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웅-13화 (13/620)

< -- 간웅 1권 -- >

“소인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래, 내가 스스로 부끄러운 것이지.”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봐서 젊은 날 기고만장하면서 사람을 깔본 김돈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인이 죄를 지었습니다.”

“죄는 무슨! 내가 너처럼 젊었을 때 조금만 허리를 낮췄다면 이런 근심은 하지 않았을 것을……. 휴우!”

김돈중은 뭔가 깊은 근심이 있는 듯했다.‘나이를 먹으면 사람이 변하는구나!’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 김돈중을 판단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무인시대」라는 시나리오를 보고 그의 이미지가 머리에 박혀있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이렇게 당사자를 직접 보니 드라마는 역시 허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역사라는 것도 하나의 사건으로 사람을 판단해 놓은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 역사가 모두 옳을 수는 없고, 기록이 모두 사실일 수는 없는 법이다.’난 다시 김돈중을 봤다.

“그런데 무엇을 그리 걱정하십니까?”

“달이 차면 기우는 법이다. 또한 많은 비가 강산에 내리면 하나로 모여 둑을 무너트리고 거침없이 고을을 덮쳐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법이다.”

이 역시 시적인 표현이었다. 달은 문신들의 탐욕과 부패를 의미하는 듯했고, 비는 무신들의 불만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둑은 그들의 불만을 막고 있는 황상의 권위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끝내 백성들이 고통을 받게 될 거라는 것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김돈중은 의미심장한 시적 표현을 끝낸 것이다.

“기운 달은 오랜 시간 후에 다시 뜨기 마련입니다.”

정말 오래, 그것도 1세기나 다시 지나야 밝은 달이 뜰 것이다. 무인들의 시대가 1세기나 지속될 것이니 말이다.‘어떻게 하지? 살짝 귀띔이라도 해줄까?’난 고민이 됐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회생이옵니다.”

“회생?”

“그렇습니다.”

“이름 역시 요상하구나!”

“낮에 강인번을 들다가 쓰러져 잠시 숨이 멈췄다가 다시 살아났기에 그렇게 이름을 고쳤습니다.”

“낮에 강인번을 들던…….”

순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게 김돈중의 표정이 굳어졌다.‘내가 강인번을 들었었다고 말하자 표정이 변했다.’난 김돈중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정말 뭔가 있다.’뜬금없이 들리는 환청과 저 고관대작의 반응이 내게 의구심이 들게 했다.하지만 감이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니 너는 너의 군막으로 돌아가봐라.”

“예?”

“어서 돌아가지 못할까!”

김돈중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말 이렇게 황당한 순간은 처음이었다.‘왜 저러는 거야? 조울증 있는 거 아냐?’난 바로 인상을 찡그렸다.하지만 그의 성냄에 더욱더 뭔가 숨겨진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인, 물러가겠습니다.”

난 돌아서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역시 씨가 다름이야! 이 죄를 어찌할꼬.”

순간 김돈중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마 혼잣말일 텐데 내 귀가 밝아 들린 모양이다.

‘뭐가 씨가 다르다는 거야?’이것은 나에 대한 힌트일지도 모른다. 그가 나를 갑작스럽게 쫓아냈기에 나는 김돈중에게 무신정변이 일어날 거라는 힌트를 주지 못했다.

결국 김돈중에게 한 다리 걸쳐 놓겠다는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죽으려고 작정을 한 거지. 이래서 인명은 재천이라는 소리가 있는 거야! 암, 김돈중과 문신들은 하늘이 정해 준 죽을 운명이야!”

나는 그렇게 이죽거리는 것에 열중하다가 가장 중요한 힌트를 잊고 말았다.그리고 이 망할 놈의 거대한 절, 흥왕사 때문에 밤새도록 길을 잃고 헤매야 했다.

절간이라 누구도 닭 모가지를 비틀지 않았는데 아침이 왔다.‘이제 살육이 시작되는 날이다.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미래를 알고 있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김돈중은 어린 병사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며 처음 이 장소에 와서 근심에 빠진 것보다 더 깊은 근심에 잠겼다.

“으음…….”

멀어져간 어린 병사를 떠올리며 김돈중은 다시 한 번 신음했다.

“고하지 않으면 불충일 것이고, 고한다고 해도 방법은 없을 것이고…….”

김돈중은 다시 하늘에 뜬 달을 보며 회상에 빠져들었다.진하게//

“무엇이라고 하셨소이까?”

