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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제일 쉬움-228화 (228/241)

228화. 우주의 비밀 (3)

아르투아가 소개시켜 준 사람은 세계 최초로 우주 미술치료를 꾸준히 시도한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의 ‘니콜라스’ 교수였다.

일찍이 비행사들을 괴롭히는 트라우마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우주에서의 미술치료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여러 물감 개발에 매진해왔다.

그중 하나는 ‘반중력 물감’으로, 물감이 우주선 내를 부유할 수 없도록 접착력을 키워 안전한 작업을 보장해주기 위한 발명품이었다.

나는 바로 뉴욕으로 향해 니콜라스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컬럼비아 대학교를 향하기 위해 뉴욕 타임스퀘어를 우선 지나치는데, 이전에 들렀던 때와 느낌이 영 딴판이었다.

YJ에디션을 착용하고 보면 곳곳이 예술작품들로 뒤덮여 있었고,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엔 로드아일랜드 아트밸리를 뜻하는 약자 ‘RIAV’가 광고되고 있었다.

나의 전기 <우회> 출판을 계기로 아트밸리 예술가들이 만든 광고였다.

<발레리타 크로마키>를 포함한 나의 거의 모든 작품들이 영상화되어 타임스퀘어 전광판을 빛냈다.

그렇게 컬럼비아 대학교에 도착해 니콜라스를 만났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술치료에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 방문하겠다는 메일을 보내놓은 상태였다.

정장 바지에 체크 무늬 남방을 넣어 입은 니콜라스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정리되지 않은 턱수염이 그의 일상을 알려주고 있었다.

반복된 연구에 굉장히 고단한 안색이었다.

물론 지금은 반중력 물감 개발을 진행하고 있지 않다고 했지만.

“전에 개발하신 반중력 물감은 왜 실패한 건가요?”

그의 연구실에 마주 앉은 채 내가 묻자 니콜라스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개발은 성공했습니다. 단지 반중력 물감이 적절한 대안이 아니었을 뿐이죠.”

“네? 적절한 대안이 아니었다뇨?”

반중력 물감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우주미술치료의 시도는 물의 응집력을 과신한 데서 한계에 부딪혀야만 했다.

일반적인 수채 물감이라도 잘만 통제하면 그림을 그리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바로 그 점에서 니콜라스는 반중력 물감이 좋은 대안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접착력이 있는 물감이라면 응집력이 더 강할 것이고, 또 캔버스에서 쉽게 떨어지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다.

“볼펜처럼 붓 안쪽에 물감 관을 넣어놓고 조금씩 물감을 밀어주는 형태의 붓을 개발했습니다. 반중력 물감을 활용하기 위해서요. 물감이 붓털을 지속적으로 젖게 하는 거죠. 그걸로 그림을 그리면 제법 그려집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응집력이 너무 커서 선이 ……지루해지지요.”

물을 제대로 섞지 않은 물감을 사용해 그리는 것 같다고 했다.

게다가 작업을 30분 정도 지속하면 물감에 젖은 붓털이 말라 완전히 딱딱해지고, 또 바스라진 가루는 물보다도 더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한다고 덧붙였다.

그가 물감의 응집력을 높인 것도, 물감 관을 붓 안에 숨겨놓은 것도 그리는 과정에서 물감이 흩어져버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보통 그림에 서툰 사람이 물을 많이 묻혀 그림을 그리면 물감이 캔버스를 타고 흘러내리게 되는데, 무중력 상태에서는 물의 응집력에 의해 약하게나마 그 자리에 그대로 맺혀 있게 되었다.

하지만 붓으로 잘못 건드리면 팔방으로 흩어져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문제는 잔여 물감이었다.

“물감이 아니라 종이를 바꿔보는 건요?”

나의 말에 니콜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방향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는 한데…… 그러니까 붓을 대는 즉시 잔여 물감이 남지 않도록 흡수가 빠른 종이를 써보자는 건가요?”

“네. 한지의 경우 보통 쓰는 캔버스나 캔버스용 종이보다 물감 흡수가 굉장히 빠르거든요.”

니콜라스는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겠다며 끄덕였다.

“흡수가 너무 빨라도 문제이지 않습니까? 흡수력 100%의 종이를 전제해본다면 물감을 대는 순간 종이 전체가 물들게 됩니다.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요. 화가님께서 잘 아시겠지만 말이에요.”

