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230화 (230/241)

230화. 사조의 끝 (2)

시상식장엔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했다.

기자들은 물론이고, 예준이 초청한 지인들은 빠짐없이 <사조의 물결> 시상식장에 참석했다.

새로운 시상식을 만들겠다는 윤예준의 기자회견 이후로 몇 달간 세간의 많은 주목을 받아온 ‘예준스트림’이었다.

스털링부터 시작해 안도 다지오, 거기다 스펙터클라크까지.

<사조의 물결> 건축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현존 최고 수준의 건축 디자인을 선보이는 데에 성공했다.

시상식에 앞서 진행된 <사조의 물결> 완공식 날 수백 명의 건축가들이 모여 건물에 대해 각자의 찬사를 늘어놓을 정도였다.

굉장히 걸출한 예술가와 기업들이 건물 디자인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는데, 현장에서 가장 큰 관심을 모은 건 바로 라일리의 푸캉 운석 조각 작품이었다.

불가능한 조각 작품이 탄생했다는 호평이 오갔다.

푸캉 운석이 그 안에 품고 있는 감람석은 철과 니켈 사이에 무작위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도 의도한 대로 조각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라일리는 해낸 것이었다.

기술적인 측면은 차치하더라도, 그 안에 새겨놓은 노인과 예준의 모습은 방문자들에게 조금 뜬금없게 느껴졌다.

그 노인이 마네라는 사실은 본인인 예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야윈 노인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돌과 빛으로 이루어낸 그 묘사는 굉장히 훌륭했지만 왜 하필 노인을 함께 그린 것인지는 직관적으로 알기 어려웠다.

시상식 진행 전 관객들을 맞은 라일리는 왜 노인을 그렸냐는 질문에 대해 ‘그냥 예준의 작품을 보니 노인 생각이 났어용.’이라고 설명했다.

더 자세한 질문에 대해서는 그저 자신의 표현이 그랬을 뿐, 거기 더할 주석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노인은 왜소하게 예준은 건강하게 표현했다는 점에 예준의 승승장구를 표현하려 했다는 추측만 해볼 뿐이었다.

시상식을 축하하기 위해 라일리를 포함한 수많은 아트밸리 조각가, 화가들이 작품을 보내왔다.

관객들은 그들의 작품을 관람하며 윤예준의 공로를 치하하다 시간 맞춰 시상식장에 모였다.

시상식의 정식 명칭은 ‘YJStream’이었지만, 언론에는 ‘Orient of Liberty’라는 별칭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지지하기 위해 만든 시상식이라는 예준의 회견 내용에서 착안된 이름이었다.

미리 통보받은 시상식 후보들이 객석 전면에 앉아 있었다.

중앙으로 길게 난 복도 위 레드카펫을 밟으며, 연회복 차림의 예준이 등장했다.

박수 소리는 예준이 무대 위 마이크 앞에 다가선 뒤에야 멎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예준은 자신이 오랫동안 시상식을 만들지 않아 온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시상식도 완전할 순 없고, 오히려 수상자보다 탈락자를 더 많이 만드는 게 시상식의 역설이라고 했다.

생각만큼 시상식에 활발히 참여하지 않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양성 그 자체를 재료로 활용하는 화가들이 있다면, 시상식도 바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모니즘 화가들에겐 어떤 소외도 없었다.

오히려 소외된 것들이 하모니즘의 가장 좋은 재료가 되었다.

하모니즘은 화가들을 세계 곳곳으로 흩어놓았고, 또 그로써 결집시켰다.

드디어 화가들은 화풍에 대한 정의 없이 그야말로 ‘모든 걸’ 그리게 되었다.

관람객들은 그런 화가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하모니를 감상하면 되는 것이었다.

예준의 연설이 끝난 뒤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후보로 거론된 화가들 중엔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들도 있었고, 아트밸리의 숨은 강자로 알음알음 이름을 알려온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상을 탄 건 아트밸리에 들어온 지 몇 달 안 된 화가였다.

수상자는 아프리카 전통예술부터 시작해 일찍이 유럽으로 넘어가 여러 사조의 화풍을 뗐고, 지금은 미국에서 아프리카 미술의 현대화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11살 흑인 화가였다.

