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사조의 끝
우주미술치료를 위한 한지가 개발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달되어 왔다.
파피루스부터 폴리머까지.
재료 첨가가 원활한 한지의 특성 덕분에 개발이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했다.
실제로 확인해본 폴리머 한지는 생각보다 상당히 두꺼웠다.
니콜라스가 제기했던 문제점은 물감이 종이 표면으로 넓게 번질 경우였는데, 컬럼비아 대학교의 연구를 통해 한지 압착 직전에 전기를 흘려보내 망상구조의 폴리머 분자를 수직 정렬시키는 데에 성공했다고 했다.
물감이 수직으로 번져 들어가게끔 말이다.
물감을 두껍게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어 여러 겹을 겹쳐 만들어야 했다고 했다.
A.SA와 한지연, 컬럼비아 대학교가 3자 계약을 체결하는 동안 아트밸리에서는 새로운 예술상 고안을 마쳤다.
명칭은 ‘YJStream’이었다.
나는 예준스트림의 새로운 심사제도를 공표하기 위해 아고라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각계 기자들과 나와 연을 쌓았던 거장 화가들, 몽마르뜨의 거리화가들과 영구 YJ레딩의 수료생들, 그리고 윤예종 관계자들까지.
현생에서 관계를 맺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고라 광장을 가득 채웠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저와 아트밸리의 예술가들은 기존 아카데미의 수상자 선정 방식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이번 예준스트림를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예준스트림은 세계 예술계에 큰 파급력을 가지게 되리라고 예상되기 때문에, 우선 수상 모토와 방식을 공유드린 후 반대의견 여쭙겠습니다.”
나는 예준스트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심사위원은 아트밸리 예술가들이 뽑은 저명 인사들로 구성되겠지만 한 사람당 최대 2년만 심사위원직을 맡을 수 있었다.
매년 위원진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매년 같은 심사위원이 수상자를 결정하다 보면 크고 작은 이권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심사위원을 모실 땐 분야별로 따로 뽑지만 엄밀한 분야 구분은 정해놓지 않을 겁니다. 어떤 예술이 가치 있는가는 시대적 의제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심사위원으로 뽑힐 수 있고, 또 누구나 심사위원을 뽑을 수 있었다.
아트밸리 예술가라면 누구나 말이다.
“그리고 수상 기준은 총 셋, YYJ이니셜을 따서 구분해두었습니다.”
Yawed(빗나간), Yielding(생산적인), Juveniles(새로운)는 각각 전복적인 작품, 사회적 효용이 높은 작품, 그리고 참신한 작품을 선별하는 기준들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작품을 출품받고 면밀한 심사를 거쳐 기준에 부합하는 작품을 선별할 계획이었다.
“Traditional(전통적인)이라는 기준은 없습니다. 훌륭한 작품을 수상하기 위해 이와 같은 기준을 마련했지만, 본 예준스트림이 비수상자에 대한 부조리한 잣대가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세부적인 설명과 첫 시상식 일정을 마치고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최근에 윤예종 출신을 대거 떨어뜨렸던 토니상과 세 가지 기준으로 수상자를 선별하는 아치볼드 상을 언급하는 등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그들 중 누구도 예준스트림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물론,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이미 미술 쪽 시상식은 더 이상의 수요가 없을 만큼 충분한 상태인데 굳이 하나를 더 만들 필요가……”
손을 들고 질문을 하려던 한 남성은 뒤늦게 사람들의 눈살을 못 이기고 자리에 앉았다.
***
기자회견 결과 새로운 시상식에 대한 예술가들의 반응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회화 미술 관련해서는 시상식에 별로 참가해본 적이 없는 나였기 때문에 더더욱 흥미가 동한 것 같았다.
황금 사자상과 아치볼드를 제외하면…… 서울시민미술대회가 유일했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시상식이 진행될 <사조의 물결>도 이젠 완성 단계였다.
시설을 제외하고 시상식의 꽃이 될 만한 건 수상자와 시상자가 주고받을 트로피 정도일 것이었다.
나는 여러 저명한 시상식의 트로피들을 찾아보며 디자인 특성을 분석해보았다.
하나같이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물결을 불러일으킬 예준스트림의 트로피라면 전형적이어서는 안 되었다.
‘어떤 전형성을 무너뜨리는 게 좋을까……’
나는 YJ에디션을 꺼내 새로운 트로피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트로피라면 전통적으로 컵 모양이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법이 있다면 환영이었다.
어기면 되니까 말이다.
나는 접시 형태의 예준스트림 트로피를 진열대에 세워놓을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는 접시가 아니라 팔레트 모양이었다.
