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1권 -- >
“황상 폐하! 농을 하실 때가 아니옵니다.”
그 순간 김돈중은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농이라……. 그대가 이제 이 고려의 지존을 가르치려 함인가?”
순간 의종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송구하옵니다. 소신은 그저…….”
“환궁이라, 환궁?”
“그러하옵니다. 그러니 속히 환궁하십시오.”
“정말 그런가?”
“황상 폐하!”
김돈중은 무거운 얼굴로 간곡하게 의종을 불렀다.하지만 순간 날카롭던 의종의 눈빛이 다시 부드럽다 못해 흐릿해졌다.
“하하하! 정말 내 오늘 좌승선의 다른 모습을 보았군.”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좌승선의 배포가 이리도 작은지 내 오늘 알았네. 하하하!”
김돈중은 마음이 답답했다. 난이라고까지 표현하면서 환궁을 하자고 말했는데 의종은 그저 자신의 배포가 작다고 말하며 듣지 않으려 했다.
“황상 폐하!”
“저들은 짐의 호령 한 번이면 모두 엎드려 벌벌 떨 자들이다. 짐이 곧 이 고려이고, 고려가 곧 짐이다. 그런데 어찌 짐을 지키는 무신들이 짐에게 검을 들겠는가!”
“하오나 황상 폐하, 저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천대와 괄시를 받았나이다.”
“그 천대와 괄시는 문신인 권신들이 행한 것이 아닌가? 짐은 그리한 적이 없다.”
의종은 자신이 무신들을 무시한 것은 모르는 듯했다.
“하오나 불학무식한 것들이옵니다. 그러니 황송하오나 황상 폐하에게…….”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그럴 일은 있을 수가 없어! 상장군 정중부는 겁이 많고 생각 또한 많은 자이다. 절대 어리석게 움직일 인물이 아니다. 겨우 이백의 장졸을 데리고 난이라……. 하하하!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하오나 황상 폐하!”
“그만하라! 황궁에 짐을 따르는 군사만 수천이다. 이백의 군사로 어찌 수천의 군사를 상대한단 말이냐?”
“하오나 상장군 정중부가 난에 동참하면 그 군사들은 상장군을 따를 것이옵니다.”
“왜, 이번에는 상장군의 수염으로는 부족해서 목을 태우려는 건가?”
의종의 말에 김돈중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젊은 날의 과오가 이렇게 지금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의종 역시 김돈중이 상장군 정중부에게 앙금이 남았기에 이참에 도모하기 위해 일을 꾸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이래서 지난날의 잘못은 항상 예리한 검이 되어 현실의 자신을 찌르는 모양이다.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소신은 그런 마음을 품지 않았사옵니다.”
“그런가?”
“그렇사옵니다, 황제 폐하!”
“짐은 보현원으로 갈 것이다.”
“황제 폐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옵소서!”
“좌승선은 그만하라! 그리고 짐이 겨우 무부들이 무서워 환궁하면 훗날 많은 신하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다. 또한 무부들이 이 사실을 알면 겁이 사라져 정말 난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화, 황상 폐하, 다시 한 번…….”
“좌승선!”
“예, 황상 폐하!”
“혹시 사냥개를 키워본 적이 있는가?”
의종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있는가? 없는가?”
“없사옵니다.”
“그렇지, 없지. 그래서 호연지기가 없는 것이야. 그대의 부친은 참으로 일을 밀어붙이는 능력이 있었지. 묘청을 역신으로 몰고 일을 꾸미는데 그만한 위인이 없었지.”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온지…….”
김돈중은 답답한 마음에 되물었다.
“부친을 닮고 싶으면 사냥개를 좀 키워보게. 그럼 배포가 커질 것이야.”
“그리하겠사옵니다. 하오나 지금은…….”
“없으니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예?”
김돈중은 영문을 몰라 의종을 무엄하게 빤히 봤다.
“짐은 사냥을 즐겨 궁에 제법 많은 사냥개를 키우고 있지.”