니콜라스의 말이 맞았다.

너무 흡수가 빠르면 원형으로 물감이 번져 표현의 제약이 너무 커졌다.

하지만 우주미술치료의 해법은 물감이 아니라 종이에 있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니콜라스에게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한 뒤 연구실을 나와 한지연의 김화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사님. 한지 연구는 잘 되어가고 계신가요?”

-예. 더디지만 성과는 확실히 나고 있습니다.

절묘하게도 그는 한지를 활용한 친환경 기저귀와 생리대를 개발해 생산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기저귀요? 한지의 흡수력이 그렇게 좋던가요?”

-흡수력이 좋기는 하지만 흡수력 덕분이라기보다는…… 빳빳한 데에 비해 잘 젖는다는 장점을 활용한 거지요.

김화가에 의하면 기존의 기저귀는 그 안에 내장된 고분자흡수체(폴리머)가 섬유 바깥으로 조금씩 새어 나와 유해성 논란이 지속되어 왔다고 했다.

하지만 한지는 기저귀에 사용되는 섬유보다 입자가 치밀해 유실이 없고 값도 싸서 시장에서의 경쟁력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젖은 상태에서 찢어지면 새어 나오는 건 똑같잖아요.”

-아, 봉투 형식으로 해놓은 한지 안에 폴리머를 담아놓는 게 아닙니다. 제지 과정에서 폴리머를 뒤섞어놓는 거죠.

한지를 떠내는 동안 물을 흡수한 폴리머는 크게 부풀지만, 압착기로 물을 짜내고 건조시키고 나면 다시 원상태로 복구가 된다고 했다.

그걸 활용하는 것이라고.

‘고분자흡수체가 결합된 한지라……’

나는 김화가에게 우주에서의 미술치료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캔버스에 충분히 스며들지 않은 물감이 우주선에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문제점까지도 말이다.

“여태까지는 물감을 어떻게 발전시켜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고민해왔거든요?”

“네.”

“그런데 만약 문제가 물감이 아닌 캔버스에 있었다면?”

거기까지 말했을 때 김화가는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얼마 후, 웃기 시작했다.

-아. ……하하하하하!

나의 생각이 제대로 전달된 듯했다.

***

흡수가 빠르고 내구성도 좋은 캔버스라면 색다른 방향으로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한지연과 콜롬비아 대학 미술치료 연구소를 연결해준 뒤 휴대폰을 놓으려는데 상철에게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네, 무슨 일이세요?”

-지금 기사 작성하고 있는 게 있는데, 기사 내기 전에 미리 화가님과 이야기 좀 나눠봐야 할 것 같아서요.

상철이 기사를 내기 전에 내게 의견을 물었던 적은 그동안 한 번도 없었다.

내가 특별히 기사를 부탁한 적은 많았지만 말이다.

아마 기사를 검토해달란 용건은 아닐 것이었다.

-지금 토니상 최종 후보 선정이 끝났는데, 윤예종 졸업생들이 모두 탈락했습니다.

토니상은 미국 공연예술의 성지인 브로드웨이에서 열리는 시상식이었다.

특히 윤예종 졸업생들이 미술감독으로 자주 진출하는 곳이기도 했는데, 최근에 졸업생 상당수가 토니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던 차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니까 최종 후보로 선정이 되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정확합니다.

졸업생들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기에 최후의 날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도 그들의 작품은 미디어 자료로 받아서 확인해보았다.

어느 것 하나 수상감이 아닌 게 없었다.

물론 그들 작품이 훌륭했다고 해서 다른 미술감독들의 작품이 별 볼 일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결국은 많은 작품들 중 한 작품이 상을 타게 되고, 졸업생들보다 훌륭한 작품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종 후보에도 들지 못했다는 건 납득할 수 없었다.

여태까지 그렇게 수준 높은 미술상을 겪어본 적이 있던가?

“별일이 다 있네요. 미리 선물도 준비해뒀는데.”

-저도입니다. 기사도 다 미리 써놨죠.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다 탈락해버린걸.

입을 다시던 상철이 본격적으로 조용히 덧붙였다.

-하지만 꼭 졸업생들의 작품이 작품성에서 밀렸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예감이 듭니다. 구린내가 풀풀 나요.

내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토니상은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들의 투표로 결정되는 상이었다.