그렇게 기존의 우승컵 느낌을 완전히 지운 세련된 트로피가 완성되었다.
넓적하게 디자인했기 때문에 팔레트 각 색에 해당되는 부분마다 예준스트림 기획에 도움을 줬던 인물들의 이름을 새겨놓을 수 있었다.
특별히 팔레트 손잡이 부분에 준블루를 칠했다.
남은 건 나머지 부분인데, 잘 어울리는 색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금색일 것이었다.
‘......컵 모양은 전통적이고, 금 소재는 전통적이지 않은가?’
나는 금으로 제작된 예준스트림 트로피를 떠올려보았다.
전통적이고 일반적이었다.
‘금은 안 돼. 전형성을 무너뜨리기로 했으면 완전히 무너뜨려야지.’
트로피에 사용되지 않을 만한 소재로 만드는 게 좋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금은 아니지만 트로피의 희소성을 보여줄 수 있을 만큼은 귀해야 했다.
‘그래.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사용하면 되지.’
나는 닐 아르투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운석을 사고 싶다고요?
나는 아르투아에게 혹시 우주에서 수집된 운석이 있느냐고 물었다.
-있기는 한데…… 어떤 미술 재료로 사용하시게요? 보통 모양이 예쁘지 않은 게 대부분이라서요.
“그래요?”
모양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예술에 사용하리라고 예상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최근에 예준스트림 기자회견을 마친 참이니 트로피 재료로 사용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까지 짐작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모양이 예쁘지 않아도 공예를 하면 되니까 상관없어요. 녹일 수 있는 거면 더 좋고요. 혹시 없을까요?”
아르투아는 얼마간 고민해보더니 말했다.
-얼마 전 노르웨이 북서부 지역에 거대한 유성우가 떨어졌습니다. 1톤이 조금 넘는 수준의 크기인데, 최근에 외계 바이러스가 묻어있지는 않은지 표면 분석을 마친 상태입니다.
운석은 처음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 ‘푸캉 석철운석(Fukang meteorite)’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했다.
석철 운석은 감람석 결정이 니켈과 철 사이에 넓게 퍼져 있어 태양에 비추면 휘황찬란하게 빛을 냈다.
평상시에는 어두웠다가 빛을 받으면 밝게 빛난다는 게 신비롭게 느껴졌다.
딱 별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얼마인가요?”
-비쌉니다. 1g당 30~50달러쯤 할 텐데요. 운석이라는 게 워낙 희귀하다 보니 구하려는 사람이 많거든요.
1톤이 조금 넘는다고 했으니 1000kg이라는 뜻이었다.
그중 500kg만 사도 한국 돈으로 243억 원이었다.
비싼 값이었지만, 더 값비싼 사람들에게 줄 상이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500kg 살게요.”
-네? 500kg이요? 굉장히 비쌀 텐데요. 대체 어디에 쓰시려고.
아르투아는 절반을 다 사겠다는 나의 말에 크게 놀랐다.
“괜찮아요. 어차피 우주미술치료 지원하려면 돈이 필요하실 텐데.”
-그렇게 큰돈을 금방금방 쓸 수 있으시다니. 아마 세상에 몇 없을 겁니다. 게다가 저희 재정 걱정까지 해주시니……
며칠 뒤 푸캉 운석이 아트밸리에 도착했다.
트로피용으로 사용할 운석 100kg을 아트밸리로, 그리고 동상 조각용으로 사용할 운석 400kg을 뉴햄프셔 <사조의 물결> 공사 현장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아트밸리로 보내진 운석을 실제로 달아봤을 땐 무게가 150kg에 달했다.
특히 <사조의 물결> 로비에 조각을 세우는 건 샐리의 아이디어였는데, 유명한 조각가가 조각 작품을 선물하겠다고 했다.
아트밸리 조각가들에게 트로피 도안을 전달한 뒤 <사조의 물결> 동상을 보기 위해 뉴햄프셔로 향했다.
<사조의 물결>은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강 건너에서 내다본 <사조의 물결>은 푸른 터키석으로 되어 있어 마치 미술관 형상을 한 강처럼 보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잘 지어진 시상식장 안으로 작업자들이 오가며 내벽을 붙이고 있었다.
로비 한가운데엔 400kg짜리 거대한 운석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앞에 샐리와 이름 모를 근육질의 여성이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조각을 하기 좋은 몸인 것으로 보아 그 유명하다는 조각가인 듯했다.
“아, 오셨군요. 소개 드릴게요. 이쪽은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조각가 ‘라일리’ 씨입니다.”
라일리는 바지춤에 걸린 수건에 손을 문질러 닦고는 내게 악수를 권했다.
