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231화 (231/241)

231화. 국제무대에 서려면

정계 테이블의 분위기는 유달리 연극적이고 숨 막히는 구석이 있었다.

미국 동북부 주지사들과 초대받지 않은 공무원들이 사교 모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다가서자 찰리가 반갑게 맞으며 소개했다.

“드디어 주인공이 오셨습니다! 다들 인사하시죠. 세계 최고의 화가, 윤예준 씨가 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찰리가 소개하자마자 저마다 가벼운 인사를 건네며 명함을 내밀었다.

초대받지 못했다고 꼭 연회장에 들어오지 말란 법은 없었다.

초대 내빈이 동행을 원하면 그렇게 해줘야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장소에는 동행자들이 너무 많았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내가 찰리에게 속삭이며 묻자 찰리는 이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울먹거렸다.

정치적 문제가 개입되어 있을 때마다 찰리가 잘 써먹는 방식이 바로 그 불쌍한 척이었다.

괘씸했지만 보통 일이 아니라는 사인이기도 했다.

“건물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평소에 굉장히 존경하던 분인데, 이런 식으로라도 뵙게 되니 굉장히 큰 영광이군요.”

자세가 꼿꼿한 한 남성이 다가서며 인사를 했다.

동행한 손님들 중엔 가장 지체가 높아 보였다.

“저야말로 와주셔서 감사하죠.”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미 합참 정보작전본부의 콜린 테일러라고 합니다.”

콜린이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정치인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군인일 줄은 몰랐다.

별이 여럿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보통 높은 사람이 아닌 듯했다.

그와 악수를 나누며 멀리 돌아보았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이들을 감시하던 살마는 이제 그 자리에 없었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찰리를 제외한 각 주 주지사들은 자리를 떴지만 미군 관계자들은 계속 자리를 지키며 위스키 잔을 부딪쳤다.

하지만 마실 때마다 취하지 않을 만큼만 홀짝댈 뿐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찰리와 살마, 그리고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서 이쪽을 주시하던 스티븐과 스펙터클라크 대표까지.

나는 더 참지 않고 말했다.

“콜린 중장님, 오늘 굉장히 좋은 날인데 표정이 많이 안 좋으시네요. 뭐,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콜린은 뒤늦게 표정을 풀며 손사래를 쳤다.

“아, 별거 아닙니다. 걱정거리 없는 사람도 있습니까? 그래도 오늘 기분은 썩 나쁘지 않습니다. 제가 평상시에 표정이 좀 없는 편이라 오해하신 듯합니다.”

“그래요? 그래도 말씀해보시죠. 군사 기밀 같은 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요.”

나의 농담에 미군 관계자들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함께 웃던 콜린이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하하하. 여기까지 와서 일 생각을 하겠습니까? 군사 기밀 같은 건 아니고, 사실 얼마 전에 만났던 퇴역 병사 한 명이 며칠째 계속 머릿속을 떠나질 않아서요.”

콜린이 만났다던 퇴역군인은 양쪽 다리가 모두 없는 상태였다고 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만, 다리가 없어 그마저도 오래 돌아다니지 못한다고.

말할 것도 없이 전쟁 중 다쳐서 전역한 병사였는데, 그 상처만 해도 벌써 몇 년은 되었다.

전생의 나도 그렇고 오마르도 그렇고, 다리 한쪽만 말썽이어도 평생을 고생하지 않던가?

콜린에겐 불편한 몸으로 가난하게 사는 그 병사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불행한 일은 굉장히 많이 벌어지더군요. 이번에 저희 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 것 아시나요? 전선에서 아예 빠진 겁니다. 그에 따라 주민들의 피해도 많이 생긴 상황인데, 전쟁을 끝내려 해도 그로 인해 사람들이 죽어나가게 되고 있으니 개인적으로도 회의가 큰 참이죠.”

다리가 없는 병사는 아프간에서 복무했던 장병인데, 다리가 잘린 후 퇴역했다가 이번 군의 결정에 반대하고 나섰다고 했다.

전선에서 빠지면 포로로 잡힌 병사들부터 시작해 점령지 주민들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소모전을 지속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미국으로 복귀하는 군 장비들은 다시 활용할 만도 했지만, 콜린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에플사에서 YJ에디션을 만들면서 새로 개발한 가상현실 기술이 접목된 새로운 군 장비가 생길 거라고 했다.

