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잃어버린 무언가 (4)
추궁이 계속되자 그는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전까지만 해도 주눅이 들어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한국인들이나 중국인들이나 은폐하고 날조하는 건 다 똑같아요. 이번에 미공개 작품들이 대거 공개된다기에 걱정되는 마음에 빨리 와봤을 뿐이죠. 작품을 가지고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잖아요?”
“괜한 참견인데.”
그의 발언에 경비원이 조용히 꼬투리를 잡았다.
“괜한 참견이 아니에요. 일본은 당신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큰 피해를 봤으니까. 백제가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는 식으로 역사를 왜곡했잖아요? 이번 작품들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찾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뭐 좀 찾으셨나요?”
이번엔 내가 묻자 그는 당당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보나마나 문제의 소지가 있을 만한 작품은 북한 측에서 애진작에 태워버리거나 했겠지. 남겨뒀을 리가 없잖아?”
그의 근거 없는 비방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나는 그의 그 주먹구구식의 비판이 어딘가 가엾게 느껴졌다.
두 번의 한반도 지배 이력이 있기 때문에 한국을 깔보는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던데, 그가 딱 그랬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점에서 그의 비판은 처절한 자기방어처럼도 느껴졌다.
그 정도로 애국심이 넘치는 이가 왜 국적을 변경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저 사람은 그냥 풀어주죠. 어차피 저분이 훔칠만한 물건은 여기 없을 텐데.”
“그럴까요?”
경비원이 풀어주자 갑자기 자유로워진 그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왜 더 이상 반박하지 않지? 사실을 집어 말하니 할 말이 없는 건가요?”
“네, 그러네요.”
“뭐? 그렇게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굴면 이긴 것 같아?!”
그는 바락바락 따지며 날뛰었지만, 곧 경비원들의 손에 다시 구속되어 미술관 바깥으로 쫓겨났다.
전시회 기획은 그렇게 소란스럽게 시작되었다.
이후로도 다른 중국인 패거리들이 미술관을 습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있었지만, 남북 경비를 강화한 덕분인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섭을 포함한 기획단이 작품을 들고 평양으로 들어왔고, 기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문제가 한 가지 있었지만 말이다.
기획을 마치고 기획단에게 기타 작업을 할당한 뒤 나는 훼손된 작품 복원에 나섰다.
대상은 <호렵도>라는 작품으로,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침입한 청태종이 사냥을 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호렵도>
<호렵도>에는 많은 버전의 작품이 있지만, 현존하는 것들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 북한에 있었던 것이었다.
그 새롭게 공개된 <호렵도>는 중국인들의 손에 들려 옮겨지다가 그만 찢어지고 말았다.
오래된 작품이기 때문에 액자에서 잘못 분리만 되더라도 찢어지기 십상인 것을 그렇게 막무가내로 들고 날랐으니 그럴 만도 했다.
북한 측에서는 복원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전시하고자 했다.
대신 중국에 보상금을 요구한 채로 말이다.
당연히 중국에서는 보상금을 줄 수 없다고 버텼고, 대신 복원가를 파견해줄 테니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식이었다.
일반인으로 위장한 경찰들을 보내 절도를 시도할 정도였으니 복원가라고 해서 작품에 허튼짓을 안 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현대인이 고대의 작품에 손댈 순 없다는 생각도 복원 포기에 한몫하기는 했지만, 복원가를 구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장비는 열악하고 실력은 수준급이어야 했으니 말이다.
나는 북한 정부에 내가 직접 복원하겠다고 밝혔다.
어차피 총책임자는 나이니 믿고 맡기겠다는 의사가 전달되어왔다.
미술관 안에 급히 조성된 복원실에 여러 전문가들이 모였다.
내가 미리 요청한 북한의 천연염료와 복원용 접착제, 그리고 윤예종이만 마련된 상태였다.
“이게 굉장히 오래된 작품이라 가지고 복원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닐 텐데. 정말로 가능하겠습니까?”
사내가 물었다.
오래되어서 정말 가루로 만들어진 작품처럼 그림 자체가 바스라져 버릴지도 몰랐다.
