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1권 -- >
“하나 불만이 있다고 반드시 일어난다고 보장할 수는 없네.”
“그렇기는 하옵니다. 하나 그들도 반드시 상장군이 꿈꾸시는 고려를 위해 분연히 일어날 것입니다.”
이의방은 상장군 정중부를 부추겼다. 거사가 성공한다면 모든 공은 상장군 정중부의 것이 된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아니라면…….”
“아니라면 제압할 것이옵니다.”
“그들과 어찌 맞서겠다는 말인가?”
“저희는 그 수천의 군사와 맞서지 못하지만 상장군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상장군께서 거사를 주도하오시면 수천의 군사뿐만 아니라 변방에 있는 수만의 군사들 역시 상장군의 뜻을 따를 것이옵니다.”
이의방이 다부지게 말했다.그랬다. 지금 뒤로 물러나 있으려는 상장군 정중부를 끝내 설득하려는 이의방은 이 새벽의 거사 이후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는 그들이 나를 따를 것이라 확신하는가?”
“확신하옵니다. 수천의 군사들 역시 상장군이 겪으신 치욕을 잊지 않고 계십니다.”
“으음!”
정중부는 다시 한 번 신음했다.
“그리고 무인 중에 기꺼이 일어서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저희는 너무나 오랫동안 참아왔습니다.”
이의방의 말에 정중부는 되물었다.
“어찌 기꺼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무인으로서 각고의 노력으로 벼슬이 올라간들 겨우 어린 문신 놈의 횡포에 어찌하지 못하는 이 조정에서 웅크리고 있을 무인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의방, 자네는 나를 자꾸 선동하는군.”
“죄송합니다, 상장군! 하지만 무신들의 상황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건 나도 아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병력으로는 절대 차후 거사를 성사시킬 수 없어.”
“이곳에서 거사만 이루어지면 황궁에 있는 채원이 황궁을 장악하기로 했습니다.”
이의방의 마지막 말에 정중부는 다시 한 번 갈등하는 듯 보였다.
“이렇게까지 견룡행수가 간청을 드렸는데 상장군께서 의기투합하지 않으시겠다면 이 밤에 저희들끼리라도 거사를 치를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의방의 말을 듣고 있던 이고가 나섰다.
“자네들끼리?”
“그러하옵니다. 이만한 날이 없습니다.”
“경거망동하지 말게. 일을 그르칠 수 있네.”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정중부도 아예 거사의 뜻을 품지 않은 것은 아닌 듯했다.
“이미 저희는 이곳에 올 때부터 결심을 했습니다.”
이고 역시 정중부를 노려봤다.그의 성정으로는 검을 뽑아 사달을 내도 벌써 냈어야 한다. 그런데 이의방 때문에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결심으로 거사를 이룰 수는 없는 노릇이야!”
“상장군!”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야. 자네들이 말한 것처럼 내가 자네들을 지지하고 지원하지 않으면 군이 움직이지 않아.”
상장군 정중부의 말에 이의방과 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그리고 밖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이의민도 나를 의식하지 않고 인상을 찡그렸다.
난 백여우 정중부를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사자의 뒤에 숨은 여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밉지만 배워야겠지. 정중부, 저 늙은이가 내 롤 모델이 되겠군. 젠장!’
어쩌면 거사 후에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이 지금 정중부의 행동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군막을 지키고 있는 이의민과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는 어디 출신입니까?”
뜬금없는 물음에 이의민이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너는 내가 무섭지도 않냐?”
사실 이의민의 도끼를 보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하지만 친해지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무서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싫어하는 것보다 무서워하는 것이 더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의민의 말을 통해 대부분의 병졸들이 이의민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왜 무섭겠어요.”
“그런데 왜 다른 것들은 날 다 무서워하지?”
내게 질문을 던지는 것인지 혼잣말을 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하지만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오지랖을 넓히는 것이 가장 좋다.
“지나가는 참새 거시기를 보게 되는 경우가 있으면 씩 웃으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조금은 덜 무서워할 겁니다.”
“뭐? 참새 거시기를 보고 웃어라?”
“예.”
“그럼 너는 참새 거시기를 본 적이 있누?”
“없죠.”
난 그렇게 말하고 씩 웃었다.
“나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본 것처럼 웃으라는 말씀입니다.”
“뭐라? 하하하! 이놈 참 요상한 놈이구나.”
