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1권 -- >
8장 김돈중을 만나다
‘오늘은 내일보다 더 거칠 게 분명해!’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코 인상을 찡그렸다.하지만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역사를 바꿀 마음도, 또 그것에 간섭할 뜻도 없으니.그저 사자의 뒤에 선 여우처럼 지낼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누가 나를 욕할 것인가?‘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 태양은 뜬다.’누가 한 말인지, 참……. 이 순간 내게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정말 닭 모가지를 비틀어서라도 새벽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왜 하필 「무인시대」야? 「삼국지」 좋잖아. 시원하고 스케일 크고! 좀스러워서 말이야, 참나…….’이의방의 군막에서 나온 후 나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랐다.
사실 흥왕사에서 다시 살아난 후로 내가 이 몸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내가 어린 병사로 강인번을 들고 의종의 어가 행렬에 제일 선두에 섰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견룡의 군막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정말 웃기게도.‘뭐야, 100년 후도 아는 내가 어디서 자야 할지를 모르네. 참나!’정말 아이러니하다.나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르는 미래의 일을 알고 있는데, 지금 당장 어디로 가서 잠을 자야 할지 모르는 바보인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하늘을 봤다. 낮에 정말 폭우가 내렸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 만큼 하늘에 뜬 달은 환했고 별들도 반짝였다.
그리고 그 반짝이는 달과 별보다 더 넓은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어둠이 보였다.어둠! 이 밤이 지나면…….‘이 밤이 지나면 많은 사람들이 죽겠군.’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좀 더 용기가 있었다면 무신정변을 막을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용기보다 탐욕이 조금 더 컸다면 막으려 발버둥을 쳤을 것이다.‘아니, 그건 용기가 아니야. 멍청한 거지. 어떻게 내가 무신정변을 막아? 난 겨우 어린 병사에 불과해!’나는 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시 깨어나고 나서 절대 다시는 아둔하게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똑 부러지게 살기 위해서는 이의방의 옆에 바짝 붙어 있으면서도 그와 거리를 둬야 한다.
참 어려운 일이 될 게 분명하다.‘우선은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자. 나 홀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정의나 올바름 같은 것은 이제 내 가치관에서 멀리하기로 했다.
난 단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럼 가만히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거다.
그런데 왜 이리 씁쓸한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하늘에 떠있는 달도 이런 나를 욕하는 것같이 밝게 나를 비추었다.
‘달에 비친 그림자가 청승맞게 늘어지는군!’누군가가 말했다. 그림자가 긴 것은 그 순간 후회하고 있다는 증거라고.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내 그림자가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왜일까? 무신정변이 일어나는 것을 알면서 그것에 편승하겠다고 마음먹은 지금, 왜 이리 내 마음이 답답한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내 마음을 꾹 누르고 있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죄책감? 이 순간에 내가 느낄 죄책감이 있을까?분명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리 내 마음이 답답한지 모르겠다.
떠있는 달과 별, 어두운 하늘을 보고 역사가 내가 아는 방향으로만 흐르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어쩌면 무신정변이 안 일어날 수도 있어.’사실 내가 두 명의 병사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 병사들은 좌승선인 김돈중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그럼 문신인 김돈중은 은밀하게 황제를 대피시키거나 환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신정변은 이 고려사에서는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어쩌면 내가 역사를 뒤집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저지른 첫 살인부터 무신정변의 불씨가 피워진 것인지도.‘내가 역사를 뒤집은 것인가?’무신정변! 이것은 분명 성공한 쿠데타이다. 그럼 내가 그 쿠데타를 성공하게 만든 장본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역사의 죄인일까? 영웅일까?’정말 오늘 내 그림자가 무척이나 길어 보인다.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그리고 이 순간 내가 알고 있는 역사가 내가 아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도대체 여기는 어디야? 절이 왜 이렇게 넓어?”
흥왕사는 고려 시대의 대표적 사찰이다. 고려 문종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었고, 매우 사치스럽고 장엄하여 신하들의 반대가 컸다.
그럼에도 1067년(문종 21년) 정월, 10년이 넘는 공사 끝에 낙성되었다.총 2,800칸의 규모로 지어진 흥왕사에 수많은 승려들이 모여들었지만, 계행(戒行)이 청정한 천 명만 가려내 머무르게 하였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때 남자 하나가 장엄한 소나무 아래서 달을 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물어봐야겠어.”
난 남자를 봤다.‘뭐야? 이름이 안 보이잖아?’달을 보고 있는 남자의 이름이 보이지 않자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나 다 보이는 것이 아닌가?’그 때, 달을 보고 있는 사람이 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남자의 이름이 머리 위에 나타났다.