연대는 그동안 해왔던 것들 중 특별히 더 오래되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보관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접착제는 최대한 조금 사용하는 게 좋겠어.’
나는 작품을 미리 준비한 윤예종이 위에 올린 후 접착제를 발랐다.
접착제가 마른 후 아주 얇게 찍어낸 윤예종이를 그 위에 겹친 후 균열 부분에 적절한 물감을 칠했다.
붓과의 마찰로 인해서도 작품이 훼손될 수도 있었는데, 그걸 방지하기에는 얇은 한지만 한 게 없었다.
“이렇게 감쪽같다니!”
순식간에 복원을 마치자 북한 측 미술가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복원 현장에 참관했던 <로동신문> 기자도 감탄하며 나와 복원된 작품을 동시에 촬영했다.
***
평양 순안 국제공항에 굉장히 수많은 외국인들이 찾아왔다.
어느 때보다도 이용자가 많은 때였다.
윤예준이 기획한 평양 미술관 개방 전시회 날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준은 부모님의 마중을 위해 공항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오기 전에 수많은 외신과 정계 인사들이 먼저 와서 예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가벼운 척 인사를 건네면서도 예준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안색을 감추지는 못했다.
솔직히 사우디부터 아프리카에 북한까지 방문했으면 예준은 가릴 곳 없이 어디든 가는 화가였다.
그가 가고 싶다면 말이다.
이번 기회로 북한은 미사일 시험 발사를 했을 때보다도 더 큰 관심을 얻게 되었으니 성공률도 100%였다.
개방 전시회 기획이 순조로웠던 만큼 개방하자마자 온갖 노이즈가 평양 미술관을 둘러쌌다.
로동신문에서는 중국인 괴한들이 훼손해놓고 간 <호렵도>를 윤예준이 멋지게 복원해냈다는 기사를 썼고, 해당 내용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 덕에 병자호란이라는 사건에 대한 세계적인 궁금증도 굉장히 커졌다.
남북의 예술 교류 사업이 순조롭게 잘되어가는 걸 보다 못한 일본 고미술협회에서는 북한이 얼마나 폐쇄적인 국가인지에 대해 연일 특별 방송을 송출하기 시작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예준과 북측 미술가 사내의 대화 내용이었다.
당시 삼국시대전 전시장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일본계 미국인은 고미술협회에 북측 미술가가 겪은 고난들을 낱낱이 알렸다.
그렇게 북한 정부가 가족을 인질로 삼아 예술가들을 협박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북한과 사내 둘 모두를 곤란하게 했다.
예준은 너튜브 생방송을 켜 자신과 사내의 대화 내용을 최대한 순하게 바로잡았다.
그리고 해당 사실을 언급한 일본 고미술협회와 방송사들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평상시엔 관심도 없었으면서 비난하기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여러분들이 그 북측 담당자분을 진심으로 걱정했다면 일이 이렇게 됐겠어요?
예준은 북한을 성찰 없이 비난하는 일본 매체와 네티즌에게 그렇게 일갈했다.
고작 한국과 북한, 중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애꿎은 예술가 한 명을 곤란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준의 라이브 방송이 있은 후 일본에 대한 비난 여론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중국 정부의 맞장구에 상황은 고착화되었다.
이번 일로 북한은 작품을 보관할 역량이 없다는 게 증명된 셈이니 적어도 중국의 역사와 관련된 작품은 중국의 미술관에 보관을 의뢰해야 할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옛날 가드너 사건 때 IAA가 보였던 태도와 비슷했다.
그렇게 현대정치와 역사 논쟁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평양 미술관 전시회는 진행되었다.
그들의 논쟁에 관심이 없는 각국의 동양화 연구자들은 거의 매일을 평양 미술관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작품 평론을 적어 연재하기 바빴다.
수십 년간 감추어져 있던 한국화의 반쪽을 되찾았다는 평가였다.
전 세계 미술 잡지에서는 전시회가 진행되는 내내 평양 미술관을 특집으로 다뤘다.
복원된 <호렵도> 또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가로로 쭉 찢어졌었다는데 진짜 감쪽같이 복원했네. 윤예준 대단하다.
-친구가 만주족은 중국이 아니라던데. 그럼 청나라는 중국 역사 아님?
