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익명의 누군가 (2)
나는 둘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에단을 고용해 범인과 정보전을 벌일지, 아니면 선제공격을 해서 해킹 시도를 원천 차단할지 말이다.
우선 범인의 동향을 파악해야 했다.
그 뒤 따로 연락 주겠다고 했더니 에단은 자신의 휴대폰 번호 대신 인터넷 주소를 하나 건네주었다.
에단에게 임시 직원증을 주고 돌려보냈다.
나는 에단이 접근했던 YJ퓨리퍼즈 인트라넷의 경매 기획 페이지에 접속했다.
사이트를 봤으면 그도 알았겠지만, 다음 경매엔 굉장히 특별한 작품 경매가 예정되어 있었다.
포로 생환을 위해서 언론의 도움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경매 홍보에서까지 화제성에 집착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견원지간이었던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힘을 합쳐 새로운 경매장 ‘크리스더비’를 설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뒤로 크리스더비는 꽤 가파른 성장세에 놓였는데, 아무래도 크리스티와 소더비 규모의 단순합 수준까지도 성장할 듯했다.
YJ퓨리퍼즈로서는 위험한 일이었다.
아직 YJ퓨리퍼즈가 크리스더비의 규모를 웃돌 정도로 앞선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행할 마음이 없는지 한 유명 여배우의 머리카락을 경매에 내놓을 거라는 기사를 흘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대로 두었다간 크리스더비의 재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었다.
머리카락 건은 크리스더비의 공식적인 발표는 아니었고, 인터넷 찌라시로 위장한 여론 조성용 기사였다.
아무리 그들이라도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화제성이 있는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구해놨으니 그런 찌라시라도 흘리는 것일 터였다.
아니면 절대 안 들킬 거짓말이거나 말이다.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샬롯에게 전화를 해보았는데, 그녀는 기증할 것도 아닌데 뭐 하러 머리를 잘라다 파느냐고 질색을 했다.
너무 징그럽다는 것이었다.
제안은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했다.
‘제안은 받았는데 거절했다고……?’
머리카락이 경매에 올라와서 소식을 흘린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일단 홍보부터 해놓은 뒤 이 배우 저 배우 만나고 다니며 머리카락을 구하러 다녔다는 뜻이었다.
샬롯에게 주변 유명 여배우들 중 그들에게 머리를 판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며칠 뒤 그녀는 적어도 자신이 아는 사람들 중에는 없다고 전했다.
결국 머리카락을 구했을 것인가, 아니면 실패했을 것인가.
성공했든 실패했든 AI FEEL U에 접근을 시도한 건 크리스더비일 확률이 컸다.
AI FEEL U에서 공개할 작품이 무엇인지 미리 안 다음 그것의 화제성을 덮을 만한 다른 작품을 배치할 계획을 세웠을 테니 말이다.
나는 결국 에단이 준 인터넷 주소로 들어갔다.
입력창에 함께 전달받은 코드를 입력하니 몇 가지 보안 프로그램이 다운로드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표시된 채팅창에 ‘C’라고 입력해 전송하자 ‘Edan’이라는 사용자가 채팅방에 초대되었다.
-YJ: 위험한 불법 같은 건 저지르지 말고, 되도록이면 안전하게 갑시다. 혹시 접근한 PC 지역이 파나마인가요?
-Edan: 잠시만요.
-Edan: 맞네요.
그럼 굳이 신상을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새로운 크리스더비 법인이 신고된 국가가 바로 파나마이기 때문이었다.
-YJ: 범인은 크리스더비라는 신생 경매업체예요. 아트밸리의 다음 경매 일정에 어떤 작품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이런 짓을 벌인 거죠. 그분들은 다시 YJ퓨리퍼즈를 꺾고 다시 1위 업체가 될 필요가 있거든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에단은 그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크리스티와 소더비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세세하게 말이다.
-Edan: 그럼 따로 구한 물건이 있는지 알아봐야겠네요. 머리카락이 물론 화제성이 있기는 한데 더 좋은 작품이 있으면 그것도 공개할 테니까요.
-YJ: 그렇죠. 그래도 다른 작품보다는 정말 머리카락을 구한 게 맞는지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Edan: 왜요?
현재 AI FEEl U에서 확보한 작품이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큰 화제를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크리스더비가 뭐든 구했을 확률도 그리 높지 않았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AI FEEL U의 상품에는 밀릴 게 분명했다.
-YJ: 미공개 서버 들어가 보셨다고 하지 않았나요?
