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웅 1권 -- >
하지만 죽은 어린 병사 역시 고려의 신하일진대, 그 어린것의 죽음을 이리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어린것이 죽은 것 같소.”
“하찮은 어린 병사 하나의 죽음이 그리 대단한 것이오?”
“하찮은 어린 병사라고 했소?”
이의방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그는 알싸하게 밀려오는 통증을 느꼈고, 그것은 그의 눈에서 강한 살기로 뿜어져 나왔다.
‘내 너를 기억해서 언젠가는 베고 말 것이다.’
자신의 품에 안겨 죽어있는 어린 병사가 이의방에겐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관직의 높고 낮음만 다를 뿐 죽어있는 어린 병사처럼 자신도 천대받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죽었다면 옆으로 치우면 그만이지 않소!”
그 말에 이의방은 순간 노기를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는가!”
상황이 악화될 것 같자 상장군 정중부가 다시 말 머리를 돌려 이의방을 보며 말했다.
“이 행수! 됐네, 이제 됐으니 그만하시게.”
그러자 이의방은 자신의 품에 죽어있는 어린 병사의 팔을 꼭 잡고 부르르 떨었다.
베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베지 못하는 것은 아직 바짝 마른 들판을 태울 불씨가 붙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불씨는 튕겨져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문신이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린 병사의 죽음을 쓰다 버린 쓰레기 취급하다니! 하지만 상장군 정중부가 그만하라고 하니 참을 수밖에 없는 이의방이었다.
“죽은 것 같다고 했지 죽지는 않았소!”
“어찌 되었든 어서 어가 행렬을 출발시키시오!”
문신은 그렇게 말하곤 말 머리를 돌렸다.이의방은 그 모습을 한없이 노려봤다.
그와 동시에 이의방의 마음속에 지금까지 꾹꾹 누르고 있던 울분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의 눈빛은 새벽을 달리는 사자처럼 사나웠고, 성벽을 향해 휘몰아치는 북풍처럼 차가웠다.
모든 것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오늘 어린 병사가 벽력에 맞고 죽지 않았다면 무신정변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른 들판에 불씨가 떨어지듯, 가득 차서 넘실거리는 불만의 둑이 작은 구멍에 의해 터져 넘치듯, 이 어린 병사의 죽음이 역사의 암흑기를 여는 전조가 되고만 것이다.
“으음!”
이의방은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어린 병사를 조심히 들어 자신의 마상에 싣고는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는 곳이 흥왕사이니 너는 극락에 가겠구나…….”
그러곤 자신 역시 말에 올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이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의방의 마음속에 꾹꾹 눌러놨던 분노가 이 어린 병졸의 죽음으로 인해 드디어 터져 나오려 한다는 것을 이 순간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다!’
이의방은 다시 한 번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입술에서 끝내 붉은 피가 비쳤다. 이는 머지않은 미래에 어마어마한 피를 부를 전조였다.
“뭔가?”
이고의 눈에 축 처져 죽어있는 어린 병사가 보였다.어린 병사는 유명을 달리한 것 같아 이고도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의 눈빛 역시 먹먹해졌다.어린것의 죽음은 이렇듯 여러 사람의 눈에 서글피 비쳐졌다.
“날세…….”
“무슨 소리인가? 왜 이 병졸이…….”
“나란 말일세. 내가 죽은 것이네.”
이의방의 뜬금없는 말에 이고는 멍하니 그를 봤다.
“뭐라고? 자네, 무슨 말을 하는가?”
“내가 지금 죽었단 말일세. 이제 죽었으니 나는 두려울 게 없다네.”
“의방!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이제 더 이상 노장군들을 믿고 기다릴 수 없단 말일세!”
이의방은 그렇게 말하곤 마상에 태워진 어린 병사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표정은 마치 자신의 아들이 눈앞에서 죽기라도 한 것처럼 참담했다.아니, 이의방에겐 그 이상의 감정이었다. 이 순간 아들이 눈앞에서 죽었다 해도 이렇게까지 참담하지는 않을 것이다.
“믿고 기다릴 수 없다?”
“그래! 그렇고말고. 이제 우리의 결의를 실행에 옮겨야 할 때가 왔네! 이제 더는 늦출 수 없네.”
이의방은 그렇게 말하며 의종이 탄 어가를 노려봤다.고려사를 뒤흔든 무신정변의 싹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엄청난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2장 깨어나다
이름 모를 정자.
