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1권 -- >
정말 혼돈의 연속에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그렇게 혼돈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아니, 현실이든 꿈이든, 그것도 아니면 이곳이 지옥이든 천당이든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그리고 난 다시 내 앞에 있는 남자를 봤다.
이의방이라고 적혀있는 글자가 그의 머리 위에 둥둥 떠있었다.그와 동시에 내 뇌 속에서 마지막으로 밀려왔던 어린 병사의 기억이 떠올랐다.
‘서, 설마…….’
내가 어쩌면 저 남자의 품에 안겨 죽어가던 어린 병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화, 환생인가? 그게 아니라면 영혼 이동? 그것도 아니면 빙의?’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봤다.그 순간 우상 같은 부처의 눈동자가 내 눈동자와 마주쳤다.
나를 보며 웃고 있는 듯한 부처의 미소가 마치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나를 보고 있는 우상 같은 부처의 웃음은 다시 한 번 살아보라는 것 같았다.
“극락왕생을 빌어주십시오, 스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극락왕생? 그럼 죽었다는 거잖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난 오감을 느끼며 이렇게 살아있다.
그런데 남자는, 아니, 이의방은 내가 죽었다고 말하고 있었다.그럼 저기 가만히 앉아있는 이의방은 죽었던 나를 여기까지 안고 온 은인일 것이다.
정말 매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일만 잔뜩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만, 연등제가 한창이라…….”
이의방의 옆에 앉아있는 젊은 중은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흥왕사에 황상께서 계시기에 사사로이 함부로 제를 올릴 수 없습니다.”
중의 말을 듣고 내가 누워있는 이곳이 바로 흥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흥왕사? 연등제? 그리고 이의방!’
만약 내 눈에 보이는 자가 정말 이의방이고 이곳이 흥왕사라면, 또 그것을 온전히 믿는다면 지금 극변하는 역사의 흐름 정중앙에 내가 서있는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일들이 너무나 믿기 버거웠다.
‘대체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나고 있는 거야?’
나도 모르게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비용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님!”
이의방이 돈 이야기를 꺼내자 그제야 젊은 중은 왜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이제야 꺼내느냐는 듯한 표정을 살짝 지었다.
“제가 저 아이의 극락왕생을 위해 어떻게든 제단을 만들어보죠. 좋은 장작을 쓰고, 또 좋은 기름을 써서 이 망자의 혼백을 위로해 보겠습니다, 시주님.”
돈을 내겠다는 말에 중은 시주님이라고 바로 호칭을 달리하여 불렀다.
“고맙습니다, 스님.”
이의방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뭐? 좋은 장작과 기름? 날 화장하겠다는 거야?’
놀라서 눈이 번쩍 뜨일 판이었다.
믿기지는 않지만 죽었다가 깨어났고 누군가의 호의에 의해 다시 태워질 판이니 말이다.난 이 순간 어떻게든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가만히 있다가는 내 극락왕생을 도와주는 제단 장작불에 태워져 진짜로 극락왕생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
‘믿기지는 않지만 살아났으니 다시 죽을 수는 없지.’
난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야 해!’
그 짧은 순간 내 몸, 아니, 이 몸이 얼마나 움직일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이의방과 젊은 중이 볼 수 없게 조심스럽게 주먹을 쥐었다.
‘뭐야, 이 느낌은?’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왜 이러지?’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거대한 활력 같은 것이었다. 정말 이 상태라면 산도 뽑을 수 있고 하늘도 찢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이 힘이 다시 한 번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었다.
‘의심하지 말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의심하기에는 너무도 완벽한 생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천히 내 기억인지, 아니면 다른 이의 기억인지 모를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내 영혼 속에는 두 개의 기억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몸의 마지막 기억은 번개를 맞아 쓰러지는 것으로 끝이 났다.
‘서, 설마 번개를 맞은 건가?’
