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1권 -- >
지금까지 의종을 호종하던 무신들은 의종이 흥왕사로 들어서는 모습을 씁쓸하게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으음!”
정중부가 멀어지는 의종과 문신들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그 때 이의방이 다가왔다.
“상장군!”
“왜 그러는가, 이 행수?”
이의방은 여전히 마상에 있었는데 그 앞에는 이제 싸늘히 식어버린 어린 병사의 시체가 놓여있었다.
“잠시 이 아이의 극락왕생을 빌고 오겠습니다.”
이의방의 말에 정중부는 시선을 돌려 마상에 축 처져있는 어린 병사의 모습을 보았다.
“오늘따라 자네답지 않군.”
“그렇게 보이옵니까?”
“그렇다네. 하여튼 다녀오게. 무리한 어가 행렬이었으니 조금 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정중부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대나무 숲 앞 공터에 군막을 세울 것이다. 부장들은 장졸들을 통제하라!”
“예, 상장군!”
“군막이 설치되면 대장군들은 내 군막으로 모이시라 하게.”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상장군 정중부의 부장으로 보이는 중랑장이 짧게 대답하곤 돌아섰다.
“군막을 대나무 숲 앞 공터에 설치한다.”
그 때 이의방이 상장군 정중부를 보며 말했다.
“저희는…….”
“알고 있네. 견룡군이야 황제 폐하의 친위군이니 흥왕사 안에 군막을 세워야겠지.”
“송구하옵니다.”
“아니네, 하여튼 저 어린 병사의 극락왕생이나 잘 빌어주시게.”
상장군 정중부는 죽은 병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힐끗 보았다.
“감사하옵니다, 상장군!”
이의방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상에서 내려 죽어있는 어린 병사의 시체를 안고 흥왕사 일주문을 넘었다.
“너의 가여운 죽음이 꼭 나의 모습처럼 느껴지는구나…….”
이의방은 품 안에 죽어있는 어린 병사를 다시 한 번 봤다. 그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감상에 젖어있었다.
그런 이의방을 다른 무신들은 이상하게 여기며 지켜보고 있었다.이때만 해도 이의방은 자신에게 닥칠 거대한 운명을 예견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과 무신들을 괄시하는 의종과 문신들에 대한 분노만을 꾹꾹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품에 안겨있는 보잘것없는 어린 병사의 시체가 그를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있었다.온몸을 파고드는 열기가 느껴졌다.
사내는 눈을 뜨는 순간 몸속 깊숙한 곳까지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빛보다 더 환한 밝음이었고, 그 밝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한 소년의 모습도 보였다.
“너, 넌 누구냐?”
사내는 깜짝 놀라며 웅크리고 있는 소년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내가 먼저 물었잖아?”
사내는 자신이 왜 이리 밝은 곳에 있는지 영문을 몰랐다. 마지막 순간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기에 이곳이 대체 어디인지 굉장히 의문스러웠다.
“나도 모르오.”
“뭐라? 너도 모른다?”
“그렇소, 나도 이곳이 어딘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웅크리고 있는 것이냐?”
사내의 눈에 비친 소년은 뭔가에 쫓겨 눈치를 보며 움츠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항상 이랬습니다.”
“뭐?”
“그렇다는 겁니다. 항상 웅크리고 눈치 보며 이렇게 지냈습니다.”
소년의 말에 사내는 다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지만 보이는 것은 그저 빛보다 눈부신 밝음뿐이었다.
“정말 이곳이 어딘지 몰라?”
“저는 벼락을 맞고 죽었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순간 사내는 놀란 눈으로 소년에게 물었다.
“뭐? 벼락을 맞고 죽어?”
사실 사내도 반지하 쪽방에서 웅크리며 굶어 죽어가다가 벼락을 맞고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가 이렇게 두리번거리는 것은 이곳이 천당인지 지옥인지 몰라서였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되었든 잘된 일입니다. 살아 무엇할까 생각하던 참인데, 이리 가니 마음은 편합니다.”
“죽었는데 뭐가 마음이 편해?”
“죽어 모든 것이 끝났는데 무엇이 불편하겠습니까?”
