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웅-1화 (1/620)

일세지웅(一世之雄)은 그 시대에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을 일컫는 말이다.그 시대에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그의 운명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하늘의 뜻을 받아 새 시대를 여는 인물이 되는 것이 그 처음일 것이다.황제!새 시대를 여는 인물을 보통 범인들은 황제라 칭한다.

나머지 하나는 치세능신(治世能臣)이나 난세간웅(亂世奸雄)이라 할 것이다.

일세지웅!

일세지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난다면 그 시대는 난세일 것이고,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세상이 분명할 것이다.

그런 세상과 세월 속에서 일세지웅은 한없이 고민할 것이다.무엇이 될 것인가?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어느 순간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마음으로 스스로의 삶을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끝내 무언가가 될 것이다.그가 무엇이 되든, 또 무엇을 원하든 그것은 오직 하늘의 뜻이다.

일세지웅!

우리는 그를 ‘치세능신난세간웅(治世能臣亂世奸雄)’이라 한다.

1장 뇌성벽력이 치는 날!

우르르… 쾅쾅! 콰콰쾅!

어쩔 수 없이 어가 행렬을 호종하고 있는 무인들의 표정처럼 하늘도 잔뜩 찡그렸다.

먼지처럼 쌓여있는 무인들의 울분을 토해내듯 첫 천둥소리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한없는 오열!

지금 하늘은 자식 잃은 어미의 눈물처럼 비를 뿌리고 있었다.

우르르… 콰콰쾅!

그리고 잔뜩 먹구름이 낀 하늘은 자식의 주검을 지켜보는 굳은 아비의 표정처럼 어두웠다.

번쩍! 지지직! 콰콰쾅!

그 때, 그 어두움의 끝에서 뇌성벽력이 하늘을 찢어발기려는 듯 거침없이 내리쳤다.

누군가의 울분이 끝내 터져버린 것이다. 내리치는 뇌성벽력은 하늘의 울분이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고려 황제 의종의 어가 행렬을 호종하는 무신들은 울분을 예전처럼 그저 참아내는 것이 미덕인 양 꾹꾹 누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의종을 태운 어가는 거친 폭풍우를 뚫으며 선두에 강인번(絳引?)을 앞세우고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폭우!

그 폭우 속에서 숨죽인 울분. 그 울분을 모르는 듯, 아니, 외면하는 듯 쏟아지는 괄시와 천대의 눈초리.그저 무신들의 세월은 한 많은 날들뿐이다.

강인번을 든 어린 병사는 누가 보아도 처량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그렇게 거친 폭풍우에 쓰러질 듯, 부러질 듯한 강인번을 간신히 잡고는 온몸으로 지탱하고 있는 어린 병사는 이 비참한 순간에도 무장의 긍지를 잃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묵묵히 황제를 호종하고 있는 무인들의 모습은 이제 위태롭기만 했다. 충심이라는 굴레에 한없이 꾹꾹 눌러놓은 울분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순간순간을 그렇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무장들은 비둘기를 쫓는 매의 눈길로 행렬 가운데의 어가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오랜 세월 먼지처럼 차곡차곡 쌓아놓은 불만이 그 무게만큼 폭발하여 거친 분진이 되어 이 고려에 몰아칠 것같이 행렬의 분위기는 사나웠다.

“젠장할 놈의 세상!”

창검을 든 장졸의 눈에 핏발이 서고 입에서는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장졸들도 이리 불만을 내보이는데 마상에 올라있는 무장들은 오죽할까.

“듣겠네.”

다른 장졸이 기겁을 하며 말했다.세상을 한탄하면 역도로 몰려 목이 잘리고 장대에 꽂혀 저잣거리의 놀림감이 되는 세상이니 기겁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그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만을 내뱉는 세상이라면 뭔가 틀어진 게 분명하다.

“젠장할 놈의 세상!”

이 어가 행렬은 마치 외적의 침탈에 어디론가 급히 피란을 가는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고 폭풍우가 치는 곳에서 굳건히 어가를 지키는 무신의 행색은 초라함을 넘어 어찌 보면 비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의 무신들은 천대와 괄시를 받는 그 정점에 서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신들의 권위와 명예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이 모든 것이 난신적자로 타락한 문신들과 그들의 놀음에 놀아나고 있는 황제 때문이라는 것을 무신들은 누구 하나 부정하지 않았다.