김돈중, 그가 자리한 곳은 무비의 처소였다.

“강인번을 든 병사를 잘 지켜보세요.”

마주 앉아있는 무비의 뜬금없는 말에 김돈중은 영문을 몰라 그녀를 유심히 보았다.

“예?”

“저와 그대만 아는 일을 잘 생각해 보세요. 그 옛날 그대가 저를 도운 일들 중에 가장 후회스러운 일을 생각해 보세요.”

무비는 김돈중을 보며 야릇하게 웃었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좌승선, 기억이 안 나시나요? 17년 전이요.”

순간 김돈중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그 말씀은…….”

“그러니까 잘 지켜보시라는 겁니다. 호호호! 아주 재미있잖습니까?”

“마, 마마…….”

“왜, 내가 너무 표독한가요?”

“그, 그것이 아니라 그러시다가…….”

“피가 물보다 진한지 아닌지 어디 한번 보자고요. 호호호!”

//무비의 야릇한 웃음을 마지막으로 김돈중은 회상에서 깨어났다.

“으음……. 자꾸 이 고려 조정과 황실이 틀어지고 있다! 이제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김돈중은 뭔가 결심한 것 같았다.9장 의종과 독대를 청한 김돈중흥왕사 동쪽에 있는 의종의 처소.사실 김돈중이 밤새 달을 보며 근심에 젖어있었던 것은 무신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서였다.

정말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그래서 밤을 새워 깊게 생각하고 이렇게 의종의 처소에 이른 아침부터 달려와 부복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충신의 마음으로 의종의 앞에 무릎을 꿇으려 한 거였다.‘틀어진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김돈중은 자신이 굳게 먹은 마음을 다잡듯 속으로 다짐했다.

의종은 김돈중이 독대를 청하자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일어나 옆에 품고 있던 무희를 내보내고 용포를 고쳐 입었다.

“좌승선을 들어오라고 해라!”

의종의 명에 내관이 좌승선에게 의종의 처소로 들어가라고 했다.

“들어가시죠.”

“알았네.”

김돈중은 그렇게 의종의 처소로 들어갔다.그 순간 내관이 어린 내관에게 눈치를 주며 가서 김돈중이 의종에게 독대를 청했다는 것을 알리라는 시늉을 했다.그렇게 젊은 내관은 한뢰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뭐라? 김돈중이 황상과 독대를 청했다고?”

어제 김돈중과 술을 같이 나눠 마시며 웃던 한뢰였지만 지금은 자신보다 높은 좌승선 김돈중을 그저 김돈중이라고 불렀다. 이건 다시 말해 어제 마신 술과 나눈 웃음이 가식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권력 앞에 머리를 조아렸지만 김돈중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자신이 가지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하옵니다. 좌승선의 표정이 밝지 않았습니다.”

“원래 그야 표정이 어둡지 않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걱정은 다 짊어지고 사는 인간이니까.”

“하오나 오늘은 더욱 그랬습니다.”

“무엇을 아뢰는 것 같던가?”

“그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바로 알려드리러 왔기에 듣지 못했습니다.”

“중요한 것을 빠트렸군.”

한뢰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야! 가봐야겠어. 김돈중 그자는 적도 우리 편도 아닌 존재야! 세상에서 제일 짜증나는 색이 회색이지. 흑도 백도 아닌 회색.”

한뢰는 인상을 찡그렸다.사실 환관들에게 흑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지금 천대받고 있는 무신들과, 문신이지만 무신의 편에 서면서도 문신들을 은연중에 아우르고 있는 용호군 대장군 강일천이었다.

그는 무신의 직을 가지고 있지만 천대하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그 이유는 강일천의 가문이 김돈중의 가문 못지않기 때문이다. 아니, 이 고려에서 그 어떤 가문보다 명망 높고 큰 힘을 가진 가문일 것이다.

그리고 백이라 하면 현 상선 이숭겸과 부상선 최준을 제외한 환관들이 주축이었다. 그리고 권세를 잡으려 하는 문신들이 한뢰와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하지만 김돈중은 한뢰 자신과 비슷한 노선을 걸으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했고, 또 적이라고 여기기에는 문제가 있기에 회색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좌승선이 달리 마음을 먹는다면…….”

보고한 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지, 회색은 흰색이 되기는 어려워도 검정이 되기는 너무 쉬우니까.”