사내의 눈에 비친 소년은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눈빛이었다.하지만 그것은 초월이 아니라 포기와 절망이라는 것을 남자도 잘 알고 있었다.
“체! 죽어서 편하냐? 나는 억울하기만 하다.”
사내의 말에 소년은 피식 웃었다.
“억울하십니까?”
“그래! 억울하다. 억울해 미치겠다. 바보처럼 살다가 죽어서 미치겠고, 미련한 놈으로 살다가 미련을 버리지도 못하고 죽어서 억울하다.”
사내는 마치 소년에게 화를 내듯 쏟아 부었다.
“그럼 다시 살아 보시겠습니까?”
소년의 눈빛은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듯했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번개를 맞고 죽은 놈이 어떻게 다시 살아?”
“다시 사신다면 어쩌시렵니까?”
“개 같은 소리! 다시 살기는 뭘 다시 살아!”
“그러게요. 개 같은 소리네요.”
정말 모든 것을 초월한 눈빛의 소년이었다.
“개 같은 소리라도 만약 다시 산다면 미련하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고집을 부리지도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 것이다.”
사내는 어느덧 자신의 속내를 말하고 있었다.
“그럼 그러세요.”
“뭐라고?”
“그런데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눈깔은 도 닦은 중 눈깔을 하고서 내게 무슨 부탁을 한다는 거야?”
“내가 왜 그렇게 모질게 살았는지 좀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내가 누군지도 좀 알아봐 주시고요.”
“내가 무슨 수로 알아보냐?”
“그러네요……. 하여튼 살고 싶다니 그러세요. 그리고 다시 살게 되면 제가 한 말 잊지 마시고요.”
“뭐?”
“살아요.”
말이 끝나자마자 소년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스르륵 사라지더니 하나의 빛이 되어 마치 화살처럼 사내의 눈동자에 박혔다.너무나 놀란 사내는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났지만 아픔 하나 없었기에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그 순간 그리도 밝았던 곳이 캄캄한 암흑으로 변했다.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스르륵 감기는 눈꺼풀은 천금처럼 무거웠다.
다시 느껴지는 강렬한 뜨거움에 정신을 잃은 듯 혼미해졌다가 끝내 죽은 듯 잠들어 버렸다.
“살아보세요. 그렇게 살고 싶어 하시니…….”
사내는 잠드는 그 순간까지 자신에게 또 한 번의 생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온몸을 파고드는 열기가 느껴졌다.
내 몸속 깊숙한 곳까지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 왔다. 눈을 뜨려고 했지만 쉬이 떠지지 않았다.
눈도 뜨지 못하고 있는데 내 귀에 들려오는 것은 은은하게 울리는 목탁 소리였다. 그리고 또 느껴지는 것은 예전 어느 절간에서 맡았던 향냄새였다.
그런 느낌 전부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순간은 폭우가 치는 날, 평상시에도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 골방에서 주린 배를 움켜잡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드라마 극본을 쓰다가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차디찬 바닥에 쓰러졌다는 거다.
그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며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엄습했다.죽음이 닥쳐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물만 마시고 버틴 지 10일이 넘었다. 그 10일 동안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이번 드라마 극본은 대박이 날 거라고 중얼거리며 나를 스스로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아니, 그렇게라도 최면을 걸지 않으면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지친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쿵, 하고 바닥에 쓰러졌을 때 나는 내 죽음을 직감했다. 아니, 죽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나를 죽게 한 것은 지금 생각해 보니 누적되어온 고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심한 영양실조와 굶주림.내 몸에 극심한 고통이 밀려들지 않았다고 해도 죽지 않은 게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왜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드라마 극본에 매달렸던 것일까? 그렇게 난 극본을 썼고 대박이 난 다른 이가 쓴 극본을 필사하며 애써 모진 삶을 이어갔다.
내가 그 골방에서 마지막으로 필사한 극본은 「무인시대」였다.
정통 사극!
나 역시 그런 정통 사극을 쓰고 있었기에 「무인시대」극본은 참 좋은 교과서 같았다. 하지만 난 결국 쓰러졌다.