졸업생들의 탈락이 정해지자마자 이상함을 감지한 상철이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를 조사해보았는데, 9500명에 달하는 회원들 중 한국인 회원은 고작 40명 남짓이었다고 했다.

범위를 유색인종 전체로 넓혀보아도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제 생각이 맞다면, 솔직히 토니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것만 해도 감지덕지 아니겠습니까?

상철은 내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듯했다.

아마 토니상을 집중 취재해 달라는 부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 터였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미국판 아치볼드 사태가 터질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이제 와서 심사위원의 차별은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다들 역사와 전통이 있을 테니 차별의 역사도 계속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그렇다고 모든 시상식을 찾아다니며 아치볼드에서처럼 뒤집어엎을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화가들에게 상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데. 설마 그런 걸로 장난을 치겠어요.”

-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그리고 조사하는 것도 시간 낭비예요. 그러니까 취재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해보죠.”

만약 후보 차별을 하는 시상식이 있다면 알아서 사라지게 만드는 게 가장 좋았다.

일일이 조사하지 않아도 일괄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내게는 어렵지 않은 방법이 하나 있었다.

***

나는 상철과의 통화를 마치자마자 아트밸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현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화가님. 진현재입니다.

“소장님. 지금 뉴햄프셔 <사조의 물결> 공사는 어느 정도 되어가시나요?”

현재는 현장에 있는 듯 조금 소란스러운 와중에 진행 상황을 전달해주었다.

-전체적인 진행도로 치면 70% 정도 돼 있습니다. 하지만 건물은 다 지어 올린 상태죠. 이제 <사조의 물결>의 꽃인 터키석을 외벽에 장식하고 내부 기타 인테리어만 거치면 끝입니다.

그 정도면 완성하고 손질만 남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공사를 잠깐 멈추고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무슨 일은 아니고요. <사조의 물결> 건물에 쓰임이 한 가지 추가될 것 같거든요. 내부에 큰 식장이 필요해요.”

나는 YJ예술상을 만들어 모든 화가들이 동의할 만한 투명한 시상 흐름을 만들어낼 생각이었다.

가장 신뢰감 있고 권위 있는 상이 투명하다면 그렇지 않은 시상식은 신뢰를 잃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YJ예술상이 진행될 건물은 지금 공사 중인 뉴햄프셔의 <사조의 물결>이 적절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현재 상태에서 개조가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완공까지 많이 지연되겠습니다.

“괜찮아요. 내년까지만 완공하면 되고, 또 아트밸리에는 그 분야 건축 전문가가 한 명 있잖아요?”

샐리 스털링은 지하 미술관을 실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이미 지어진 <사조의 물결>에 거대한 식장을 증설시켜주기에 샐리만큼 적합한 인물은 없었다.

그렇게 공사를 잠시 중단한 현재를 포함해 샐리 스털링, 미디어아트센터의 필립과 무함마드, 카산드라, 한국의 모민수와 일섭 등 각 분야 거장들을 회의실로 소집했다.

아트밸리가 세계 미술 1번가가 된 뒤로는 모두들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회의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각자 체감하는 바가 있었다.

나는 세계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예술계 최고 상을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모두들 걸출한 곳에서 상 한 번쯤은 타본 사람으로서 현재 시상식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좋은 생각인데요. 원래 선발제도는 가장 완벽한 선발제도로만 무너뜨릴 수 있는 법이니까요.”

민수가 동의하자 다른 예술가들도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예술가들은 아고라 광장으로 나와 신진예술가들과 함께 적절한 수상 방식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사조의 물결> 공사에 뒤늦게 참여한 샐리는 특이하게도 아트밸리의 조각가들을 임시 고용해 뉴햄프셔행 고속도로에 올랐다.

바로 증설 공사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상철은 관련 기사를 사보에 게재했고, 아트밸리가 새로운 시상식을 고안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세계 각국의 보도국에서 카메라를 들고 로드아일랜드를 방문했다.

[아치볼드 수상 제도 맹비난했던 윤예준, 이번엔 직접 만든다]

[윤예준의 새로운 예술상, 예술계 최고 권위상 될까]

[아트밸리의 새로운 예술상 계획에 각계 거장들 지지 선언 잇따라……]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 속에서 새로운 예술상 계획은 조금씩 체계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반가운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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