황제의 어가 행렬은 폭우를 피하기 위해 이름 모를 정자에서 멈췄고 이내 술판이 벌어졌다.언제나 그랬듯 무신들은 모진 폭우를 맞으며 정자 주변에서 삼엄하게 경계를 섰다.
의종의 좌우에는 가희 둘이 술 시중을 들고 있었고, 그 좌우로는 의종이 총애하는 문신들이 의종의 비위를 맞추려 혈안이 되어있었다.
의종의 옆으로 환관 왕광취와 기거주 한뢰, 그리고 승선인 임종식과 함께 지어사대사 이복기와 좌승선 김돈중이 거나하게 술에 취해있었다.
모두 다 한마디로 흥청망청이었으나 좌승선 김돈중만은 담담한 표정에 조금은 참담한 눈빛으로 의종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의종은 자신이 총애하는 문신들이 거나하게 취해있는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으며 마주 보는 곳에 있는 김돈중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대는 짐을 대할 때 항상 찌푸리고 있군.”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그런가? 하하하!”
“그렇사옵니다, 황제 폐하!”
“그러면 술이나 드시게.”
의종은 다시 자신의 옆에 바짝 붙어있는 왕광취의 모습을 보았다. 밉살스러운 계집처럼 인상을 찡그리는 좌승선 김돈중보다 격은 떨어지지만 창부처럼 환하게 웃고 아첨하는 왕광취가 의종의 귀와 눈에는 단꿀과 같았다.
“총신들과 함께하는 술잔에 세상의 시름을 다 잊으니, 이곳이 바로 극락이구나!”
정자 밖에서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는데 의종은 오직 술판이 흥겨운 듯 농을 했다.그 농에 맞추기 위해 왕광취가 자신의 소임인 아첨을 하며 의종을 봤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미륵이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들 하지만 전 미륵을 보고 있사옵니다.”
“미륵? 왕광취, 그대가 미륵을 보았다고?”
“그러하옵니다.”
“어디서 보았는가?”
“지금 우러러보고 있사옵니다.”
“우러러본다? 하하하! 우러러본다…….”
의종도 왕광취의 아부가 싫지 않은 듯했다.
“그러하옵니다, 황제 폐하! 분명 그러하옵니다.”
“그대의 눈에는 짐이 미륵으로 보이는가?”
“그러하옵니다, 황제 폐하! 미륵이시옵니다. 맞습니다, 제 눈에는 황제 폐하가 미륵이시고, 하늘이시고, 천존이십니다.”
“하하하! 그렇지, 그대는 그런 충신이지.”
왕광취의 아첨에 좌승선 김돈중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손에 들린 술잔을 들이켰다.
김돈중!
그는 고려 시대 문신으로 김부식의 아들이다.
1144년(인종 22년) 문과에 장원하여 등용되었다. 젊은 날의 치기에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는데, 아비인 김부식이 도리어 정중부를 나무람으로써 정중부의 원한을 사게 되는 인물이었다.
그와 무신들의 악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167년, 의종이 봉은사에서 연등 행사를 마치고 환궁할 때, 그의 말이 놀라 한 군사의 화살집에 부딪혀 의종의 수레에 화살이 떨어진 적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죄 없는 무인들이 귀양을 가게 되자 무신들은 김돈중에게 더욱 원한을 품게 되었다.
1170년, 정중부가 보현원에서 난을 일으켜 많은 문신들이 살해당하자 그는 도망쳐 감악산에 숨었으나 종자(從者)의 밀고에 의해 잡혀 죽었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암, 그렇고말고! 미륵이 별건가? 술 한잔에 시를 지어 이리 광풍을 잊으면 그것이 대오각성한 미륵이지.”
역시 아첨은 모든 이들의 귀를 멀게 하는 독약과 같은 것이다.
그 때, 왕광취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승선 임종식이 의종의 눈치를 보았다. 아첨은 듣는 자에게만 중독되는 게 아닌 듯하다. 하지 못해 안달이 나있는 자들에게도 역시 중독인 모양이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황제 폐하께오서 참으로 태평호문지주(太平好文之主)이시옵니다.”
“하하하! 그렇게 생각하나? 태평호문지주라……. 내가? 내가!”
조금 전까지 왕광취와 눈을 맞추고 있던 의종이 임종식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러하옵니다. 태평한 이 세월에 시를 좋아하시는 황상 폐하야말로 미륵이시옵니다.”
“하하하! 그런가? 짐의 치세로 태평성대란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황상 폐하! 이 태평성대에 덩실덩실 춤을 추지 않는 백성이 없사옵니다. 곳간마다 곡식이 가득하고, 너 나 할 것 없이 배를 두드리며 태평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 백성이 살기 좋은 세상이란 말이지?”