거기까지는 뉴스에 다 난 내용이라고.

콜린은 버려질 장비에 대해 언급했다.

“그게 이젠 다 폐품이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고, 또 수많은 생명을 살린 물건들입니다. 그야말로 애증이 깊은 장비들이지요. 이대로라면 군사박물관에 처박히게 될 텐데. 고철값이라도 받고 어디 팔아야 그 돈으로 퇴역군인들을 보상하는 데에 좀 쓸 것 아닙니까?”

콜린의 그 말에 다른 군 관계자들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을 본 콜린은 이미 다 결정된 일이고 술도 들어갔는데 뭐 어떠냐는 식으로 샴페인을 들이켰다.

“물론 그렇죠. 당연히 어디 팔 수는 없고. 그래도 퇴역군인들을 돕는 방식으로 한 번쯤은 고민해봐도 되지 않나, 싶은 겁니다.”

콜린이 시상식에 온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오르쉐 자동차를 디자인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라면 그 비행기에 그림을 멋지게 그려내 사람들의 상처를 위무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참전용사 퇴역군인들에 대한 복지도 여태 레딩이나 LA에서 겪었던 차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가의 지원사업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건 사람들의 관심이었다.

나의 그림이라면 구식 장비들을 관람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고, 퇴역군인들의 처우에 대한 관심도 늘어날 게 분명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는 부탁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너무 없어서 의아할 정도로.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저는 군인들도 전쟁 피해자라고 생각하거든요. 전쟁 피해가 얼마나 참혹한지도 잘 알고 있고요.”

“정말입니까? 맞습니다. 누가 총 쏘기를 좋아해서 사지로 제 몸을 들이밀었겠습니까.”

콜린은 굉장히 기뻐하며 감사 인사를 하다가 말했다.

“그런데 좀 위험할 수도 있을 텐데. 뒤늦게 걱정이 되는군요.”

“위험하다뇨? 그냥 디자인을 할 뿐인데.”

“아시지 않습니까? 국가에서 하는 일에는 언제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입니다. 이번 아프간 철수에 대해서도 그랬죠.”

그건 그랬다.

항상 있을 수밖에 없는 논쟁에서 국가는 한 가지를 꼭 선택해 이행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총기시위 때보다도 훨씬 건강한 상태였다.

완력으로 쉽게 해코지를 당할 만한 신체 조건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때보다 인지도가 훨씬 더 높기도 했고 말이다.

“오늘 하모니즘과 평화, 화합 관련 연설을 하고 내려온 참인데. 당연히 해야죠. 장비 보여주시면 바로 디자인 시작할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콜린의 명함에 적힌 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했다.

자리를 뜨려는 때 콜린이 다급히 붙잡아 말했다.

“제가 드릴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항상 외압을 조심하십시오.”

콜린은 자신도 반 농담 삼아 무기를 그냥 팔아버렸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아랍국가에 말이다.

장비를 철수할 때도 여러 노이즈가 있었는데 꿋꿋이 실어왔다고 했으니 얼마나 많은 국가들이 그 장비들을 원하고 있는지는 어림해보지 않아도 실감할 수 있었다.

‘무기는 뺐지만, 아직 탐은 내고 있다는 건가? 언제든 다시 들여올 수 있다고?’

미국은 무기를 팔 수 없도록 아예 폐기하려 했다.

내게 디자인을 맡긴다면 다시 활용할 수도 없을 테니 전투력 측면에선 폐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아랍 공작원들이 미국에서 뭐든 공작을 벌여 무기 매입에 성공한다고 치더라도, 일단 내가 전투기 디자인을 포기해야만 가능해진다는 것이었다.

누구든 내게 큰돈을 주며 미군의 사업 제안을 거절하라고 제안해올지도 몰랐다.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예술가라……’

그제야 살마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녀의 말은 외압을 조심하라는 콜린의 말과 의도가 같았다.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할 것이었다.

내게도 큰 뒷돈보다는 세계 평화가 중요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그 외압이라는 건 내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내겐 큰 뒷돈보다 평화를 위한 작은 움직임이 더 중요했다.