‘김돈중?’달을 보며 한숨을 쉬고 있는 남자가 김돈중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얼굴을 보지 못하면 누군지 알 수 없다는 건가?’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복면을 쓴 사람은 누군지 알지 못한다는 거다.
‘내 능력에 이런 제약이 있었군.’약점을 알아두는 것은 나쁘지 않다.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면 꼭 얼굴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안 것이 다행이다.’그런데 왜 좌승선인 김돈중이 저렇게 술을 거하게 마시고 달을 보며 근심에 잠겨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조금 전 머릿속에 떠올렸던 역사는 내가 알고 있는 방향대로 흐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김돈중, 그와 나의 만남!이제 곧 이루어질 이 만남이, 그리고 내가 마음을 고쳐먹는다면 내가 배웠던 역사는 새롭게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짧은 순간에도 내 마음 한구석에서 자꾸 그 생각을 부추기며 소리치는 것 같았다.만나라! 김돈중, 그에게 말해라! 무신정변을 막아라! 그렇게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에 들었던 환청과는 다르다. 내가 들었던 환청은 또렷했다.
그에 반해 지금은 그저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여리기만 하다. 그러니 환청은 아닐 것이다.‘으음……. 뭘까? 이 마음은…….’순간 나에게서 사악한 마음이 일었다.
‘문신과 한 다리 걸쳐놓는 것도 나쁘지 않아.’지금 나는 병사의 신분이다.만약 이의방과 이고, 그리고 정중부에 의해서 일어날 무신정변이 내가 알고 있는 방향과 다르게 돌아간다면 나는 칼 한 번 들지 않고 역도의 병사가 되어 죽임을 당할 것이다.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내 목이 잘려 장대에 꽂혀 저잣거리에 걸리게 될지도 모른다.이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억울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김돈중이 나를 불렀다.
“너는 누구냐?”
거의 새벽으로 흐르는 시간, 절을 헤매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그 역시 잠시 놀란 것 같았다.파르르 떨리는 눈빛?자신이 근심에 싸여있는 것을 들켰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이 깊은 새벽에 사람의 인기척을 느껴서일까?그는 분명 나를 보고 놀란 눈빛이 역력했다.
“길을 잃었습니다.”
난 어린 병사이다. 이런 변명이 가장 좋을 듯했다. 이 넓은 흥왕사에서 길을 잃었다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사실 중들도 가끔 길을 잃어버린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 이 흥왕사는 처음 오는 사람이라면 길을 잃을 만도 하지.”
김돈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소속의 장졸이냐?”
“저는 견룡군에 있습니다.”
“그래?”
“예, 그렇습니다.”
“견룡행수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김돈중은 내게 의도적으로 이의방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해 김돈중은 이의방을 비롯한 무신들을 경계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 대답에 김돈중은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피식 웃었다.
“그렇지, 어린 네가 무엇을 알겠느냐. 저쪽으로 가면 견룡군 군막이 있다.”
김돈중은 술에 취해선지, 아니면 내가 어려서 그런지 견룡군 군막이 있는 곳을 알려줬다.
“예, 감사합니다, 좌승선 대감!”
“내가 좌승선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순간 김돈중이 나를 뚫어지게 봤다.‘아차! 실수다.’내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말해 버렸으니 실수가 분명하다.
“이 고려에 좌승선 대감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가?”
어린 병사인 내가 자신을 알고 있다니 기분이 좋았는지 김돈중은 피식 웃었다.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권력을 많이 휘두르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렇습니다. 좌승선을 모르면 이 고려 사람이 아니지요.”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오늘 달이 참 좋구나!”
좌승선 김돈중이 내게 말하는 것인지 혼잣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게 그렇게 나직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달이 참 좋습니다.”
난 김돈중의 말을 거들었다.‘어떻게 김돈중과 한 다리 걸치지?’내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지금 이의방과 이고, 그리고 정중부가 내일 보현원에서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다가 무신정변이 성공하면 나는 문신들과 같이 도륙당할 게 분명했기에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해 줄 수는 없었다.하지만 어느 세상이든 어떤 상황이든 만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만약에 무신정변이 정말로 만약에 실패로 돌아간다면…….‘살짝 빠져나갈 구멍을 파놔야 하는데…….’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정말 사악한지도 모른다.하지만 이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방법이다.
나는 정말 변했다. 죽다 살아나면 사람이 다 이렇게 변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내 다짐과 같은 넋두리를 상기하면서 스스로 변하기를 갈망하고 있고, 또 그것이 행동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네가 달을 아느냐?”
김돈중의 말에 난 속으로 달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 이죽거렸지만 겉으로는 그저 살짝 고개를 숙였다.이 시대에서 달은 곧 시의 소재이며 풍류 중에 하나인 것 같았다.