“그렇사옵니다. 이 모두가 황제 폐하의 은덕이옵니다.”
“아니다, 그대들의 공이다. 하하하! 그대들이 짐을 잘 보필해 준 공이니라.”
“황공하옵니다, 황제 폐하!”
“하하하! 경들이야말로 충신이로다. 참으로 충신이로다.”
의종의 말에 왕광취와 임종식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씩 웃었다.오로지 김돈중만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암! 태평이지. 짐의 치세야말로 태평이지. 100여 년간 난이 없고 외침이 없으니 태평성대이지.”
그랬다. 고려는 거의 100여 년간 내란과 외란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문신들은 대접을 받았고 무신들은 비교적 괄시를 받았다. 어쩌면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무신정변을 초래한 것인지도 모른다.
“폭우가 멈추고 있사옵니다. 폐하!”
왕광취가 조심히 의종에게 말했다.
“그럼 흥왕사로 가야지.”
“예, 알겠사옵니다.”
왕광취가 고개를 돌려 폭우를 온몸으로 맞으며 경계를 서고 있는 상장군 정중부를 거만한 눈빛으로 봤다.
“흥왕사로 어가가 향할 것입니다. 준비를 하세요.”
한낱 환관이 지금 고려 상장군에게 지시를 했다. 상장군 정중부는 잠시 왕광취를 보다 몸을 돌렸다.
“흥왕사로 황제 폐하께서 납실 것이다. 준비하라!”
“예, 상장군!”
무장들이 짧게 대답했다.흥왕사 일주문 앞.화살촉처럼 쏟아지던 폭우도 어느새 그쳤다.의종을 태운 어가가 흥왕사 일주문 앞에 서자 금장 가사를 걸친 승려들이 어가를 맞이했다.
“빈승들이 황상 폐하를 뵈옵니다.”
노승이 의종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검소해야 할 승려가 금장 가사를 입고 개기름이 낀 얼굴에 거불지게 배까지 튀어나온 것을 보니, 후일 그가 죽어 태워지더라도 사리 하나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대사! 참으로 오랜만이오.”
“그러하옵니다, 황상 폐하!”
술에 취한 의종이 늙은 노승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데 충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구려.”
의종은 취한 와중에도 늙은 노승과 승려들 속에서 충희라는 승려를 찾는 듯했다.
“그, 그것이…….”
“하하하! 무엇을 그리 숨기시오.”
“송구하옵니다, 황제 폐하!”
“송구하기는, 짐이 아우의 성정을 모를까? 짐이 오는 것도 모르고 극락을 위해 보살을 찾아 헤매고 있겠지. 이래서 황족과 황자는 스님이 돼서는 안 되는 것이네. 하하하! 아니 그렇소?”
“그, 그러하옵니다. 잠시 속세에…….”
“쯔쯔쯔! 정말 승려가 될 깜냥은 아닌 것을……. 하하하! 없는 충희야 어쩔 수 없고. 들어갑시다, 대사! 내 대사가 보고 싶어 눈이 빠지는 줄 알았소.”
“예, 황상 폐하!”
고려는 불교 국가라 할 만큼 불교가 성행하였다. 특히 황실, 귀족 출신이 승려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고려 불교의 귀족성에서 나온 현상이었다.
하지만 고려는 한없이 썩어있었다. 그와 동시에 썩은 중들 역시 난무하던 시대였다.
사찰마다 사노비가 득실거렸으며 쌓아 올린 재물이 부처님의 머리 위에 올라있다고 할 만큼 썩어가고 있었다.
“황상 폐하, 노승이 모시겠사옵니다.”
노승은 조심히 손을 뻗어 흥왕사를 가리켰다.
“그럽시다, 대사! 얼마나 잘 모시는지 한번 봅시다.”
“드시지요, 이곳이 극락이옵니다.”
“어디 극락에 한번 들어서 봅시다.”
그렇게 의종과 문신들은 승려들의 인도를 받으며 흥왕사로 들어갔다.그리고 백화는 개경 황도를 향해 바로 말 머리를 돌렸다.
백화는 무비가 지켜보라던 어린 병사가 뇌성을 맞고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지켜보라 하셨던 이유가 있을 거야!’
개경으로 말을 달리는 백화는 그때까지는 죽은 아이가 어떤 존재인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또한 그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가 될지 역시.
어린 병사가 그렇게 죽고, 의종은 노승이 극락이라고 말한 흥왕사로 들어서자마자 주정뱅이의 극락처럼 술판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