팽배해진 불만, 그리고 그보다 더 커지고 가혹해져 가는 멸시와 천대. 100여 년간 외침이 없었던 고려는 이렇게 무신들을 괄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고려가 흥함의 정상에 올랐다가 서서히 멸망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런 상황은 어쩌면 태조 때의 왕권이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다.

마상에서 세운 고려이다. 대왕이라는 궁예로부터 받은 고려였다. 그러니 태조 왕건은 무신보다 문신을 우대하는 정책을 썼고, 그로 인해 문벌 귀족이 발호하는 사태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이자겸의 난을 필두로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또한, 그 시기의 금나라는 내치를 우선해서 고려에 대한 침입을 자제하고 있었다. 거칠기만 했던 거란이 중앙아시아로 사라진 이후에 고려는 전마가 달리지 않는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때문에 고려 황제의 가장 큰 걱정은 군 내에서 일어나는 반란이었다.

우르르… 콰콰쾅!

상장군 정중부가 마상에서 우산 하나 없이 비바람을 맞으며 어가 행렬을 호위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려 왕조가 얼마나 무신들을 천대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렇게 무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어가 행렬은 비참해 보였다. 물론 그 비참함은 무신들에게 국한된 일이었다.

밖에서 보이는 혹독한 모습과 다르게 보기보다 넓은 어가 안에서는 이 어가의 주인인 의종이 분내가 진한 계집 둘과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끝이 없는 술판에 그는 광인이 되어갔다.

무척이나 총명했던 의종이었으나 이제는 폭군을 넘어 광군이 되어있었다.

의종!

그는 고려의 제18대 황제(재위 1146년~1170년)이다.

그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신들에게 100년간 고려 제국을 빼앗긴 비운의 폭군이라는 점이다.비운의 폭군!그건 어쩌면 그가 자초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어가 안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술판이 그를 위한 망혼주라는 것을 어가를 따라 다른 가마에 타고 있는 문신들은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쾌락에 빠진 의종은 위기를 느끼는 본능마저 잊은 것이다.

쉬이잉! 우르르… 쾅쾅!취청!

칼날 같은 바람 때문인가. 어가 행렬을 알리는 강인번의 깃발은 찢겨져 나갈 듯 펄럭였고, 깃대는 부러질 듯 휘청거렸다.

그 깃대를 들고 있는 어린 병사는 거센 바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지만, 지엄한 어가 행렬의 선두에 서있기에 애써 바람을 참아내며 진창을 걷고 있었다.

저벅! 저벅! 쩌어억!

신발 바닥에 달라붙은 진흙이 그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죽어 다시 태어나도 어쩔 수 없는 인생이다.’

어린 병사는 그렇게 강인번을 들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사실 오늘 장졸이 된 아이였다. 그런데 육중하다 못해 장엄한 강인번을 들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이 행렬의 제일 선두에 서있다.

어린 그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주변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 병사는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얼마 살지 않은 자신의 삶에서 이해되는 일이란 몇 되지 않았으니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리 팔리고, 저리로 넘겨지고……. 또 왜 여기에 있는가?’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넋두리에는 한이 서려있었고, 소리 없이 뿜어지는 한숨에는 뜨거운 입김이 새어 나왔다.

‘쉬고 싶다. 그냥 저 벼락에 맞아 쉬고 싶다.’

어린 병사는 지친 눈빛으로 서산 너머 멀리에 내리치는 번개 자락을 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여기저기 똥개처럼 팔려 다니던 인생이다.

남면 전주 옹기장이의 사노비부터 북변 갑산의 관노까지. 게다가 벽란도 포구의 노예 시전 좌판에 오르더니, 이번에는 어이없게도 견룡군 병사가 되었다. 정말 운명이 기구하고 파란만장하기까지 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천대받는 무신이라고는 하지만 사노나 관노였던 자신이 황제의 어가를 수행하는 견룡이 된 것 자체를 말이다.

예전에는 그런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이유를 알아내려고도 해봤다.그때마다 느껴졌던 거대한 벽. 그 벽에 막히고 또 옮겨졌다.

그 반복에 어린 병사는 달관한 어느 스님처럼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다.하지만 결심은 그저 결심일 뿐이다.