오히려 빨리 디자인을 끝내 전투기를 은퇴시켜야 할 이유만 커졌다.

***

연회장 안을 돌아다니던 상철은 스티븐이 갑자기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나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예준 쪽을 보았는데, 예준은 그를 따라가 볼 것을 눈짓으로 청했다.

예준은 군 장성들과의 대화로 한창 바쁜 상태였다.

연회장 바깥으로 따라 나왔는데, 스티븐은 생각보다 통화를 짧게 끝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빈센……조 씨 맞으시죠? 편집장님.”

“알아보시네요. 영광입니다. 스티븐 대표님도 화장실 찾으세요?”

스티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두 번째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자 고맙게도 스티븐은 바로 전화를 받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번에 저희 에플사와의 기술 협약을 통해 무기 개발에 성공한 거 아시죠? 저희 회사도 철학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화학 살상 무기를 만들었다기보다는…… YJ에디션에 활용된 가상현실 기술을 통해 안전하고 저렴한 시뮬레이션 훈련 프로그램이나 현장감 넘치는 원격 전투기 커멘더실을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준 수준이거든요.”

하지만 그 기술 개발과 미군의 아프간 철수가 겹치면서 에플사가 꽤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휴대폰을 판 돈으로 사람 죽이는 무기나 만들었다는 비난도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신무기가 개발되는 바람에 포로 가족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포로 가족이요?”

“네. 전쟁을 치르면서 미군 포로를 많이 확보한 모양인데, 원래 전투를 진행하면서 포로를 구출하는 작전도 동시에 진행합니다. 아직 포로가 많은 상황에서 군대를 철수해버렸으니 가족들의 억장이 무너질 만도 하죠.”

가족들은 강성하게 활동했다.

에플 본사 앞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건 에플의 탓도,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꼭 잘못이 있다면 포로를 붙잡은 아프간 반군들 아닌가.

“그거 관련 보고 전화를 받은 겁니다.”

“아…… 참 골치가 아프시겠네요.”

“솔직히 조금 그렇습니다. 그런데 화장실은 안 가십니까?”

상철은 인사를 건네고 화장실로 들어와 검색해보았다.

군은 철수했고 포로 가족들은 철수를 반대했다.

그들은 제 아들 목숨 하나를 위해 남의 아들 수천 명을 사지로 내몬다느니 하는 몰상식한 비판들까지 감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큰 돈을 지불하면 포로를 풀어주겠다는 반군의 요구에 미군은 ‘불의와의 타협은 없다’라는 입장만 고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안타깝지만 포로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다는 뜻이었다.

‘군인들이랑 대화를 가장 오래 나누던데. 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겠구나.’

손에 물만 묻히고 나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그사이 대화를 마친 예준은 이제 기업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과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니 예준이 즉시 상철에게로 다가왔다.

“스티븐 씨가 무슨 통화를 하시던가요?”

예준은 스티븐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상철은 스티븐과의 대화를 남김없이 다 전달해주었고,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는 포로 이야기를 듣고 표정이 심각해졌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했다.

예준은 콜린이라는 사람에게 의뢰받은 일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예준에 의하면 콜린이 무언가 숨기는 듯하기는 했지만, 일단 용건은 참전 퇴역군인들을 위한 미술 작품을 의뢰였다고 했다.

“포로는 나 몰라라 하면서 전쟁 피해를 위로하는 박물관은 열겠다니. 거 참……”

“어쩔 수 없었겠죠. 그분들이 한두 푼 요구하는 것도 아닌데.”

상철은 그 의뢰를 받을 것이냐고 물었다.

예준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그저 구색 맞추기이겠지만, 저는 화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죠.”

“박물관에서 반전 작품전이 진행되는 동안 아프간 반군들은 미군 포로 목을 자르고 있을 텐데도요?”

그런 반전 작품전이라면 세간의 비웃음이나 살 게 분명했다.

“비웃음을 사진 않을 거예요. 전쟁 피해자 위로뿐만 아니라 포로들도 안전할 수 있게 할 계획이거든요.”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제 작품으로 포로가 풀려나올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예준이 말했다.

“그럼 해야죠. 포로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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