그 행적과 완성된 작풍이 예준과 닮아 있다는 이유로 ‘리틀예준’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훌륭한 화가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그가 상을 타게 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윤예준의 상이니 그럴 만하다고 수긍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하모니즘 사조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동안 리틀예준은 흑인 화가라는 이유로 이른 인정을 받기 어려웠다.

흑인이 좋은 상을 타려면 적어도 중견은 되어야 한다는 차별의식 때문이었다.

아고라에서 처음 그를 수상 후보로 거론했을 때 많은 외부 화가들의 반대에 직면했지만, 결국 끈질긴 토론 끝에 수상의 영예를 안겨줄 수 있었다.

식장 뒤편으로 리틀예준의 수상작이 표시되었다.

리틀예준의 수상소감은 굉장히 짧았지만 박수는 몇 분간 끊이지 않았다.

***

나는 시상식이 끝난 뒤 샴페인 잔을 들고 연회장 곳곳을 돌았다.

기자들을 다 물리치고 나니 그다음에 카메라를 들이미는 건 신진화가들이었다.

많은 관심을 받아온 시상식이었기 때문에 너튜브로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시청자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나서야 지인들을 맞으러 갈 수 있었다.

처음은 미디어아트센터의 거장들이었다.

“리틀예준 너무 부럽다. 나도 예준상 받고 싶은데.”

이미 배우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3대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은 다 받아본 샬롯이 말했다.

“하하하. 욕심도 많으셔라. 배우 부문도 만들어달라고 하시게요?”

“있으면 좋죠?”

무함마드의 농담에 샬롯은 안 될 것도 없다는 듯 가볍게 응수했다.

가벼운 대화였지만, 나는 샬롯의 생각이 굉장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다.

‘표현활동’이라는 예술의 불분명한 정의가 가장 적합한 정의가 되어버린 현대였다.

회화, 조각, 하물며 영화까지.

예술 장르들을 엄밀히 구분해놓을 필요가 사라진 것이었다.

예술이라고 할 만한 모든 것들을 살펴 수상하는 것도 고려를 해봐야 할 듯했다.

다음은 아트밸리 본사 직원들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게리와 테레즈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고 계세요?”

“아, 화가님 오셨군요.”

게리와 테레즈는 내 잔에 샴페인을 따라준 뒤 <사조의 물결> 완공을 축하하며 건배를 권했다.

잔을 비운 뒤 게리가 말했다.

“전에 뉴스로 봤지만, 우주선 내 미술치료가 가능한 종이를 개발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거기에 더해 에플사가 위성 영향권 바깥에 있는 우주선에서도 YJ에디션을 활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복제해 별도 네트워크를 제공했다고 합니다. 지구와의 통화는 불가능하겠지만 YJ에디션의 모든 기능을 활용할 수 있게 된 거죠.”

우주선 자체가 하나의 위성이 되어서 비행사들의 교신을 돕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에 따라 비행사들을 위한 어플리케이션 개발도 예정되었다고.

직접 붓과 물감을 만지는 미술치료와 더불어서 비행사 멘탈 관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했다.

원한다면 지구환경과 똑같은, 감쪽같은 가상현실을 열람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더 반가운 소식은 따로 있었다.

“오래전에 은퇴한 베테랑 비행사 ‘닐 아르투아’ 씨가 우주선으로 복귀한다는 소식도 있더군요.”

나는 게리가 보여준 뉴스 기사를 함께 확인해보았다.

게시된 지 한 시간도 안 된 기사였다.

오랫동안 비 맞게 내버려둔 자신의 꿈을 이젠 다시 이뤄야 할 때라는 아르투아의 인터뷰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의 복귀 결정으로 인해 닐 아르투아는 최고령, 최고 스펙, 최다 경험자라는 비행사 기록을 모두 갈아치웠다고 했다.

게리와 아르투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테레즈는 조용히 기사 내용만 읽고 있었다.

자신만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를 힐끗대던 게리가 마지못해 말했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아, 테레즈. 그냥 마음 내킬 때 도전해보면 되는 거야. 아직 죽으려면 멀었잖나?”