초조한 마음과 불확실한 미래가 항상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이러다 또 어디로 팔려가고 어디로 버려질지 어린 병사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벼락아! 내 머리 위로 내리쳐다오.’

옮겨진 곳에서 적응이 될 때쯤이면 또 어디론가 끌려갔고, 잠에서 깨어나면 다른 곳에서 눈을 떴다. 모질게 돌고 도는 기구한 인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편한 휴식과도 같은 죽음이 이처럼 목말랐던 것이다.

순간 어린 병사는 죽음을 간절히 소망했다.

‘소원이다. 뭐 하나 쉬이 얻어보지 못했으니 마음대로 죽기라도 하자.’

오랫동안 비를 맞아서인지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 당장 진창에 쓰러져 피를 토하고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쳐라! 벼락아, 쳐라!’

어린 병사의 모습을 어가의 옆에서 호위하는 여무사가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감시를 하듯이.

강인번은 그냥 그런 깃발이 아니다.강인번은 황제의 깃발이요, 고려의 깃발이었다.

비단에 수가 놓여있고 아래에는 방울이 달려있으며, 위에는 둥근 깃대가 아래로 내려와 구부러져 있는 장기(長旗)로, 황제가 거둥할 때 다른 기들의 제일 앞에서 인도하는 역할의 깃발이었다. 다시 말해 황제기라고 할 수 있는 강인번이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강인번을 어린 병사가 들고 있다는 것은 이 어가를 주도하고 있는 문신들이 무신들을 천대하고 괄시하는 것만큼 속으로 의종을 조롱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의종은 알지 못한 채, 그저 문신들을 자신의 총신이라 부르며 기꺼이 품에 안고 술판을 벌였다.

광폭한 황제, 의종! 그는 고려사에 죄 많은 황제로 길이 남을 것이다.

“백화야! 너도 비 맞지 말고 들어와라. 하하하! 이곳이 극락이다.”

의종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어가 안에 탄 무희 하나가 휘장을 걷어 올렸고, 그 사이로 의종의 용안이 보였다.

“백화, 너도 무비처럼 짐의 말을 참으로 안 듣는구나! 하하하!”

“저는 이곳이 편하옵니다.”

“폭우가 치는데 편하다니, 무비가 아끼는 너를 그리 홀대했다고 후일 짐이 혼나면 어찌할꼬? 그런데 참, 언제 돌아간다고?”

“소녀는 황제 폐하께서 흥왕사에 납신 후 바로 환궁할 것이옵니다.”

“그래? 무비에게 내 이야기를 잘해다오. 하하하! 그런데 왜 왔누?”

의종은 그게 궁금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돌아다니며 술판을 벌였지만 한 번도 무비의 여무사가 따라붙어 호종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무비 마마의 명이시옵니다.”

“그렇지, 너는 그렇지. 무비의 말이라면 뭐든 하는 너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짐의 목이라도 따라더냐?”

순간 어가의 질퍽했던 술판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황제 폐하!”

백화라는 여무사가 단호한 표정으로 의종을 불렀다.

“농이다, 농! 내 사랑하는 무비가 어디 그런 마음을 먹겠는가? 하도 사는 게 무료해서 해본 농이다. 하하하!”

“이년, 듣기 황망하옵니다.”

백화의 말에 의종은 백화를 힐끗 보고는 피식 웃었다.

“너도 참 인생을 어렵게 사는구나. 짐처럼 왜 그렇게 어렵게 사누? 쉬운 길이 있는데……. 조금만 마음을 열면 고려의 어떤 여인도 부럽지 않게 살 것인데. 쯔쯔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나이다.”

“그래, 그렇지. 원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법이지. 둘 다 타고난 고집불통들이니…….”

의종이 백화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듯 말하자 그녀는 당황하여 놀란 빛을 숨기지 못했다.

눈동자에 뭔가를 숨기고 있는 여인, 백화! 분명 그 이름은 꽃처럼 희고 아름답지만 그녀의 눈빛은 매섭고 차갑기만 했다.

< -- 간웅 1권 -- >

“휘장을 내리시게. 폐하의 용포가 젖고 있네. 무엇하느라 넋을 놓고 있는가!”