-Edan: 그렇긴 한데 제가 그림에는 눈뜬장님이라……
-YJ: 마네의 작품을 한 점 확보했어요. 세상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 없는 작품.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이죠.
아마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원본도, 모작도 없는 작품이었다.
***
크리스더비는 결사 항전이라도 감수할 생각인지 YJ퓨리퍼즈의 경매 날에 맞추어 창사 1차 경매 일정을 잡았다.
같은 날 경매가 진행되는 것이었다.
YJ퓨리퍼즈와 크리스더비 사이의 악연을 알고 있는 세계인들은 그들의 두 번째 경쟁에 귀추를 주목했다.
윤예준의 YJ퓨리퍼즈는 인상주의의 아버지 ‘에두아르 마네’의 잊혀진 작품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미군 철수 사건이 터지기 전, 경매 상품을 준비하던 예준은 19세기에 프랑스에서 있었던 마네의 아틀리에에서 한 ‘강아지’ 작품을 발견했다.
강아지를 원했던 옆집 딸에게 진짜 강아지 대신 그려줬다고 알려진 미지의 그림이었다.
‘상점의 운반용 케이스를 보니 마음이 아파 대신 화폭에 담아봤으니 만족해주길 바란다.’라는 실제 프랑스어 문장이 홍보 포스터에 함께 표시된 상태였다.
크리스더비 측에서도 현장 경매 인터넷 라이브 플랫폼을 개발한 뒤 같은 조건에서 맞불을 놓았다.
크리스더비가 공개하기로 한 상품은 유명 여배우 ‘크리스틴’의 머리카락이었다.
예상가는 한화로 13억 원 수준이었다.
샬롯보다는 연배가 조금 더 된 배우인데, 그 유명세를 틈타 잠시 YJ퓨리퍼즈의 인기를 앞질렀다.
하지만 그 과정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자신의 이름이 거론된 데에 당혹감을 느낀 크리스틴이 삭발을 한 모습을 인터넷에 게시한 것이었다.
크리스틴은 차기작 연기를 위해 몇 달 전부터 삭발 상태라는 사실을 전했다.
한 제작사에서 19세기 프랑스의 유명 소설 <부르봉의 혁명가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영화 제작 소식은 극비에 부쳐진 상태였다.
<부르봉의 혁명가들>은 항상 영상화 실적이 좋지 않았던 작품이었기 때문에 홍보로는 기대를 모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제 머리를 비싸게 팔았다는 배우 개인에 대한 낭설을 잡기 위해 이제야 작품 제작 사실을 공개한 것이었다.
전 세계를 들썩거리게 만든 해명이었다.
그러나 크리스더비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크리스더비 측에서는 크리스틴이 영화를 위해 머리를 잘랐으며, 그것을 그냥 버리기 아까워 팔고 싶어 했다고 주장했다.
크리스틴은 자신에게 머리카락을 팔아달라고 부탁한 소더비 측의 요청서를 세간에 알렸다.
굉장히 최근자 메일이었는데, 그다음으로 필요한 정보는 ‘그럼 크리스틴은 그 요청이 있기 전에 머리를 잘랐느냐, 후에 잘랐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워낙에 극비에 부쳐진 촬영 일정이었기 때문에 삭발 시점을 증명할 어떤 증거도 없었다.
그렇게 여론전이 고착화되었다.
경매 당일이 되어서까지도 크리스더비에 대한 관심도가 조금 더 우세했다.
크리스더비 경매 스트리밍 어플리케이션의 서버가 잠시 다운되는 소동도 있었지만 어디서 급하게 서버를 빌려온 것인지 금방 복구하기는 했다.
연예계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크리스더비로, 예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YJ퓨리퍼즈로 접속했다.
그때까지도 제작사와 크리스더비 측의 갈등은 계속되어갔는데, 영화사 측에서 크리스틴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영화에 대한 정보를 흘릴수록 YJ퓨리퍼즈는 계속 불리해져 갔다.
크리스틴이 연기가 어렵기로 소문난 ‘판틴’ 역을 맡았다는 소식부터 시작해 장발장 역을 맡은 이가 유명 뮤지컬 배우인 ‘휴스턴 제이크 맨’이라는 소식까지.
관객층과 기자들을 흥분하게 하기 충분한 소식이 나날이 쏟아져나왔다.
그렇게 YJ퓨리퍼즈와 크리스더비의 경매가 동시에 개회되었다.
경매 시작에 앞서 아트밸리의 주인 윤예준이 나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소더비가 크리스틴 배우님에게 머리카락을 요구하기 6개월 전, 크리스틴 배우님의 휴대폰 문자 내역을 공개하겠습니다.”