┗다들 중국 역사라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아니라고 하네요~
-근데 왜 일본은 괜히 나섰다가 욕먹음?
┗역사 얘기하는데 일본이 끼게 돼 있나?
중국은 그림 절도를 시도했다는 데에 대해 한 마디 해명도 없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러 논란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그 노이즈는 오히려 평양 미술관에 호재를 가져다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도 비판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일본이 폭로한 바로 그 예술가 처우에 대해 일언반구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고심 끝에 북한에서는 해당 담당자를 미술관 전시가 끝나는 즉시 성과 검토 없이 바로 스탬프 하우스 건축을 허가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일대에 북한 예술가들을 위한 예술 특구를 마련하고 세계 미술계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장려하겠다고 했다.
공동체 담당자에 사내를 역임시키고 말이다.
그 결정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 탄광 같은 곳에 끌려가 살인적인 노동을 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깨는 데에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니까 북한에 대한 이미지 쇄신은 아직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오히려 억압받던 북한 예술가에 대한 관심만 늘어난 것이었다.
한국의 북한학자들은 김정훈이 굉장히 정치적인 역풍을 맞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공화국의 이미지를 쇄신하기는커녕 오히려 수많은 비판을 받게 했고 평양 미술관 일대를 해외 관광객들에게 내어주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관광 수익은 김정훈의 바람만큼 창출되지는 못했다.
북한이 진정한 쇄신을 감행하기 전까지는 북한행을 감수하는 예술가가 그리 많아지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오히려 한국의 관광 수입이 더 늘 것이었다.
이번 일로 한국화에 관심이 생긴 많은 예술가들이 선택하기에 한국은 굉장히 안전한 선지인 것이었다.
그 한편으로는 김정훈의 운명에 남북 갈등의 운명도 동시에 달려 있다고 평가했다.
가만히 앉아서 축출된다면 분단체제는 더욱 오래 갈 것이지만, 오히려 완전 개방을 밀어붙이며 예술 국책 사업에 대한 태도를 더욱 호전적으로 이어나간다면 남북통일이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어떻게 될 것인지는 당장 알 수 없었다.
적어도 가만히 앉아만 있을 생각은 아닌 듯했다.
김정훈은 평양 미술관 폐회식에 맞춰 공연을 해줄 문화예술단을 남한에서 초청했다.
평양에 있는 시민들, 외국 관람객들을 상대로 남북의 적극적인 예술 교류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
평양 미술관에서 진행된 문화예술단의 폐회식은 평양 스탬프 하우스의 기공식이 되었다.
북한의 신식 예술단과 한국의 아이돌, 중견 가수들이 총출동해 꾸린 공연이었다.
한국의 현대와 전통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값진 공연이라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공연 관람을 마친 뒤 다시 고려호텔로 가기 위해 동평양대극장을 나섰다.
나와 한국 연예인들을 취재하기 위해 모인 기자들 사이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오늘 고려호텔에서 밤을 보낸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마음고생 심하셨어요. 괜히 그 기사가 나버려서.”
“그렇긴 한데 결과적으로는 잘되지 않았습니까.”
그는 일본에서 폭로기사를 낸 뒤 호텔 방 바깥으로 나서지도 못하고 숨어 지냈다.
언제 보위부에서 또 그를 끌고 갈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평양 예술특구의 양지 위에 놓일 수 있었고, 쉽게 죽일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사내는 그의 뒤에 선 노인과 젊은 여자 두 명을 소개했다.
“다 윤예준 씨, 아니. 윤예준 화가님 덕분입니다. 일이 이렇게 된 덕분에 저희 모친을 평양으로 모셔올 수 있었어요. 여기 이 아이들은 제 여동생들입니다.”
듣기로 그의 어머니는 60이 조금 넘은 나이였지만 보기엔 그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황해도에서 온갖 고생을 다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가 세 명의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조금은 알고 있었다.
존경심을 담아 악수를 청했다.
그럼 그녀는 보기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나의 손을 맞잡아주었다.
여동생들은 나 덕분에 평양 구경에 호강했다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의 라이브 방송이 아니었다면 또 죽을 뻔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