낮은 어투지만 단호함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예, 백화 님.”

무희는 곧장 조심스럽게 휘장을 내렸다.이것만 보아도 백화는 제법 권세가 있는 듯했다.

물론 그 권세는 무비에게서 나오는 것일 테지만.백화는 조금 전처럼 다시 어린 병사를 지켜보았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가 마치 저 어린 병사를 지켜보기 위해서인 듯 백화는 뚫어지게 그를 응시했다.

‘왜 지켜보라 하시는 걸까?’

백화는 무비의 명령이 이해되지 않았다.

“찬찬히 지켜보아라! 폐하와 강인번을 든 아이를. 그럼 무엇이든 보일 것이다.”

무비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환청처럼 곱씹어졌다.

‘무엇을 찬찬히 보라고 하시는 거지?’

그저 하찮고 병든 병사처럼 보이는데 무비는 어린 병사와 의종을 찬찬히 지켜보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백화가 이 어가를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백화는 어린 병사를 보며 그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의종의 모습을 보았다. 둘을 같이 지켜보라는 명에 매의 눈으로 지켜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광인의 얼굴을 한 황제와 병자의 낯빛을 한 어린 병사뿐이다.

“쿨럭! 쿨럭!”

강인번을 들고 있던 어린 병사는 피를 토할 듯 목이 찢어져라 기침을 쏟아냈고, 그때마다 어가의 행렬을 알리는 강인번은 휘청거렸다.

강인번은 쓰러져서는 안 되는 상징성을 가진 깃발이다.강인번이 휘청거릴 때마다 말에 올라탄 채 큰 우산으로 몸을 가린 문신들은 인상을 찡그리며 어린 병사를 노려보기 일쑤였다.

“기침이 예사롭지 않다.”

백화는 어린 병사를 예의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여전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지키라는 것도 아니고 목숨을 거두라는 명도 아니었다. 그저 지켜보라는 것이 무비가 내린 명의 전부라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 병사를 보고 있는 건 백화만이 아니었다. 무신들을 괄시하는 것에 재미를 붙인 문신들이 무신들의 작은 꼬투리라도 잡으려는 듯 어린 병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리 약해 빠져서 어찌 견룡군의 병졸이라 할 수 있는가? 저런 것이 어찌 견룡에 들어갔단 말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황상께서 어찌 저런 것을 친위대로 거두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저러니 무부 놈들이 대접을 못 받는 것이야. 저리 약해서야 어디 오랑캐가 들이치면 앞에 서서 막을 수나 있겠나?”

“그러게 말이옵니다.”

하급 문신 하나가 강인번의 뒤를 따르는 정중부를 비롯한 고위 무신들을 보며 이죽거렸다. 그것만 봐도 무신들이 얼마나 천대를 받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저런 병졸이 무부에 속하기나 합니까?”

“그런가? 하하하! 그렇지, 무부도 안 되는 것이지.”

문신, 그들은 모를 것이다.

편히 마상에서 말을 타고 가니 어린 병사가 진창을 걷는 고통이 어떤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린 병사는 그렇게 힘겹게 강인번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정중부를 선두로 양숙, 기탁성을 비롯한 노장들이 마상에서 의종이 탄 어가를 호위하고 있었다.

또한 그 뒤로 쏟아지는 광풍의 빗속에서 말을 탄 수십 명의 문관과 악공, 그리고 광대가 의종이 탄 어가를 따르고 있었고, 그의 뒤를 이의방과 이고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없이 따르고 있었다.

콰콰쾅! 콰콰쾅!!

그 때, 하늘에서 다시 뇌성벽력이 내리치며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이런 모진 날씨에……. 젠장!”

마상에서 아무 말도 없이 강인번을 든 어린 병사를 보고 있는 이의방.묵묵히 그 모습만 주시하는 이의방에게 이고가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도 무슨 말을 좀 해보란 말일세!”

이고가 말하자 이의방은 그제야 어린 병사에게서 눈을 돌리고 이고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란 말인가?”

“그게 말일세……. 그러니까…….”

이고 역시 마음에 품고 있는 말을 쉬이 하지 못했다.그 때, 다시 한 번 뇌성벽력이 치더니 어둡던 사방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과 동시에 모든 이들이 그 환한 빛에 눈도 뜨지 못하는 찰나.