찬 골방의 향기를 뺨으로 느끼다가 지친 듯 스르륵 눈이 감겼고, 그 순간 아련하게 죽어갔다고 기억하고 있다.그런데 지금 이렇게 의식이 돌아왔다니?
‘뭐지? 왜 이런 거지?’
내 귀에는 목탁 소리가 들렸고 코에서는 향냄새가 느껴졌다.
이것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난 기독교 신자이다.
내가 죽었다면 기독교식으로 장례가 치러질 것이다.그런데 딱딱딱, 하고 목탁 소리가 들렸다.
정말 무엇 하나 믿을 수 없는 일들만 일어나고 있다.나는 떠지지 않는 눈을 애써 뜨려고 안간힘을 썼다.
‘주, 죽지 않은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죽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보다 절망이 밀려왔다.
어쩌면 죽음은 내게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선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희망이 없이, 또 내일 없이 사는 것보다 절대 이생에서 바꿀 수 없었던 것을 다음 생에서는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이생이니 말이다.
“다시 태어나세요.”
누군가의 말처럼 그것만이 나를 바꿀 수 있었다. 다시 태어나야만 이생에서 느꼈던 절망을 희망으로 메울 수 있는지도…….
‘온몸이 뜨, 뜨겁다…….’
점점 더 몸속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때 기현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기억들과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내 뇌를 창처럼 찌르듯 파고들었다.
마치 누군가 내게 강제로 이 모든 것을 주입하고 있는 것 같았다.머리가 터질 듯 아프고 눈동자가 검게 타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누, 누구지?’
그리고 그 마지막은, 기골이 장대한 장군의 복장을 한 사내의 품에서 아련히 죽어간 어린 병사의 기억이었다.
‘내게 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이, 이게 내 전생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기억인가? 그것도 아니면 환상인가…….’
놀랍고 신기하고 믿기지 않는 일투성이였다.
3장 이의방을 만나다
내 머릿속은 수많은 기억과 지식을 마치 강제로 주입받기라도 한 듯 아파왔다. 한마디로 내 뇌가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이상의 것들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거대한 도서관을 통째로 내 머릿속에 쑤셔 넣은 것 같았다.방대한 지식이라고 표현할 만한 양이었다.
그와 동시에 또 누군가의 기억이 밀려왔다.위이잉! 위이잉!그리고 귓속으로 지구가 자전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무의식의 세계일 것이다.그리고 나는 분명 죽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순간이 설명이 되지 않으니.
“살아보세요. 그렇게 살고 싶어 하시니……. 제 몫까지…….”
그 때, 환청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죽음을 선물처럼 받아들였던 내게, 환청은 살고 싶어 안달이 났으니 적선하듯 살아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뭐지? 내가 정말 미친 건가?’
순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미친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낯선 것들은 어쩌면 죽기 직전에 느끼는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누구나 죽은 후를 알지 못하니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나는 애써 위안했다.
‘눈이라도 뜰 수 있으면…….’
그래서 눈을 뜨려고 다시 한 번 시도했다. 그 순간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끝내 나는 눈을 뜰 수 있었다.
‘떴다! 눈을 떴다.’
하지만 눈을 뜨고 나서 나는 기겁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곳은 지하 골방이었다.
그런데 지금 믿기지 않게도 나는 어느 절간 안에 누워있었다.그리고 제일 먼저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내 옆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무인 복장을 한 사내였다.
‘뭐, 뭐지……? 꾸, 꿈인가?’
그런데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들리는 목탁 소리와 향냄새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니, 나는 이미 엄청난 혼돈 속에 빠져있었다.난 꿈에서 깨어나고 싶은 마음에 눈을 꽉 감고 다시 힘차게 떴다.
그런데 더욱 혼란스러운 현상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 이의방!’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시 눈을 뜨자 내 앞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사내의 머리 위에 마치 게임 속의 캐릭터 아이디처럼 글자가 보인 것이다. 정말 갈수록 믿기지 않는 일의 연속이었다.
‘뭐야? 내, 내가 미친 건가? 왜, 왜 저런 것이 보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