특별한 계기 없이 접게 되었다는 테레즈의 화가 꿈에 대한 이야기였다.

게리의 말을 잠자코 듣던 테레즈는 드물게도 미소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30년도 전의 일인데, 아직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군요. 미련이라는 게 그런가 봅니다. 미련은 기억보다도 오래가죠. 제가 당시에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그리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커진 걸 보면 말이에요.”

그게 화가 꿈에 대한 대화의 전부였다.

게리도 굳이 테레즈에게 헛물을 켜고 싶은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도 그랬다.

게리의 말대로 꿈은 마음 내킬 때 도전해보면 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테레즈가 다시 붓을 잡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흐려지지만, 미련은 몸집을 불려나가는 법이니까 말이다.

원과 도연을 비롯한 신진화가들의 테이블에 다가서려는 때였다.

연회장 구석에 홀로 서서 누군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살마 공주가 눈에 들어왔다.

모로코에 방문했을 땐 궁중 복장의 살마만 봐왔는데 지금은 정장 차림이었다.

제법 현대식으로 차려입고 머리도 간단히 묶어 올리니 평범한 미국인으로 보였다.

나는 살마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보고 있던 남자는 미국 정계 인사들이 모여 앉아 있는 테이블에 있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던 살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빛이 환해졌다.

그녀와의 대화 이후 인사해야 할 곳이 분명해졌다.

나는 정계 테이블 쪽을 의식하며 살마의 안부를 물었다.

살마는 왕위 계승이 확실시된 상황이라 언제 즉위식을 하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마지막 휴일을 즐길 겸, 시상식 구경도 할 겸 미국에 들어왔다고.

“그나저나 섭섭하더라고.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초청장도 안 보내주고. 왜 나만 따돌려요?”

“아뇨, 따돌린다뇨. 그럴 리가요.”

모로코에서 그녀의 입지가 더더욱 성장했다는 소식은 나도 접한 상태였다.

살마는 내가 다녀간 이후 향토예술인들을 위한 사업을 만들어 진행했는데, 그게 국내외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로 인해 왕실 내 살마의 입김이 더 강해진 것이었다.

입김이 세지면 역할도 많아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무함마드 감독님은 왕좌를 아예 거절하셨고, 제 주변에 왕이 되느니 마느니 하는 사람은 살마 공주님밖에 없어요. 괜히 초청장 보내면 거절하느라 곤란해하실 것 같아서 안 보낸 거죠.”

“그 핑계로 바깥 구경도 좀 하고 그러는 거예요. 사람 참 답답하긴.”

살마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초청장을 안 보냈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초청장이 없으면 시상식은 둘째 치더라도 연회장까지 들어오기는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그 또한 배려 차원에서 불문에 부쳐두기로 했다.

살마와 간단한 잡담을 나눴다.

그동안 주변에서 시선이 느껴져 돌아봤는데, 예의 그 정계 테이블에 앉은 인사들과 기업인 테이블에 앉은 스티븐이 유독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엔 아직 인사를 하러 가지 않아 보내는 기다림의 눈빛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도 눈빛이 굉장히 은밀했다.

마치 감시를 당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다가서기 전 살마도 비슷한 눈빛으로 정계 테이블을 살피고 있었다.

“오늘 시상식을 보러 오신 게 아니군요?”

내가 묻자 살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겸사겸사지. 시상식 축하도 해주고, 나도 휴일 좀 보내고 말이에요.”

“아뇨. 그것 말고도 목적이 있으신 것 같은데.”

확실히 다른 목적이 있기는 한 듯 살마의 눈빛이 바뀌었다.

살마는 조금 고민하더니 말했다.

“내가 예준 씨를 아주 존경하는데. 알고 있어요?”

“네. 영광스럽게 생각해요.”

“저는 예준 씨가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아,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 이만 가보세요. 여기저기서 뜨거운 눈빛들을 보내주고 계신데.”

살마는 정계 테이블 쪽을 가리키며 웃었다.

살마의 의미심장한 대답으로부터 몇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시상식장에서 내가 모르는 일이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답이 바로 살마가 가리킨 정계 테이블에 있을 거라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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