김돈중은 의종의 앞에 바로 부복했다.

“이른 아침부터 좌승선이 무슨 일인가?”

의종의 표정에는 짜증스러움이 역력했다.

“보현원으로 가는 일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 들렀나이다.”

“보현원으로 가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그럼 뭔가?”

“오늘까지 해서 황상께서 황궁을 비우신 지 달포나 되었기에 환궁하시는 것이 어떠신지 아뢰는 것입니다.”

“내 어디 황궁을 달포 이상 비운 적이 이번이 처음인가?”

의종은 이른 아침부터 들어와서 한다는 소리가 환궁하자는 말인 것을 알고 더욱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오나 황상께서 황궁을 오래 비우시면…….”

“황궁에는 태자가 있지 않는가? 그리고 나보다 더 지엄하신 공예태후께서도 계시고.”

의종이 말하는 공예태후는 의종의 친모였다.하지만 의종의 말투로 봐서 공예태후와 의종의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다.하나는 의종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술과 여자, 그리고 사냥을 즐기는 것 때문이다.

뭐 그 정도라면 의종도 이렇게까지 공예태후를 싫어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이 둘의 사이가 갈라진 것은 두 번째 이유 때문이다.

의종 자신이 아끼는 무비를 공예태후가 무척이나 싫어했던 것이다.아니, 문신이 무신을 괄시하는 것처럼 공예태후는 무비를 괄시했다.

그것은 무비의 출신 성분이 비천했기 때문이었다. 무비는 무희 출신의 비였다.

뼛속까지 황족인 공예태후가 보기에는 버러지보다 못한 존재가 바로 무비일 것이다.자신이 아끼는 아들을 냄새나는 치마폭으로 감싸고 좌지우지하는 꼴이 보기 싫었다.

무비가 의종을 더욱 여자와 계집, 그리고 사냥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부 갈등이 어미에게서부터 아들을 멀리하게 만든 거였다.

“하오나 황상께서 황궁에 계셔야 치세가 더욱 태평스러워지옵니다.”

“오늘따라 좌승선이 괜한 소리를 하는군!”

“황상 폐하, 이 소신의 뜻을 따라 환궁하시옵소서.”

좌승선 김돈중이 간곡하게 부탁하자 의종이 김돈중을 빤히 봤다.

“진정 무슨 이유 때문인가?”

술에 취해있던 의종의 눈동자가 순간 차갑게 빛났다.사실 의종은 제법 총기 있는 황제였다.

처음 그가 스무 살에 황제가 되었을 때만 해도 권신들의 부패를 막기 위해 각종 개혁을 단행했고, 또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무신들을 가까이했다.그런데 개혁이 권신들의 방해와 압력에 의해 좌절되자 권신들의 눈치를 보느라 무신들에게 더욱 모질게 대하는 황제로 바뀌었다.

그러니 아무리 술과 계집에 찌든 의종이라고 해도 순간순간 번뜩이는 총기는 아직 남아있었던 것이다.

“아,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나? 짐의 치세는 태평성대라고. 그런데 갑자기 환궁을 하자니,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이냐?”

의종의 말에 좌승선 김돈중은 의종을 빤히 봤다. 그리고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입술을 한 번 지그시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무신들의 동태가 이상하옵니다.”

“무신들의 동태가 이상하다?”

“그러하옵니다. 그들이 혹시나 분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좌승선 김돈중의 말에 의종은 잠시 표정이 굳어졌다.

“분란?”

“그렇습니다. 무부들이 난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무부들이 난을 일으키면 큰일이 나겠지?”

“그러하옵니다. 지금 황상 폐하를 호종하는 자들은 대부분 정중부의 휘하에 있는 무신들입니다. 저희들의 가병은 호종을 하지 않았기에 난을 꾸미는 저들에게는 이만큼 호재가 없습니다.”

“그런가? 지금이 그동안 괄시를 받던 무신들이 변란을 일으킬 호재라고?”

순간 의종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러하옵니다. 지금 무신들의 심정은 바짝 마른 들판과 같습니다, 황제 폐하!”

“그럼 불씨 하나만 있으면 활활 타겠군.”

“그렇사옵니다.”

“그래, 이제 들고일어날 때도 되었지. 아니, 참고 있는 것이 더 요상한 일이지.”

의종은 남의 말을 하듯 했고 그 말을 들은 김돈중은 기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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