이의민이 나를 보고 웃었다. 그것은 그가 나에 대한 경계를 어느 정도 풀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친목 다짐에 들어갈 차례다. 남자와 남자가 말을 섞으면 친분이 생기고, 계집과 계집이 말을 섞으면 분란이 생기고, 남자와 계집이 말을 섞으면 사달이 난다는 소리가 있다.
물론 대부분의 남자와 계집들은 말을 섞는 것보다 몸을 섞는 경우가 더 많지만. 이건 웃자고 하는 소리이다.하지만 아예 틀린 말도 아니다.
고려 때는 조선 시대와 다르게 자유연애가 보장되는 그런 자유분방한 시절이니 말이다.
자유연애? 말만 들어도 흐뭇하다.
“고향이 어디세요?”
물론 난 이의민이 태어난 곳이 어딘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이의민은 최충헌과 더불어 무신정권의 황금기를 연 인물로, 미천한 신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중부를 제거하고 등장한 경대승에 이어 무신 최고 집권자로 12년간 권력을 쥔 인물이다.
정말 최씨 다음으로 가장 오래 해먹은 인물인 것이다.
1183년 7월 경대승이 나이 서른에 갑자기 병이 들어 죽자 그의 측근들은 모두 제거되고 정권은 이의민에게로 돌아갔다.
역사에 따르면 이의민은 경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소금 장수인 이선이며 어머니는 영일현 옥령사의 종이었다. 고려 시대 신분이 어미를 따라가는 것이 원칙이니 이의민 역시 옥령사 사노비라는 것이 정확한 신분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별걸 다 알고 있네.’
이 모든 것이 드라마를 쓰겠다고 연구하고 극본을 필사한 덕일 것이다.정말 전생이라고 하기도 애매하지만 그때의 나는 무식할 만큼 우직했다.
그리고 파노라마처럼 주입된 지식 덕분이기도 하다.
‘그러니 굶어 죽지.’
난 바로 인상을 찡그렸다.
굶어 죽은 그런 지랄 맞은 기억은 까맣게 잊어야 하는데 문뜩 고향에 두고 온 애인처럼 생각이 나니 미칠 지경이다.
하여튼 이의민의 성씨는 경주 이씨이고 신라 육두품 출신이나, 부친의 직업으로 볼 때 이의민의 집안은 고려 시대에 큰 영화를 못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이의민의 출생에 대해서는 베트남 귀화인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물론 가설이다.
하지만 가설이 어느 순간 정설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고 보니 이의민의 얼굴빛이 칠흑처럼 어둡다는 글귀를 어느 야사에서 본 것 같다.얼굴이 까만 것은 동남아 계열이다.
그럼 베트남 사람일 수도 있다. 뭐, 야사도 정사에 기반을 둔 이야기이니 전혀 못 믿을 것은 아니다.
하여튼 이의민의 본관은 경주가 아니라 정선 이씨라는 것이 그것인데, 정선 이씨는 베트남 귀화 성씨다. 그 시조인 이양곤은 안남국 사람으로 내가 살던 시기에는 안남국을 베트남이라 불렀다.
남평왕의 셋째 아들로, 고려 때인 12세기 초 금나라와의 전쟁을 피해 한반도에 들어와 경북 경주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의민이 정선 이씨라는 설이 맞다면 이양곤의 6대손이 된다.
‘그럼 왕족이 되는 거네?’
난 힐끗 이의민을 봤다. 정말 왕족이라고 하기에도 빠질 것이 없는 풍채였다.
‘그런데 베트남 사람이 저렇게 컸나?’
팔 척 장신의 이의민이기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혼혈이라서 그런가?’
하여튼 그는 그런 인물이었다.
뭐, 이것 말고도 의종의 등뼈를 부러트려 죽인 일도 있고, 귀신을 무서워하고 미신을 신봉하는 그런 인간이기도 하며 까막눈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의민의 사람 됨됨이 같은 건 분명 아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 당장 의종을 죽일 것도 아니니 멀리할 이유는 없다.
하여튼 권력의 정점에 설 자로 내 여우 같은 삶을 위해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영일현인데, 아누?”
이다음에 내가 할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거기에 옥령사 있죠?”
옥령사는 어릴 적에 이의민과 그의 어미가 절 노비로 있던 곳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학연, 지연, 혈연에 깜빡 넘어간다. 아마 그것은 고금을 통틀어 같을 것이다.
“그래, 옥령사를 네가 어찌 아누?”
“제 어머니가 그 절 노비였어요.”