“아아악!”

앙칼진 비명이 이의방의 귀를 찢었다.이의방은 매서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온 시작점을 급히 눈으로 좇았다.

백화 역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온 곳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어린 병사가 쓰러져 있었다.

콰콰쾅! 우르르. 콰콰쾅! 번쩍! 콰콰쾅!

천둥이 친다.쏟아지는 빗줄기는 푹 파인 아스팔트 도로에 내려앉아 원형의 파장을 만들었고, 내리치는 천둥은 누군가의 죽음을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비가 떨어져 만든 원형의 파장 옆으로는 창문이 반쯤 열려 빗물이 튀어 스미는 반지하 쪽방이 보였다.어두운 반지하 쪽방.가난의 상징. 무덤처럼 파고들어 선 반지하 쪽방은 암울하기만 했다.

반쯤 열린 쪽방 창문 때문일까? 그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벽에는 곰팡이가 여기저기 꽃처럼 가득 피어있었다. 피어있는 곰팡이만큼 눅눅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것을 넘어 역하기까지 했다.

그런 골방에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 축 늘어진 몰골을 한 40대 중반의 사내가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며칠을 먹지 못해 굶어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으윽!”

병에 걸린 것은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보다 앙상한 뼈마디를 보면 그가 왜 이렇게 죽어가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주, 죽나?”

사내는 자신에게 물음을 던졌다.

“이, 이렇게 죽나? 굶어 죽나?”

입안에서 혼잣말도 무척이나 힘겹게 나왔다.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이 반지하 쪽방을 나갈 수도 없을 만큼 그는 탈진해 있었다.

이 풍요로운 대한민국에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 대한민국에서 굶어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진대. 노숙자만 해도 굶어 죽는 경우는 별로 없다.

매일매일 어디선가 주는 무료 급식을 먹고, 지나가는 맘 좋은 바보 하나를 잡아 강탈하듯 구걸하며 돈을 뜯어 담배를 사 피우고 술도 마실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는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자존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존심이 지금 그를 죽게 하고 있는지도……. 그는 이 순간이 후회스럽기만 했다.

죽음을 직면한 순간 후회가 남지 않는 삶이 있을까마는 그에게는 더욱 그랬다. 뭐 하나 남겨놓지 못한 삶이었고, 흔적 하나 없이 떠나야 하는 삶이었다.

그저 골방에 갇힌 죄수처럼 살았다. 스스로 세상과 담을 쌓고 외면하며 오직 스스로의 고집으로 미련스럽게 묵묵히 살았다.

남들이 다 해본다는 그런 사소한 무엇 하나 해보지 못한 그였다.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았고, 물론 자식도 없다. 그래서 더욱 후회스럽기만 했다.

“제, 젠장!”

콰콰쾅! 콰콰쾅!

그 때, 다시 내리치는 천둥과 함께 번쩍 뜬 사내의 눈동자가 휑하고 처량했다.

“겨, 겨우 이 하찮은 것에 내가 이리… 이리 미쳐 죽어야 하나?”

그가 말한 하찮은 것은 바로 드라마 극본이었다. 그러고 보니 곰팡이 때문에 역한 냄새만 나는 건 아니었다. 방 구석구석 쌓여있는 책과 대본들. 그곳은 마치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고 입에 넣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이리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리 살고 싶지는…….”

고집인가? 집착인가? 그는 20년 넘게 드라마 극본에 미쳐있는 작가 지망생이었다. 작가가 되지도 못한 그는 글을 쓰다가 구걸할 용기도 없고 자존심을 버릴 용기도 없었기에 이렇게 비참하게 굶어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게 아니었는데, 이게! 다시 사, 산다면 이리는 아, 안 살 것이다.”

그는 후회하며 손에 들린 드라마 극본을 마지막 힘을 짜내 움켜쥐었다.

‘다, 다시 살면 저, 절대 이리는 안 산다.’

남자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있는 듯했다.

번쩍!콰콰쾅! 콰콰쾅!

다시 한 번 천둥이 내리쳤다.

천둥이 내리치는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반지하 쪽방 창문으로 보이는 거리에는 마치 폭죽을 터트리기라도 한 듯 여기저기서 불꽃이 튀었다.

지지직! 지지직!

