 결정적으로 막고 있는 사람이 공예태후였다.
‘내 죽어도 그 늙은 년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무비는 공예태후가 생각이 났는지 어금니를 와작 깨물었다.
“무비 마마! 수호장 백화 들었나이다.”
무비의 처소 문 앞에 있던 상궁이 백화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리자 무비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들이라.”
잠시 후 문이 열렸고 옷이 비에 젖은 상태로 백화가 들어섰다.
“백화수검대의 수장인 백화, 무비 마마께 문안드리옵니다.”
“언제부터 와있었느냐?”
무비가 들어서는 백화에게 물었다.
“바로 왔나이다.”
“바로?”
무비는 백화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봤다.비에 젖어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 백화의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렇사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백화가 무비의 전각에 도착한 지는 한참이었다.백화는 무비와 환관 김우치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왜 무비가 자신에게 겨우 병사에 불과한 아이를 지켜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놀람도 잠시, 이미 그 아이는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생각에 이렇게 냉정을 되찾고 무비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 내 너에게 그 아이를 지켜보라고 했는데 그 아이를 지켜보지 않고 온 것이냐?”
추궁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강인번을 들고 황제 폐하를 호종하던 그 병사가 벼락을 맞아 급사했사옵니다. 그래서 알려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뭐라?”
무비는 너무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아이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그렇사옵니다, 마마!”
무비는 백화의 말을 듣고 인상을 찡그렸다가 어느 순간이 되자 표정이 평온해졌다.
“그리되었구나! 그래, 그리되었어!”
“그렇사옵니다. 벼락을 맞고 절명했사옵니다.”
“그래, 어쩌면 너무 오래 산 목숨이다.”
“예?”
백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다, 그런 것이 있다. 알았으니 나가봐라.”
“예, 마마!”
백화는 무인답게 짧게 고개를 숙여 목례한 뒤 조심히 무비의 처소에서 나왔다. 그러자 바로 문이 닫혔다.하지만 백화는 무비의 처소를 벗어나지 않고 조용히 무비의 처소에 귀를 기울였다.
“하늘도 마마의 억울하심을 벼락으로 답했나 보옵니다.”
“벼락으로?”
“그렇지 않사옵니까? 그때 잃으신 용종을…….”
“닥쳐라!”
환관 김우치가 용종이라는 말을 하자 무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송구하옵니다. 아프신 기억을 소신이 어리석게도 다시 끄집어냈사옵니다.”
“으음……. 이제 나도 잊어야 한단 말인가? 나도…….”
무비는 그렇게 말하며 자금까지 자신이 모질게 잡고 있던 원인 모를 집착을 내려놓으려 했다.
“그래도 그년은 좋겠네. 제 자식도 보고…….”
무비는 처량하게 말했다. 마치 무비 자신도 누군가를 보고 싶다는 눈빛이었다.환관 김우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무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지금 살아있다면 죽은 그 아이처럼 열일곱은 되었을 것이야…….”
무비의 눈빛은 너무나 처량했다.
“그럴 것이옵니다.”
“그래, 그리되었을 것이야! 이제 다시는 못 가질 내 아이이지.”
무비는 자신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그녀에게 숨겨진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그런데 마마!”
환관 김우치가 무비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물을 것이 있느냐?”
“화근이 될 백화를 왜 옆에 두시는 것이옵니까?”
“화근이라, 백화가 화근이라…….”
“그렇지 않사옵니까? 그녀의 출생이…….”
순간 무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복수지, 태후에 대한 나의 마지막 복수.”
“복수 말이옵니까?”
“그래, 복수다. 태후께서는 태자를 너무나 아끼시지. 하지만 태자는 어리석다. 만약…….”
“만약?”
“만약 다른 황자가 있다면, 그리고 그 황자가 내 사람이라면 이 고려는 내가 늙어도 내 수중에 들어올 것이다.”
순간 환관 김우치는 기겁했다.
“하오나 그러기 위해서는 마마께서 용종을 잉태하셔야 하지 않사옵니까?”
“너는 내가 이제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냐!”
순간 무비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송구하옵니다.”
“내 태후가 보낸 그 약을 먹고 돌계집이 되었지. 그래서 백화가 필요한 거야!”
무비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 말씀은…….”
“태후가 그에게 빚이 있으니 나처럼 백화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야.”
“그럼 황제 폐하께서 환궁하시면…….”
“자리를 마련해야지. 그리고 미래를 준비해야지. 내 미모가 아직은 붉은 꽃이기는 하나 꽃은 시드는 법이지. 그래서 백화가 필요한 거다.”
“그럼 결국…….”
“그래, 백화가 용종을 품게 된다면 그 용종은 내 용종이 될 것이다.”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는 무비를 보고 환관 김우치는 기겁했다.
“황후는 되지 못해도 태후는 되어볼 참이다.”
무비는 자신이 늙은 후에도 백화를 이용해서, 그리고 백화가 후일 황제와의 동침을 통해 가지게 될 용종을 이용해 미래를 도모하고자 했다.그것은 다시 말해 용종을 생산한 후에 백화를 제거함을 의미했다.