하늘에서 내리치는 번개를 정통으로 맞고 살아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렇다면 번개를 맞은 이 몸은 분명 죽은 것이 맞다.
그 후에 기적이든 뭐든 다시 살아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 인해 내 의식이나 영혼이 이 몸 안에 들어온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모든 것은 개꿈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그, 그냥 사, 살아난 거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난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이게 꿈이라도 좋다. 아니, 이게 환상이라고 해도 좋다.
꿈이라면 깨지 않으면 그만이고, 환상이라면 영원히 빠져있으면 되니까.
‘뭐든 상관없다.’
난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자 알싸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신음했다.
“으으윽!”
그 순간 놀란 네 개의 안구가 바닥에 가만히 쓰러져있는 나를 봤다.
“부, 분명히 주, 죽은 아이였잖소?”
젊은 중이 말까지 더듬으며 이의방에게 물었다.그러자 이의방은 뚫어질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마치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그의 불타는 눈동자와 함께 나 역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웠다.
‘이제는 무엇도 외면하지 않고 치열하게 살 것이다. 무엇이 되든 후회하지 않게!’
4장 정변의 불씨를 던지다
북변 갑산 관청 뒤편, 관노가 기거하는 초가.
검은 도포에 검은 삿갓을 쓰고, 허리에 차고 있는 검으로 보아 그들은 무사인 듯했다. 그들은 지금 관노들이 기거하는 초가에 들이닥쳐 늙은 관노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그 아이가 없다고?”
키가 큰 무사가 늙은 관노를 보며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달포 전에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늙은 관노의 말에 검은 도포를 입은 무사가 인상을 찡그렸다.
“달포 전에?”
“그렇사옵니다.”
다른 무사가 고개를 돌려 늙은 관노에게 묻던 무사를 봤다.
“당한 거야! 또 한발 늦었다. 벌써 7년째 이렇게 당하고만 있다니!”
“그러게 말이네, 그러게…….”
키가 큰 무사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다시 늙은 관노를 보며 물었다.
“어디로 갔다는 건가?”
“관노록을 보면 죽었다고 되어있는데…….”
키 작은 무사가 키 큰 무사를 보며 말했다.
“죽지는 않았을 것이옵니다. 갑산 현령께서 그리 기록하며 관노를…….”
“관노를?”
키 큰 무사가 되물었다.
“그러니까…….”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을 보이는 늙은 관노였다.
그래서 키 작은 무사가 검을 살짝 뽑아 위협을 해봤지만 하도 모질게 산 늙은 관노라 그런지 그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자 검은 도포를 입은 키가 큰 무사가 품에서 작은 은자 주머니를 꺼내 늙은 관노에게 내밀었다.
“자네, 그러다가 제명에 못 죽는 수가 있네.”
“헤헤헤!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받고 말해 보게.”
늙은 관노는 씩 웃으며 키 큰 무사를 봤다.
“갑산 현령께서 가끔 돈이 궁하실 때 관노가 죽었다고 관노록에 기록하시고 사노비로 파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노비로 팔아?”
“그렇습죠, 들리는 소리로는 벽란도에 있는 상인에게 넘겼다는 것 같습니다.”
늙은 관노의 말에 검은 도포를 입은 두 명의 무사가 인상을 찡그렸다.벽란도라면 송나라나 금나라, 그리고 서요나 사라센 상인까지 찾아와 거래를 하는 국제 무역항이었다.
“뭐라? 벽란도?”
키가 큰 무사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습니다, 그리 들었습니다.”
“일이 급하게 되었네.”
“그러게 말일세.”
“가세!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네.”
키가 큰 무사가 그렇게 말하며 힐끗 늙은 관노를 봤고 그와 동시에 키가 작은 무사가 빠르게 검을 뽑아 뒤에서 늙은 관노를 사선으로 베어버렸다.쉬웅!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경쾌한 것이 제법 검을 다룰 줄 아는 무사 같았다.
“으악!”