“어린것이 어찌 알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김돈중과 눈을 마주쳤다.자신이 당당하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는 의연하게 상대방의 눈을 보는 것이 가장 좋다.
지금 내가 봤을 때 김돈중은 어느 정도 술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달의 밝음에도 어느 정도 취해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아닌 어린 병사와 이렇게 말을 섞고 있는 것인지도.‘그래, 자기 아버지의 시를 읽어주면 되겠지.’머리에 번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른다는 네가 나를 당당히 보면서 눈으로는 알고 있다고 말하는구나!”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아는 만큼만 말씀 올리겠습니다.”
내 당당함에 김돈중은 호기심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무슨 의도에선가 김돈중도 계속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원래 권력을 가진 사람은 아랫것을 유심히 보는 경우가 드물다.그런데 지금 김돈중은 무엇 때문인지 나를 관찰하는 것 같았다. 물론 이것도 내 생각에 불과했다.
“하하하! 아는 만큼만?”
“그렇습니다.”
“좋다, 달도 좋으니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이건 시 한 수를 지어보라는 말이다.사실 어린 병사가 시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하다 못해 놀라운 일이다.
무신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 반절 이상이 글을 잘 읽지 못하니 말이다. 물론 고위급으로 올라가면 어느 정도 글을 읽을 줄은 알았다.
하지만 시를 짓거나 풍류를 논할 정도가 되는 인물은 그다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무신들이 문신들에게 천대를 받았다.‘정말 술과 달에 취했나 보군!’난 힐끗 김돈중을 봤다.
“어디 해보거라.”
“예, 좌승선 대감!”
난 짧게 대답하고 달을 봤다.‘골방에 앉아 고시 몇 수 알아둔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되는구나.’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윽하고 우람한 대궐에 밤이 깊은데 등불산과 불나무들이 어울려 찬란하네.”
첫 시구가 내 입에서 나오자 김돈중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나를 다시 봤다.‘좀 놀랐을 거다.’지금 내가 읊고 있는 시는 김돈중의 아비가 되는 김부식이 지은 시이다. 그러니 그가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단옷에 날리는 봄바람은 부드러운데 황금 비취 선명하고 새벽달은 차갑구나. 화사한 일산은 북극성처럼 높이 솟았고 옥로는 궁전 가운데 마주 보고 있구나.”
그 때 나를 뚫어지게 보던 김돈중이 시의 후반부를 말했다.
“임금님께서 근엄하여 성색을 멀리하시니 치장한 것을 자랑하지 마소.”
그렇게 김돈중은 시의 후반부를 말하고 다시 나를 봤다.
“네가 어찌 이 시를 아느냐?”
“오다가다 듣게 되었습니다.”
“오다가다 듣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시더냐?”
김돈중의 목소리가 약간 격양되었다.아마 그는 놀랐을 것이다. 어린 내가, 그것도 병사인 내가 자기 아비의 시를 이렇게 줄줄 낭송을 하니 놀랍다 못해 신기했을 것이 분명하다.‘이제 호기심은 자극했네.’난 속으로 내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병졸이지만 소인이 처음부터 무부처럼 창검을 잡지는 않았습니다.”
이럴 때는 좀 진중하면서도 근엄하게 나가야 한다. 얼마 살지는 않았지만 큰 사연이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 무슨 내력이 있다는 것이냐?”
궁금해 묻는 것이 아니라 확인해 보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나를 비교해 보겠다는 그런 눈빛 같았다.‘뭐지? 저 눈빛?’김돈중이 나를 보는 눈빛이 이해가 안 되는 순간이었다.
“있기는 하오나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신비주의! 괜찮은 전략이다.
“하하하! 말할 수 없다? 그럼 그 시의 뜻을 풀어볼 수는 있느냐?”
“예, 정확히는 모르지만 풀어볼 수는 있습니다.”
“그래, 어디 한 번 풀어봐라.”
“예, 이 시는 불교를 숭상하는 고려를 찬양하기 위해 김부식 대감께서 지으신 시옵니다.”
“그럼 김부식 대감이 누군지 알고 네가 이 시를 읊었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김돈중 좌승선의 부친이 되시지 않습니까?”
“오호! 놀랍고도 요상한 놈이구나.”
오늘 이 소리만 세 번은 듣는 것 같다.
“그렇게 보이십니까?”
“그래, 계속 뜻을 풀어봐라.”
“예, 우선 연등회와 팔관회를 칭송하는 의미로 황궁 밖에서 그려지는 연등회의 밤을 나타낸 시입니다. 또한 황상을 높이 모시고 황상에게 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는 충간을 암시하는 시이기도 합니다.”
내 시 풀이를 듣던 김돈중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요상한 놈이 나를 꾸짖는 것이냐?”
이럴 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