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익명의 누군가 (3)
-Edan: 저 변호사 좀 선임해주세요.
경매가 끝난 후 에단에게 수고했다는 연락을 보내자 그런 답장이 왔다.
그에 따르면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 AI FEEL U 보안 프로그램 담당자(아이다)와 정체불명의 해커 집단이 치열한 공성전을 벌였다.
아이다의 보안 프로그램도 우수했고, 그녀의 대응들도 모두 현명했다.
아마 그대로 경매가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단이 보기에 해커 집단은 경매 종료 시점이 아니라 크리스더비 사업 담당자 구속 시점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AI FEEL U 해석이 끝나는 순간 적절한 악성코드로 유효한 공격을 시도하려 들 게 뻔했다.
아이다가 해킹을 방어하는 동안 다급히 새로운 보안 프로그램도 함께 개발하고 있겠지만, 아이다가 빠를지 해커들이 빠를지는 확실치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에단은 공격 IP를 역추적해 해커들의 프로그램을 모두 잠가버리고, 그 안에 담긴 모든 정보들을 백업한 후 경찰에 그냥 넘겨버렸다고 했다.
파나마 현지 경찰들이 해당 좌표로 출동한 상태라고.
하지만 에단이 사용한 악성코드와 IP공격도 불법적인 것은 확실한 상황이라 정당방위를 인정받으려면 실력 있는 변호사가 필요했다.
-YJ: 고생하셨네요. 알겠어요. 제가 실력 있는 변호사로 선임해드릴 테니 걱정은 마세요.
-Edan: 뭘요. 저도 군사 전시회 잘 봤어요.
크리스더비가 치사하게 나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사이버 공격까지 해올 줄이야.
나는 아이다에게도 전화해 격려 인사를 했다.
“경매하는 동안 해킹 시도가 많았다면서요? 고생 많으셨네요.”
-네? 어떻게 알았어요? 그렇긴 했는데 지금은 잠잠해졌어요.
나는 익명의 누군가가 아이다를 도와 공격자들의 컴퓨터를 다운시켜주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아이다의 프로그래밍 실력을 못 믿는 건 아니었지만, 작은 위험이라도 없는 게 나으니까 말이다.
-아…… 그랬대요? 왜 그랬대? 남는 게 시간이라 평소에 여분 보안체계 대여섯 개쯤은 당연히 짜놨지.
“네? 그럼 그분은 괜히 체포된 거예요?”
-그런 셈이죠. 그대로 설치만 하면 3초 만에 뚝딱인데. 어이없기는 하지만 바보 도움이라도 받으니까 기분은 좋네요.
바보는 아니고, 아마 아이다의 실력이 더 좋은 덕분일 것이었다.
***
반군과의 여론전도, 크리스더비와의 사이버전도 끝나니 며칠쯤은 여유로운 가을날을 만끽할 수 있었다.
최근의 그 두 사건이 아니더라도 요즘은 너무 바쁘게 살아왔다.
목적 없이 그림을 그려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정도는 여유롭게 쉬면서 그림이나 그려볼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은 지금 오스트리아에서 새로운 작업을 하느라고 바빴다.
아트밸리 숙소에는 오직 나뿐이었다.
수정과에 얼음을 띄운 다음 팬케이크 반죽에 고춧가루를 넣어 구웠다.
고춧가루는 전혀 맵지 않았고, 오히려 팬케이크를 퍽퍽하게 할 뿐이었다.
몇 입 먹어보다 영 심심해 냉장고에서 볶음김치를 꺼냈다.
썩 어울리는 맛은 아니었지만, 김치의 짠맛과 씹는 맛에 못 먹어줄 정도는 아니게 되었다.
다 먹어치운 뒤 볶음김치 통을 냉장고에 도로 넣고 문을 닫았다.
그제야 어머니가 냉장고 문에 적어 붙여둔 포스트잇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괴식 금지.
나는 수성펜을 가져와 ‘괴’자를 지우고 ‘미식’이라는 단어로 고쳐 적었다.