늙은 관노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원망스러운 눈으로 키가 큰 무사를 보며 앞으로 쓰러졌다.
“내 말하지 않았나? 그러다가 제명에 못 죽는다고.”
키가 큰 무사는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늙은 관노의 죽음은 순식간에 찾아들었다.
“벽란도라면 큰일일세.”
“그러게 말이야. 큰일이야……. 그나저나 이곳 현령을 그냥 두고 갈 순 없어.”
키가 작은 무사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탐관이 이리 많아서 되겠나?”
“어쩌겠나? 황궁에 독사 한 마리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탐관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천한 무녀가 비가 됐을 때부터 이 고려는 망조가 들었어!”
“쉬! 우리가 할 소리가 아니네.”
“하여튼! 개경을 벗어나 양광도와 서해도에만 와도 탐관들이 많은데 북변 갑산은 오죽하겠나.”
“그러게 말일세, 가세! 한시가 급하네. 벽란도야, 벽란도!”
“알았네.”
키가 큰 무사가 자신의 뒤에 쓰러져 죽은 늙은 관노를 힐끗 보았다.
“내가 내어준 은자는 저승길 노잣돈일세.”
흥왕사 서쪽에 마련된 연회실.
분명 이 흥왕사는 부처님의 도량일진대 질퍽한 놀음에 깔깔거리는 가희들의 웃음소리가 연회실 담벼락을 넘고 있었다. 의종을 중심으로 한뢰와 이복기, 그리고 임종식과 김돈중이 질펀하게 술에 취해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수십 명의 문신들과 의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환관들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 하나 술에 취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김돈중에겐 강한 불안감이 엄습해 들었다.하지만 그도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그 반대편에는 금장 가사를 걸친 중들이 얼굴을 붉히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것은 취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고려 불교는 썩어가고 있다.연회실 앞마당에는 악공들과 무희들이 젊은 중을 희롱하듯 유혹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희가 살짝살짝 내보이는 속살에 넋이 나가있는 상태였다.정말 불교의 금기를 스스럼없이 철저하게 깨고 있는 땡중들이었다.
“이것은 짐이 내는 시험이오.”
의종은 술에 취해 옆에 앉은 노승을 보며 말했다.노승 역시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황상 폐하의 시험이옵니까?”
“그렇소, 대사! 젊은 스님들이 번뇌에 빠져들지 않는지 시험해 보겠소.”
의종은 요기가 흐르는 무희들의 춤사위를 보며 말했다. 저런 야릇한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금장 가사를 벗어 던지지 않을 승려는 없을 듯하다.
“예, 황상 폐하! 기꺼이 시험에 응하겠나이다.”
그렇게 의종과 문신들, 그리고 썩은 승려들은 연회에 취해있었다.그리고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에 무신들은 의종과 문신들, 승려들이 연회를 즐기는 것을 호종하고 있었다.
“견룡행수는 아직인가?”
질퍽한 연회를 즐기고 있는 것들의 눈을 피해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이고가 경계를 선 병졸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래, 저런 꼴 보기 싫어서라도 안 오겠지. 젠장!”
이고는 고개를 홱하니 돌렸다.그 때 정중부가 잠시 이고를 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그런 정중부의 모습을 보고 이고는 다시 한 번 인상을 찡그렸다.
“의방의 말이 맞아! 상장군과 노장군들에게 기대할 건 없다!”
이고의 눈동자는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이의방이 보였던 그 눈빛과 같았다.
“살아난 것이냐?”
이의방이 내게 물었다. 약간 당황한 눈빛이기는 했지만 담담한 어투였다.
죽은 놈이 살아난 것을 봤으니 더 놀랄 것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살아난 것이냐?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 거야? 그렇지! 나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지.’
나 역시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순간 의연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옛날 장군 복장을 한 자가 나를 보고 있었고, 묻는 첫말이 살아난 것이냐, 이니 말이다.
‘이의방이다.’
머리 위에 떠올라있는 세 글자 이, 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