“그것이 왜?”
“원래 사냥개와 비슷한 족속들은 말일세…….”
“예, 황상 폐하.”
“새끼일 때 몽둥이로 주인에게 얻어맞기 시작하면 아무리 범처럼 발톱과 이빨이 사나워져도 절대 주인을 물지 못하는 법이네. 주인만 보면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겁이 나는 거야. 그래서 배를 보이고 꼬리를 흔들지. 그게 사냥개라네. 그렇게 만들어 놨는데 왜 내가 사냥개를 무서워한단 말인가?”
이 순간 무신들은 개가 되었다. 그리고 의종은 이만큼 무신들을 천대하고 있었다.의종의 말에 김돈중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지금 달이 찼다! 이제 비가 내려 둑을 무너트릴 일만 남았어!’김돈중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말게.”
“화, 황상 폐하!”
“짐은 보현원으로 가서 못다 한 풍류를 그대와 즐길 것이라네. 어서 떠날 채비를 하게.”
이렇게 운명은 비켜가지 못하는 법인가 보다.김돈중이 달을 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일이 그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황제 폐하!”
“그만하시래도!”
“알겠사옵니다.”
“어서 떠날 채비나 하시게.”
좌승선 김돈중의 충심이 철저히 외면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
이 순간 김돈중은 다른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황제의 보현원 행차를 막고자 했다. 비록 자신을 향해 노려보는 무비의 얼굴이 떠오르기는 했으나, 후일의 후환보다 지금 당장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 더 걱정되었던 것이다.
“더 할 말이 있는가?”
의종은 바로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 그대만 보면 이제 머리가 다 아프군.”
의종은 찡그리며 돌렸던 시선을 김돈중에게 향하며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아니옵니다, 채비하라고 이르겠나이다.”
“그러시오.”
무슨 말을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김돈중은 어쩔 수 없이 의종의 처소에서 나왔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의종의 처소에서 나오는 김돈중에게 한뢰가 웃으며 물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김돈중이 말했지만 이미 한뢰는 불충하게도 의종과 김돈중의 독대를 엿듣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상 폐하께서 사냥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으음…….”
김돈중은 한뢰를 째려봤다.
“하하하!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겠지요.”
“그리 걱정되시면 무신 몇을 골라 죄를 씌우면 되지 않습니까?”
한뢰의 말에 김돈중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아닙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봅니다.”
“그러십니까? 그게 다 좌승선께서 조정을 걱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충신이십니다, 충신! 하하하!”
한뢰의 말은 김돈중에게 조롱처럼 들렸다.하지만 황제의 총애가 그들에게 있으니 어찌하지 못하는 김돈중이었다.
“그런가요?”
김돈중은 그저 씁쓸하게 웃고는 계단을 내려갔다.의종의 처소 밖에는 문신들이 보현원으로 떠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어리석은 것들! 내 젊은 날처럼 어리석구나!’김돈중은 다시 긴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이미 역사는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있었다.이의방의 군막.
“들었는가?”
이고는 아이처럼 밝은 표정으로 이의방에게 말했고 나는 이의방의 뒤에 서서 가만히 그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마치 내가 이의방의 부장처럼 됐네.’이의방은 나를 어제 이후로 옆에 두려고 했다. 내가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들었지,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는 것이네.”
“나는 말일세, 아침에 김돈중이 황제 폐하와 독대를 한다기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네.”
그만큼 김돈중의 독대를 유심히 지켜보는 자들이 많았다.
“만약 일이 틀어졌다면 이 흥왕사에서 거사를 할 뻔했어.”
이의방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 그럴 뻔했어.”
이고는 이의방에게 말하고 힐끗 나를 봤다.
“저 아이를 옆에 붙여두고 있군.”
그 말에 이의방이 피식 웃었다.
“제법 재간이 있어서 옆에 두고 쓰려고.”