캔버스와 붓, 물감 등을 챙겨 아고라센터 뒤에 있는 언덕을 올랐다.
많은 화가들이 YJ에디션을 쓰고 가상현실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아날로그가 취향이었다.
언덕 위에 올라서면 아트밸리 전경과 함께 그 너머 바다가 내다보였다.
바다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설치된 선베드를 펼쳐 누워 수평선을 내다보았다.
어떤 그림을 그려볼지 고민을 하며 잠시 단잠에 빠지려던 때였다.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간만의 여유를 잠으로 낭비할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네, 여보세요?”
-네빌입니다. 댁에 안 계십니까?
네빌이라면 영국 왕실에서 명작의 진위 여부를 두고 잠시 설전을 벌였던 백작이었다.
“네? 지금 어디신데요?”
-아트밸리에 있는 숙소 앞입니다. 몇 번 연락드렸는데 전화가 이제야 연결이 되네요.
그동안은 바빠서 연락을 받지 못했다.
나는 잠시 선베드를 그대로 두고 숙소로 내려가 보았다.
버킹엄의 문장이 박혀 있는 검은 차량 여러 대가 숙소 건물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
숙소 현관 복도에서 걸어 나오던 네빌은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네빌 씨가 이렇게 반갑게 맞아주는 유색인은 제가 유일하죠?”
“그럴 리가요. 제가 요즘은 동양인 친구가 두 명이나 더 있는데요.”
아직 멀었다.
네빌과 내가 인사를 나누는 걸 본 왕실 관계자들은 음식으로 보이는 것들을 바쁘게 숙소 앞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일부러 점심때 맞춰서 왔습니다. 식사는 아직이시죠?”
“아…… 그럼요. 아직입니다.”
속에서 볶음김치와 섞인 팬케이크 반죽이 들끓었지만 우선 그렇다고 해두었다.
네빌과 왕실 직원들을 숙소 안으로 안내했다.
“신발 벗고 들어오세요. 저희 숙소는 좌식입니다.”
“아, 어이쿠. 이런.”
이미 구둣발로 한 발 내디딘 네빌이 엉거주춤 멈춰 섰다.
그들은 몸에 좋다는 찻잎부터 시작해서 나의 입맛에 맞춘 매운 음식까지, 굉장히 많은 음식들을 세팅했다.
왕실 수석 요리사가 미국까지 동행해 와서 만든 음식이라고 했다.
배가 부른 상태였지만 콧속을 찌르는 매운 냄새가 군침을 돌게 했다.
음식을 먹으며 네빌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YJ레딩 덕분에 미술 대학은 죽어갔지만, 오히려 영국 미술계는 성장했다고 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 그는 여왕의 편지를 내게 건넸다.
-...(전략)... 곧 봐요, 예준 군. 참고로 영국에도 좋은 장난감들이 많아요. 미국 못지않게. 이 늙은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 잘 알지요? 영국도 꼭 한 번 더 들러줘요.
좋은 장난감이라면 무기를 이야기하는 것일 터였다.
네빌의 말에 의하면 군사 강국인 미국이 나의 군사 전시회 이후로 크게 이미지 쇄신을 했는데, 이미지 쇄신이 필요한 건 미국뿐만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까,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나에 대해 조금 섭섭해하고 계신다는 뜻이었다.
나는 최대한 빨리 기회를 만들어보겠다고 말한 뒤 그들을 돌려보냈다.
네빌은 현관 앞에 진하게 남긴 발 도장을 열심히 지운 뒤 아트밸리를 떠났다.
검은 차량들이 줄지어 나가는 걸 확인하고 다시 언덕을 오르려고 했다.
후미에 붙어 있던 검은 차량은 앞차들을 마저 따라가지 않고 숙소 입구 앞으로 이동해 멈춰 섰다.
그 차에는 버킹엄의 문장 대신 미국 외교부 번호판이 붙어 있었다.
차에서 내린 남성은 나를 보더니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넸다.
“누구세요?”