‘누구나 빚을 지고는 못 사는 법이지. 누구도.’무비는 태후를 떠올리며 차갑게 미소를 머금었다.밖에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화는 인상을 찡그리며 돌아섰다.
자신을 옆에 두고 있는 무비의 계획을 내심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을 이렇게 직접 자신의 귀로 듣게 되자 씁쓸함이 밀려왔다.하지만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이 고려에서, 그리고 황궁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무비이다.그녀의 음모를 알고 있는 백화이지만 대적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백화는 자신에게 뻗어오는 마수보다 자신이 지켜본 그 아이가 대략 누구였는지 짐작을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그 아이가…….’백화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무비의 처소 문 앞에 서있는 나인들을 노려봤다.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었으나 이미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가 번개를 맞아 죽은 후였다.백화는 천운을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운? 이 순간 천운을 생각하는 여인이라면 참으로 독한 이가 분명할 것이다.
“내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리지 마시게.”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주군!”
나인 둘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주군!나인들은 백화에게 주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다시 말해 지금 나인들은 백화가 이끌고 있는 백화수검대의 숨겨진 여무사들이었던 것이다.그것을 오직 무비만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백화도 나름 대비 아닌 대비를 하고 있었다.보현원 입구.드디어 의종의 어가 행렬이 운명의 보현원에 도착했다.
역사의 순간에 서있기 때문일까? 나는 무척이나 긴장이 됐다.그리고 내 눈에 보이는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를 비롯한 무장들도 긴장한 눈빛이 역력했다.
오직 아무것도 모르는 문신들과 환관들 그리고 의종만이 앞으로 있을 연회를 기다리며 웃고 있었다.‘저 멍청한 것들, 오래 웃지는 못할 거야!’난 어가에서 내리는 의종을 봤다.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편해 보였다.의종이 어가에서 내리자 한뢰가 허리를 숙여 의종의 어수를 조심히 잡고 부축했다.
“보현원에 도착했나이다.”
“그렇구나, 그런데 좌승선이 보이지 않는구나?”
의종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그제야 문신들과 환관들은 좌승선 김돈중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어디 속이라도 급한 모양이지.”
의종은 그렇게만 생각했다.김돈중은 급하기는 아주 급했다. 지금 김돈중은 자신의 종복과 함께 급히 말을 몰아 황도로 달리고 있었다.
“어디를 가시는 것이옵니까? 대감마님!”
“황궁으로 갈 것이다. 이랴!”
종복의 물음에 김돈중은 다급하게 말하며 말에 채찍질을 했다.
“황궁이라니요?”
“긴말할 시간이 없다. 어서 황궁으로 가야 한다. 이랴!”
그렇게 문신들 중 유일하게 김돈중 혼자만 무신들의 정변을 막기 위해 황궁으로 달리고 있었다.하지만 보현원으로 가는 길에서 개경에 있는 황궁까지는 아주 먼 거리였다.
그렇게 김돈중이 급히 말을 달리는 순간 의종은 보현원에 마련된 연회장으로 급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저렇게 눈치가 없나?’의종은 눈치가 없는 황제였다.
어가의 행렬이 보현원에 들어서자마자 병졸들은 창검을 높게 세우며 경계를 강화했다.물론 이건 황제가 보현원에 머물기에 항상 하는 의전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이 서있는 위치가 다른 날과는 확연히 달랐다.보통 장졸들은 누군가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밖을 보고 경계를 서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지금 보현원을 지키는 병졸들은 의종의 어가 행렬이 그곳으로 들어서자마자 보현원 안을 경계하듯 그곳을 보고 있었다.이것은 삼척동자가 봐도 안에서 튀어나오는 놈을 제거하겠다는 의도이다.
그것을 오직 의종과 문신들, 그리고 불알이 없는 환관들만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물론 그들이 보현원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그렇게 경계가 세워지긴 했다.
그 때 거대한 도끼를 들고 이의민이 나타났다.지금 그의 표정은 잔뜩 긴장한 눈빛이었고, 또한 입술을 꼭 다문 것이 이의방에게 무슨 지시를 받아놓은 것 같았다.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의민은 경계를 서고 있는 장졸들에게 묵직하게 이야기했다.
“예, 알겠습니다.”
“누구든 밖으로 나오면 목을 베어야 할 것이다.”
이 순간 장졸들은 놀란 눈으로 이의민을 빤히 봤다.
“누구든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이 보현원에서 쥐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이의민은 다시 한 번 다짐을 받고 경계를 서고 있는 장졸들의 뒤로 물러나서 잠시 바위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러고는 부월을 바위 옆에 세우고 차분히 보현원을 바라봤다.
“내 여기서 보초나 서고 있다면 훗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이야!”
이의민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어쩌면 이 거사에 자신이 배제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견룡행수께서 지시하셨지만 이 부월에 피를 묻히지 않고는 훗날 큰소리를 뻥뻥 칠 수 없음이야.”
이의민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그리고 잠시 앉아있던 바위에서 힘껏 일어나 부월을 크게 한 번 휘둘렀다.위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