“그럼 일만 잘되면 저 아이도 출셋길이 열리는 건가? 하하하!”
이고는 마치 이미 거사가 성공한 것처럼 말했다.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러는 거냐? 출셋길이 열렸다는 말이 싫은 것이냐?”
이고가 내게 물었다.
“속단하는 것과 방심하는 것이 거사를 망치는 지름길이옵니다.”
내 말에 이고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이의방을 봤다.
“의방, 자네가 말한 것처럼 재간이 있기는 하군.”
“맞네, 틀린 말은 아니니 거사를 시작하기 전까지 절대 내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네.”
“물론이지, 내 그렇게 할 것이네. 그리고 만약 거사를 성공한다면…….”
처음으로 이고의 눈빛이 반짝였다.
“성공하면 무엇을?”
“내 마음은 자네가 잘 알지 않나? 나는 자네가 무엇을 하든 따를 것이네. 그러니 내가 원하는 그것만 내게 주면 되네.”
그 말에 이의방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복수 때문에 거사에 동참한다면 우리의 대의가…….”
“크고 큰 대의는 자네가 품게. 나는 자네가 알다시피 소인배이니 내가 원하는 것만 얻으면 그만이네. 자네도 내 울분을 알지 않는가.”
이의방과 다르게 이고는 이번 거사를 통해 다른 것을 원하고 있는 듯했다.‘뭘 원하는 거지?’난 그런 생각을 하며 힐끗 이고를 봤다.
“알았네. 거사가 성공하고, 또 조정을 손아귀에 움켜쥔다면 내 자네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내어줄 것이네.”
이의방이 답을 주자 이고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내 이제야 17년의 한을 풀겠군.”
“하지만 지금은 자중, 또 자중하시게. 은연중에 속내를 들킬 수 있으니 말일세.”
“알았네, 알았어.”
그렇게 어가 행렬이 보현원으로 향한다는 것을 통보받고 이고는 그의 성정답게 뛰듯 좋아했고, 이의방은 굳은 의지를 보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또한 정중부 역시 지그시 눈을 감으며 어떻게 하면 거사를 성공시킬까 고민했다.
드디어 어가 행렬이 흥왕사 일주문을 넘어 운명의 보현원으로 향했다.나는 어제와 다를 것 없이 어가 행렬의 제일 선두에 서서 강인번을 들고 어가 행렬의 앞길을 열었다.
‘젠장! 이게 뭐야! 잠 한숨 못 자고…….’운명의 시간이 시시각각 닥쳐오고 있었지만 나는 투정이 늘어나기만 했다.‘그러고 보니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네.’어린 나는 무슨 이유에선가 계속 강인번을 들어야 했고, 의종은 어가에 들어앉아 총신들과 편히 이동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말을 탄 문신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마상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었고, 무신들은 여전히 잔뜩 불만에 가득 찬 눈으로 의종을 호종하고 있었다.정말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홀로 말에 올라 깊은 시름에 잠긴 표정으로 하염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하지만 나는 그가 지금 이 순간 그저 멍하니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걸 거야!’난 그런 생각을 하며 마상에 올라있는 김돈중을 봤다.사실 김돈중은 보현원에서 일어난 무신정변의 1차 화란을 피했다.
무신들의 동태를 다른 문신들과 환관들과 달리 파악하고 있었기에 은근슬쩍 자리를 빠져나가 피한 거였다.하지만 그 역시 끝내 무신정변의 화를 피하지 못했다.
‘아마 어느 순간 꽁무니를 빼겠지.’난 역사를 알고 있었기에 김돈중의 다음 행동도 짐작할 수 있었다.그렇게 의종과 어가 행렬은 보현원으로 이동했다.
또각또각!어가의 옆에서 말을 타고 가던 김돈중이 어느 순간 제일 선두에 서있는 나에게 말을 타고 다가왔다.‘뭔 일이래? 나한테 오는 건가?’김돈중이 내게 뭔가 할 말이 있어 이렇게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