남성은 주미 한국 대사 사무관이었다.
내게 용건이 있어 찾아왔다가, 네빌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여태 기다렸다고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림을 그리기 어려울 듯했다.
그를 숙소 안으로 안내했다.
따로 안내를 해주기 전까지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소파를 권하자 신발을 벗고 들어와 앉았다.
“무슨 일이세요?”
네빌에게 받은 찻잎을 바로 우려내 건넸다.
그는 한 모금 들이켜본 뒤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뒤로 두 번 다시 차에 손을 대지 않았다.
몸에만 좋은 모양이었다.
“북한에서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는 작품을 공개하겠다고 했습니다.”
북한과 한국은 전통 한국화를 나눠 소장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 한국화에 대한 대한동양재단의 연구는 영원히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미술관을 이번에 개방하겠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었다.
“엄청 잘된 일이네요.”
“그렇죠. 하지만 우리에게만 좋은 소식은 아닌 모양입니다.”
실제로 그 소식이 알려진 이후 대한동양재단을 포함한 한국 동양화단에서는 북한과의 예술 교류를 추진해야 한다는 여론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걸출한 화가들의 나머지 작품들을 통해 한국에 있는 작품의 진품 여부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과 일본이었다.
그들은 북한과 한국이 서로 적대국임을 명시하며 작품 공개를 중국과 일본에서 대신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그럴 마음이 없다고는 했지만, 앞으로 중국과 일본이 어떤 방식으로 북한을 꼬여낼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예술 교류도 끝입니다. 아마 일이 끝나고 나면 그림을 아예 매입하려고 나오기도 할 텐데. 예술로 포로도 생환 받은 윤예준 화가님이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찾아온 겁니다.”
***
나는 외교부의 제안을 수락했다.
북한의 미공개 미술 작품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건 단순히 YJ퓨리퍼즈와 크리스더비가 경매 작품으로 경쟁하는 것과는 결이 달랐다.
이들의 다툼은 전쟁의 연장일 뿐이었다.
지난번 독도도 그랬고, 조금이라도 한 발 뻗어놓을 생각인 것이었다.
나는 일전에 국민들과 함께 독도 이벤트를 성공리에 끝낸 적이 있었다.
‘일본이나 중국이 작품을 가져가 버리면 형태와 장소만 달라질 뿐, 작품은 결국 다시 감춰지게 될 거야.’
한중일 3국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오랫동안 문화를 뒤섞어온 나라들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남의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도마 위에 오른 건 전통 한국화였다.
한국과 북한으로서는 작품을 사수해도 본전인 상황이었다.
본전을 찾기 위해 사력을 쏟아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사무관에게 예술 교류 사업에 윤예준이 참여한다는 기사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수포로 돌아가기 전에 한국의 예술 교류 사업에 대한 관심도를 높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시점엔 북한과 한국의 평화적 예술 교류가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다.
일단 급한 불은 끈 느낌이지만 미리 알린 데에 따른 단점도 있었다.
김포공항 입국대에 한중일뿐만 아니라 홍콩, 미국, 영국 등 외신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모여든 것이었다.
나는 한국 정부의 의전 덕분에 입국대를 원활하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
기자들이 수많은 질문 세례를 퍼부었지만, 대부분 얼마 전 있었던 아프간 사건이나 크리스더비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그렇게 공항을 완전히 빠져나가려는데 소란스러운 곳에서도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준아!”
나는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지만 팻말과 카메라를 든 인파 때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가시죠! 다칠 수도 있습니다.”
“잠시만요.”
나는 정부 관계자의 안내를 잠시 멈춘 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지나가게 해주세요!”
이번엔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를 보러 다급히 한국 공항까지 왔지만 기자들 때문에 발이 묶여 있는 모양이었다.
잘못하면 정부 관계자의 말대로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잠깐 길 좀 터주세요! 사람이 못 지나가잖아요?”
내가 소리가 난 방향을 가리키며 외치자 기자들은 웅성대며 좌우로 물러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