내 말에 이의민은 멍하니 나를 봤다. 사실 옥령사가 그리 큰 절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난 옥령사가 어딘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의민과 돈 안 들어가는 공통점 하나를 만들어놓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이렇게 처세한 것이다.
“그래?”
“예, 그런데 왜 그러세요?”
물론 이의민이 이런 표정을 보이는 것은 나를 보고 자신과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나는 그저 모른 척하면 된다.
괜히 아는 척하면 산통을 다 깨는 경우가 생기니.
‘이렇게 다리 하나 걸쳐놓는 거지.’
난 속으로 씩 웃었다.아마 지금 이 순간 이의민은 수많은 고민을 할 게 분명했다.
‘옥령사가 큰 절도 아니고 여사노비가 많이 있는 것도 아니지.’
어쩌면 나는 정말 사악한 처세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비가 누군지 아누?”
“모르는데요.”
“몰라?”
“예, 잘 몰라요.”
“그럼 어미 이름은 아누?”
이의민은 내게 계속 질문 공세를 했다.그런데 이제부터 정말 대답을 잘해야 한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도 안 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도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내 생활 지침이다.
“거기서 태어나기만 했어요.”
“거기서 태어나기만 했어?”
“예.”
“그런데 어찌 옥령사를 아누?”
“제 주인이 제가 울기만 하면 태어난 옥령사로 보내서 머리 깎아 중 만든다고 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이의민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이 고려 시대에 중을 만들어 준다면 큰절이라도 해야 하는 일이 분명한데, 이의민은 나에 대한 측은지심에 내 실수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넘겨버렸다.
“어미 이름은 정말 모르고?”
“예, 형이 몇 있는데 그중 몇이 죽었다는 것만 압니다.”
역시 나는 사악하다. 이 마지막 말에 이의민은 더욱 나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알 듯 모를 듯한 애착을 가질 것이다.
“형이 몇 있는데 죽어?”
“예.”
사실 이의민의 형 셋도 사건에 휘말려서 죽임을 당했다. 나는 알고 있는 지식을 최대한 이용해서 여우 짓을 하고 있었다. 다른 이의 아픈 기억을 이용해서 말이다.
‘지 동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면 되지.’
이래서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맞는 듯하다.
“네 이름이 뭐냐?”
이제 이의민은 내 이름까지 묻게 되었다. 내가 한 말에 놀라 저러는 것이다.
사실 자신의 형 셋이 사건에 휘말려 죽었다는 것을 아는 자는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보도 못한 내게 그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놀랄 수밖에.
‘이름?’
난 순간 속으로 당황했다.
내가, 아니, 이 몸의 주인이 번개를 맞고 쓰러진 후에 내가 바로 깨어났다. 그래서 이 몸의 주인의 이름을 미처 알아두지 못했다.
‘어떻게 하지?’
난 순간 고민이 되었다.
그 때 머리에 번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원래 이름이 있는데 오늘 죽다 살아나서 회생이라 할 생각입니다.”
“회생?”
“예, 다시 살아났다고 해서 회생이라고 할 참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이의민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나를 보고 뭔 말을 해주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안 되겠다는 듯 나를 봤다.
“그런데 회생아!”
“예.”
나는 이의민을 보고 웃었다.
“오늘 밤부터 내일까지 몸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 순간 내가 풀어놓은 여우 짓에 이의민이 넘어갔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의민을 내 옆에 두면 수호장이 따로 필요 없을 건데…….’
난 용력의 사내 이의민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하여튼 몸조심해라.”
이의민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봤다. 저런 표정은 더는 나랑 말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말하지 않겠다는데 괜히 건드릴 필요는 없지. 하여튼 이의민에게 다리 하나는 살짝 걸쳐놨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무신정변의 삼대 주역 중 둘과 이미 인연을 맺어놓았다. 이의방은 내 구명지은으로 엮어놨고, 이의민은 혹시 모를 씨 다른 형제로 묶어놨다.
물론 이의민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게 위급한 일이 발생할 시 단칼에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점이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난 흐뭇하게 씩 웃었다. 그리고 나 역시 이의민처럼 앞만 봤다.내가 그렇듯 이의민도 군막 안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상장군, 정말 때를 놓치실 것이옵니까?”
성정 급한 이고가 피를 토하듯 상장군 정중부에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군막 밖으로 쩌렁쩌렁 울렸고, 그와 동시에 나와 이의민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 때 다시 한 번 내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거사는 흥왕사가 아니야!’
지금까지 내가 잊고 있었던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