***
여론이 격화되는 동안 나는 크리스틴이라는 배우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당신의 오해를 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나의 제안에 크리스틴이 말했다.
-저는 좋아요. 크리스더비와 경쟁을 하시는 입장이니 윤 화가님께도 그게 좋겠네요.
나는 크리스틴에게 아이다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녀에게 포렌식을 맡기면 반나절 만에 휴대폰의 모든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그중 크리스더비에게 머리카락을 팔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만한 정보들만 추려서 세간에 공개만 하면 되었다.
-기자회견을 열어야 할까요? 언제가 좋을 것 같으세요?
“굳이 기자회견을 저희가 열 필요는 없죠. 이미 저쪽에서 잘 모아주고 있는데.”
화제는 배를 밀어주는 바람과 같아서 강하면 강할수록 배는 순항했다.
하지만 바람의 강도가 너무 세지면 파도가 일어나 크리스더비를 뒤집어버리기 일쑤였다.
경매 시작 직전에 그 13억짜리 머리카락이 가짜라는 게 알려지면 크리스더비의 스트리밍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하던 모든 관람객들이 YJ퓨리퍼즈의 AI FEEL U로 넘어오게 되어 있었다.
내게도, 크리스틴에게도 그게 이익인 것이었다.
경매 시작 전 마이크를 잡은 나는 그 사실을 모두에게 알린 뒤 크리스틴을 무대 위로 안내했다.
그리고 YJ퓨리퍼즈 실시간 이용자 수를 살폈다.
라이브 방송이 시작되던 시점으로부터 정확히 두 배 상승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했다;; 이름만 바꿨지 반성이 없네.
-하긴. 크리스틴이 뭐가 아쉬워서 머리카락을 팔아? 난 처음부터 안 낚였다.
-뭐야! 벌써 마네 작품 공개됨?!
크리스틴은 프로젝터를 통해 삭제되었던 감독과의 문자 내역과 미용실 결제 정보, 가발 구매 정보 등 아예 논란이 없도록 철저히 공개했다.
그 즉시 크리스더비는 경찰에 의해 경매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작품을 맡긴 작가들에게 수억 원대의 위약금을 물어주느라고 고생 좀 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YJ퓨리퍼즈는 역대급의 관객들을 대상으로 현장 경매를 진행했다.
모든 작품이 예상가를 뛰어넘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으뜸은 전생에 그린 나의 작품 <강아지>였다.
크리스더비를 조금 더 조사해보던 중 에단은 ‘그 머리카락이 진짜라는 걸 전제하고 대응을 준비하셔야 할 것’이라는 언질을 받았다.
그동안 자신은 AI FEEL U의 방화벽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해놓고 있겠다고 했다.
크리스티와 소더비의 장례식 파문 이후 두 경매장은 다시 회복 추세를 보였다.
언젠간 다시 1위 위치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이 다시 YJ퓨리퍼즈의 지위를 위협할 때를 대비해 결정적인 무기를 준비해두어야 했는데, 그때 문득 떠오른 게 바로 <강아지>였다.
딸에게 전달하기 직전 전쟁이 터져 방치해둔 작품이었고, 돌아왔을 땐 건물이 무너진 상태였다.
수습하지 못하고 그냥 둘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몰라 그 장소에 방문해 땅을 파보았더니 찢어진 <강아지>가 나왔다.
그렇게 <강아지> 복원을 완료했을 때쯤 미군의 아프간 철수 사태가 터졌고, 크리스티와 소더비는 크리스더비를 창설해 때맞춰 최후통첩을 내민 것이었다.
즉시 CEEA로 이동해 작품을 복원한 뒤 연대측정을 의뢰했다.
진품이 맞다는 인증을 받은 뒤 프랑스 정부와 IAA로부터 YJ퓨리퍼즈에서 경매를 부쳐도 된다는 허가를 받은 뒤 가져온 것이었다.
그림이 공개되자 경매장은 정적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냥 강아지 그림일 뿐이었지만 나, 마네는 그림마다 예상을 깨는 묘사로 일찍이 인정을 받은 상태였다.
<강아지>에서도 그 실력은 여전했던 것이었다.
수집가들과 연구가들, 비평가들은 경쟁적으로 호가했다.
“강아지에게 마네가 느꼈던 그 감정이 그대로 들어가 있는 듯하다.”
“어두운 배경에 잘 녹아드는 강아지 묘사가 일품이야!”
그렇게 오랜 호가 경쟁이 이어졌고, 예상가의 두 배가 넘는 가격에 낙찰되었다.
400억 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