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웅-11화 (11/620)

< -- 간웅 1권 -- >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작 어린 병사로 이 고려에서 산다는 것은 내게 모진 삶이 될 거라는 점이다. 내가 역사를 모르고 미래를 몰랐다면 불나방처럼 이의방이 내민 손을 덥석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미 역사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애매하게 다리만 걸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자리 잡고 살기 위해서라도 무신정변에 동참해야 한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절대 깊이 개입해서는 안 돼. 그렇다고 해서 잊힐 만큼 공이 없어서도 안 돼.’

난 점점 더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너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으냐?”

“예?”

나는 이의방이 어린 내게 의견을 구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고금을 통틀어 어리다고 무시하는 것은 항상 진리에 속하는 지랄인데 말이다.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는 영웅이거나 간신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간웅일 것이다.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는 나에게 구명지은이라고 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제 모르겠다는 말로 너를 숨기지 마라. 물론 누구도 사자의 뒤에 숨은 여우라고 욕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끝까지 뒤에 숨는다면 얻는 것은 썩은 고기뿐이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보고 숨을지 전면에 나설지 결정해라. 그러니 숨기지 말고 말하라는 거다.”

이 시점에서 살짝 내 능력을 보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기는 것은 없습니다.”

“그럼 이것이 너의 모습이라는 것이냐?”

“저는 그저 생각나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그럼 지금은 무엇이 생각나느냐?”

내 말에 이의방이 나를 뚫어지게 봤다.

‘명석하게 보여야 한다. 하지만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어리게 보이기도 해야 한다.’

정말 고민이 되는 순간이었다.만약 역사에서 이의방이 자신의 후손처럼 나라를 건국하기라도 한다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 나를 자랑할 것이다.

하지만 이의방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의방과 정중부, 그리고 뜬금없이 정에 약한 이의민을 볼 때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권불십년이었다.

그러니 너무 깊게 인연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거다. 결국 역사는 흐르니 말이다.

‘그냥 이의방을 황제에 등극시켜?’

하지만 이런 생각은 정말 어린놈의 치기일 것이다. 이 순간 1세기 동안 무신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왜 고려 왕조를 무너트리고 새 왕조를 세우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이의방은 그냥 원래 성격이 그렇다고 치고, 또 처음 무신정권을 열 때 이고와 채원, 정중부도 그렇다고 치면 되지만, 이의민과 최충헌은 왜 왕조를 세울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정말 이 짧은 순간에 오만 생각을 다 해야 하니 머리가 지근거렸다.

‘무인으로서는 식견과 나라를 통치할 안목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식견이 없어서 그러는 걸 거야. 그거야!’

난 그런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런 식견은 유능한 신하로 채우면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따지고 보면 촉을 세운 유비도 그리 유능한 인물은 아니었으니.정말 자로 재어 꼼꼼히 따지고 보면 유비나 이의방이나 그저 그런 존재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품을 수 있는 꿈이 다르기 때문인지도 몰라.’

이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왕을 꿈꾸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럼 나는?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난 그냥 관망자로 이 시대에서 절대 굶어 죽지 않고 잘 먹고 잘 살아서 못 간 장가도 시원하게 가는 것이 소망이다.

그릇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볼 수 있는 눈높이가 다르고 들을 수 있는 귀가 다르니 다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꿈이 다른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의방은 여전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내심도 있고 말이야…….’

나는 다시 이의방을 봤다.

어쩌면 나는 이의방에게 매료된 것일지도 몰랐다.정말 이제는 몇 마디 해야 하는 순간이다.

“그럼 어린놈이 몇 마디 올리겠습니다.”

“그래, 해봐라.”

“우선 보현원에서는 최대한으로 잔인하셔야 할 것입니다.”

“최대한으로 잔인해라?”

“그렇습니다.”

“이유인즉슨?”

“놈들은 황상의 손발이지 않습니까.”

내 말에 이의방은 놀라 나를 빤히 봤다.

“그리고 황궁으로 진격하실 때 반드시 불을 지르시고 황태후를 수중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태자가 아니라 황태후를?”

“그렇습니다.”

“이, 이유가 무엇이냐?”

난 잠시 이의방을 봤다.

“거사라면 거사이지만 난이라고 말하면 난이옵니다.”

내 말에 이의방은 눈살을 찌푸렸다.이럴 때는 더욱 몰아쳐야 한다.

“성공하면 거사이고 실패하면 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

“그런데 행수께 성공한 거사라고 해도 현 황제에게는 언제나 난이 될 것입니다.”

내 말에 이의방은 놀라 눈이 커졌다.

“지, 지금 네가 하는 말은…….”

“그럼 현 황제를 두고 보실 수 있으십니까? 행수께서는 그렇게 두고 보실 수 있으셔도 황상께서는 절대 끝까지 두고 보지 못하실 것입니다.”

이건 폐위를 의미하는 말이었다.사실 여기까지도 아주 많이 개입한 거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이 정도는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거였다.

“폐, 폐위를 말하는 것이냐?”

“그런 수순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옥새를 품에 꼭 안고 계십시오.”

“옥새를?”

“정중부나 이고, 그 누구에게도 절대 넘겨줘서는 안 되는 것이 옥새입니다. 그들에게 황실 보고를 주시고 행수께서는 옥새를 품에 꼭 품으십시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

“그렇습니다. 유사시 옥새가 바로 황명이옵니다.”

“그렇지, 너의 말이 옳다.”

“그리고…….”

“그리고 또 뭐가 있느냐?”

“죽일 자는 반드시 죽이고 살릴 자는 반드시 살려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이의방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건 무슨 말이냐?”

“황궁에 있는 모든 문신들을 다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쥐새끼 같은 것들을 다 죽이지는 말라고?”