“윤예준입니다. 동상을 선물해주신다고요?”
내가 묻자 라일리는 발랄하게 대답했다.
“넹!”
다부진 몸과 어울리지 않는 코 먹은 말투와 톤이었다.
당황할 새도 없이 라일리는 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물로 드려야 전시시켜주지 않겠어용? 들어보니 이 로비 자리가 완전 명당인 거 같던뎅.”
시상식에 참여하는 예술가며 기자, 방청객들 모두 정면으로 확인하고 갈 테니 명당은 명당이었다.
“라일리 씨가 윤 화가님의 엄청난 팬이시더라구요. 윤 화가님의 매력을 잘 담아낼 수 있는 도안이 있다고 하셨죠.”
“......무엇을 숨기랴. 샐리 씨 말이 맞아용. 팬이죵 후후.”
조각을 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팬이라니.
실력이 궁금한 한편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아트밸리에서 활동 안 하셨나요? 솜니움에 작품 몇 개 정도는 전시하셨을 것 같은데요.”
“하기는 엄청 했어용. 욕심이 많을 뿐.”
듣던 샐리가 끼어들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라는 건 과장이 아니었어요. 이 몸을 보세요. 완전히 조각으로 다져진 근육들을 말이에요. 완전 조각 같지 않나요?”
라일리의 양팔에는 근육들이 마구 뒤엉켜 있었다.
정말로 매일 조각만 하며 산 사람 같았다.
조각가의 조각 같은 몸이라니, 굉장히 멋진 요소였다.
샐리의 칭찬에 제 팔을 들여다보던 라일리가 멋쩍어하며 말했다.
“조각 같긴용. 이건 그냥…… 제게 붓 같은 거죵. 이거 없으면 조각 못해용.”
나는 라일리의 옆에 놓인 공구통을 무심코 들어 올려 보았는데, 양손으로 들어도 힘이 부족할 정도로 무거웠다.
조금씩 자리를 옮기며 들어 올리는 모습을 봤을 땐 이 정도로 무거울 줄 몰랐던 것이었다.
공구통이어 봤자 조각용 정 몇 개와 망치 정도 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칼부터 시작해 송곳, 밧줄, 톱, 망치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공구가 거기 다 있었다.
“여기서 작업하시는 거예요?”
“넹. 아직 공사 후 마무리 청소가 안 돼 있는 상태라서, 얼른 기회 보고 슥삭 들여놨죵. 이 공간에 어우러진 조각이 중요하거든용.”
라일리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정과 망치를 한 손씩 들고 운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와웅…… 볼수록 신기한 광석인데용? 이런 걸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이름이 뭐죵?”
“푸캉 운석이라고 부르는데요……”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부연을 하려던 때 라일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냐링……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알겠네용……”
“네? 그럴 리가 없는데. 왜인 거 같으신데요?”
“뭐, 떨어질 때 푸캉- 하는 소리가 났으니까 그랬겠죵?”
라일리는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슬슬 작업을 시작했다.
세계적인 예술가라고 해서 항상 똑똑하지만은 않은 듯했다.
라일리는 한쪽에서 전기톱을 끌어와 푸캉 원석 표면을 과감하게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금 가공이 끝난 철이 투명한 호박석을 품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속에 들어있는 노한 광물을 빛을 받아 굉장히 밝게 반짝였는데, 그 모습만 보아도 비싼 값이 이해가 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라일리 씨의 조각은 거의 마법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지금 보게 되겠네요.”
샐리가 사방으로 튀는 푸캉 원석을 피해 물러서며 속삭였다.
라일리의 표면 조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신 현무암처럼 구멍이 송송 뚫린 철 안으로 가느다란 정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노란 감람석을 정성스럽게 깎아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무엇을 시도하려고 하는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표면의 철과 니켈을 그대로 둔 채 안에 든 감람석만 조각해 모양을 내려는 것이었다.
가능이야 하겠지만 단 며칠 만에 끝낼 수 있는 강도의 작업이 아니었다.
“왜 세계 최고의 조각가라고 하는지 알겠네요.”
라일리의 손에 들린 조각용 정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지만 라일리의 팔에 붙은 근육은 두꺼운 나무라도 패는 듯 크게 꿈틀거렸다.
작업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조각이 완성되었다.
“휴 끝났당. 마음에 드시길.”
라일리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작품에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나와 샐리는 반대로 조각 앞에 다가섰는데, 그 작품을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작품은 굉장히 훌륭했지만 나를 놀라게 한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이게 뭐죠……?”
푸캉 운석 안에 그녀가 조각한 건 늙은 마네와 젊은 나, 윤예준이 등지고 선 모습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