그 불꽃을 만들어냈던 번개의 한 지류가 바닥에 고여있는 빗물을 타고 반쯤 열린 반지하 창문을 통해 쪽방 안으로 흐르더니, 안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내의 몸에 닿았다.

지지직!

“아아악!”

순간 터져버릴 듯 크게 뜬 동공 속으로 수많은 그림들과 장면들이 전이되듯 빨려 들어갔고, 그때마다 사내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찌이이이잉!

반쯤 잠들 때나 들릴 것 같은 지구의 자전하는 소리가 남자에게 들렸고, 그 순간 여리게 뛰던 한 많은 사내의 심장이 뚝 멈추었다.

“아아악!”

외마디 비명을 지른 것은 강인번을 든 어린 병사였다. 어린 병사는 내리치는 뇌성벽력의 지류를 맞고 쓰러졌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모진 놈은 마지막마저 고통스럽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기라도 한 듯 소년을 극한의 고통으로 내몰았다. 터져버릴 듯 몇 배나 커진 소년의 동공은 마치 무언가에 전이된 듯했고, 그 커다란 동공 속으로 무언가가 쑥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소년은 끝내 스르륵 눈을 감았다.

‘주, 죽음이 고맙다.’

얼마나 기구하게 살았으면 이리도 황망한 죽음이 고마울까?그렇게 어린 병사의 삶은 끝이 나고 있었다.어린 병사의 비명을 들은 이의방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랴! 이랴!”

이의방의 눈에 보인 것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어린 병사와 불타는 강인번이었다.지금까지 어린 병사를 지켜보던 백화도 견룡행수 이의방이 달려가는 것을 봤다.

‘벽력을 맞은 것이야!’

백화는 저렇게 번개를 맞고 죽을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리고 박차를 가해 달려간 이의방은 폭우처럼 쏟아지는 비에도 꺼지지 않고 타는 강인번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진창에 쓰러진 어린 병사는 마치 죽은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믿기지는 않지만 어린 병사는 정말로 번개의 한 지류를 맞았고, 그래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것이었다.

척!

이의방은 서둘러 말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쓰러진 어린 병사를 품에 안았다.

“이런! 이런 일이…….”

이의방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이 순간 누군가 번개를 맞아 죽어야 한다면 그것은 이 어린 병사가 아니라 지금 어가 안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는 황제여야만 했다.

“어찌 된 것인가?”

상장군 정중부도 황제의 어가가 멈춘 것을 보고 앞으로 달려 나와 이 참담한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도 이의방에게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아이의 숨이 멎었습니다.”

“숨이 멎어?”

“그러하옵니다. 놀랍게도 번개를 맞고 죽은 것 같습니다. 이 아이가 맞을 번개가 아닌데 말이옵니다.”

이의방의 말에 정중부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의종이 타고 있는 어가를 노려보자 이의방과 이고 역시 어가를 노려봤다.아이의 죽음으로 무장들의 분노가 더욱 쌓이고 있었다.

“왜 행렬이 멈춘 것인가?”

황제의 어가를 따르던 문신 하나가 말을 몰고 앞으로 나와 질책하듯 정중부에게 물었다.정중부, 그는 정삼품의 상장군이다.

아무리 봐도 문신이 입고 있는 관복으로 보아 정중부보다 상위 관직에 있는 건 아닌 듯한데 문신은 보란 듯이 정중부에게 하대를 했다.이것이 바로 무신들이 얼마만큼 문신들에게 천대와 괄시를 받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으음.”

정중부는 그 물음에 대답 대신 작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한마디로 상대하기 싫다는 행동이었다.지금 놈을 상대했다간 검을 뽑지 않기 위해 검병의 머리 부분을 누르고 있는 자신의 손이 끝내 검을 뽑아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묻지 않소?”

“강인번을 든 병사가 쓰러졌소.”

문신의 되물음에 이의방이 정중부를 대신해서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하지만 이의방의 눈빛 역시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같이 사나웠다.

“겨우 장졸 하나가 쓰러졌다고 어가의 행렬을 멈춘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불충이 아닌가?”

따지고 든다면 문신의 말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었다.이 행렬은 지엄한 고려 황제의 어가 행렬이다. 일개 병졸 하나가 쓰러졌다고 해서 절대 멈출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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