이의방은 인상을 찌푸렸다.

“거사만 성공시키고 낙향하실 요량입니까?”

내 말에 다시 한 번 이의방이 나를 뚫어지게 봤다.

“그, 그 말은…….”

“검으로 정권을 잡을 수는 있지만 절대 유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문신들의 죄를 따지는 것은 문신이어야 합니다. 곧은 말을 하는 문신들은 살려두시는 것이 국정을 운영하는 데 훨씬 편하실 것이옵니다.”

내 마지막 말을 듣고 이의방은 입이 쩍 벌어졌다. 역시 너무 깊게 발을 넣은 것 같았다. 이제는 어린 모습을 보여줘야 할 차례다.

“알았다, 내 너의 말대로 할 것이다.”

난 한없이 바라는 것이 있다는 눈빛으로 이의방을 바라봤다.

“더 할 말이 있느냐?”

“뭐 꼭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해 봐라.”

“그게……. 거사를 성공하시면…….”

“그래, 거사를 성공하면 너와 영화를 같이 누릴 것이다.”

이의방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게 나랑 연결이 되려 하는 것 같았다. 이래서는 안 된다.

“영화는 같이 누리는 것이 아니지요. 권력은 나눌 수 없고 나눠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권력을 나누려 한다면 끝내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그러니 움켜쥐실 수 있을 때 움켜쥐십시오.”

“뭐라?”

“저에겐 소박하게 시골 촌락 어느 현에 잘 지은 집 한 채와 마누라 몇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뭐라?”

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보다 이의방은 더 황당한 눈빛이 되어있었다.

“그게 네가 바라는 것이냐?”

“예, 배부르고 등 따시고 옆에 예쁜 처 몇만 있으면 그게 제일이지 않겠습니까?”

사실 고려에서 첩을 둔다는 것은 욕을 먹는 일이다. 그런데 어린 내가 첩을 원하고 재물을 원하니 이의방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내가 영악하기는 하나 재물에 욕심이 있고, 또 계집에 욕심이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거였다. 누군가에게 의심을 사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보로 보이거나 탐욕스럽게 보이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처를 몇이나 둔다고? 하하하!”

나를 놀랍게 보던 눈빛이 순간 싹 사라졌다.

“꼭 집어서 물으시니 저는 그냥 셋 정도면 딱 좋겠습니다.”

“어린놈이 셋이나?”

“안 되는 것입니까?”

“왜 안 되겠느냐? 우리가 거사를 성공하면 너는 황궁에 있는 상궁 중에 마음에 드는 계집을 마음껏 골라가라.”

이럴 때 눈이 번쩍 뜨이는 연극을 해줘야 한다.

“참말이셔야 합니다.”

“물론이다, 회생아!”

“예, 행수님!”

“너는 참 묘한 놈이다. 하하하!”

그렇게 나는 위기를 넘겼다.하지만 그것은 그저 내 생각일 뿐이고 저렇게 호탕하게 웃고 있는 이의방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른다.

이렇게 계속 작은 것만 탐내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의방은 끝내 나를 그런 존재로 여길 것이다.원래 첫술에 배부른 법은 절대 없으니 말이다.

‘10년 살다가 죽을 수는 없지.’

난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뭐, 내가 아예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시대가 최씨 정권의 시대 초기라면 난 어떻게든 최충헌에게 잘 보이려 노력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최충헌의 반대편인 황제파에 붙어서 어떻게든 최충헌을 몰아낼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혼란의 시기이다. 이렇게 혼란한 시기에는 누구의 편에 서는 것보다 누구에도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 현명할 거다.

허나 그보다 더 현명한 것은 누구와도 적이 되지 않는 거였다. 이런 시기에 권력을 탐내지 않고 필부의 욕심만 부린다면 누구도 나를 적으로 삼지 않을 것이다.

그럼 되는 거였다.

‘이 정도 말해 주는 것은 절대 역사를 거스르는 일이 아니야.’

난 그런 생각을 하고 바보처럼 히죽거리며 이의방을 봤다.

그런데 이의방이 나를 빤히 보고 있다. 아직 의심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나를 그렇게 속이고 싶은 것이냐?”

“예?”

“권력이 탐나지 않는 사내가 어디에 있단 말이냐?”

순간 난 이의방이 불학무식한 무부는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조상이 있으니 그의 후손이 훗날 조선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왕의 씨는 뭐가 달라도 다른 법이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정 네가 바라는 것이 그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이럴 때는 또 다부져야 한다.

“죽다 살아나보니 위험 앞에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내 눈에 구멍이라도 낼 듯한 이의방의 시선을 나는 담담히 받아냈다.

“위험에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

“권력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위험이 따르는 법입니다. 전 위험 없이 쉬이 살고 싶습니다.”

“죽다 살아나보니 오래 살고 싶다?”

“그렇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내 너에게 약속하마.”

“예, 감사합니다.”

난 바로 목례를 했다.

“그렇게 해박해진 것도 다 죽다 살아났기 때문이겠지?”

내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한 이의방이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난 그렇게 말하고 조심히 일어섰다.이렇게 내 새로운 삶의 첫날이 지나갔다.

크게 놀라고 풍랑같이 앞날을 알 수 없는 하루였지만 아마 내일 닥칠 일에 비하면 오늘 일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마자 내가 두 명을 저세상으로 보냈다는 점이다.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난 꼼짝없이 뉴스 기사 1면을 장식했을 것이다.희대의 살인마!하지만 여기는 분명 고려 시대이다.

대한민국과 달리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영웅이 되는 세상이다.난 영웅 따위는 되고 싶지 않다.

그저 희희낙락할 수 있는 내 터전 정도만 가지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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