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상상은 현실이 된다 (3)
샬롯과 필립은 예준을 포함한 <바이탈> 제작진들과 함께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장에 도착했다.
이번 시상식은 할리우드의 돌비 극장(Dolby Theatre)에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돌비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 일단 가워 스트리트에서 라 브레아 애비뉴에까지 뻗어 있는 명예의 거리를 먼저 들르기로 했다.
그곳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큰 활약을 해낸 인물의 이름이 새겨진 별이 길게 새겨져 있었다.
갈색 사각형 중앙에 황동으로 된 테라조제의 분홍색 별로 된 플레이트였다.
별에는 그곳에 적혀 있는 인물이 공헌한 분야가 심볼을 통해 표현되어 있었다.
그곳에 이름이 새겨진다면 할리우드 영화를 거론하는 데에 꼭 등장할 수밖에 없는 영화인이라는 뜻이었다.
이번에 그 명예의 거리에 예준의 이름이 새겨지게 된 것이었다.
“내가 주연이었다고 해서 주인공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설마 이런 이벤트가 생기게 될 줄이야.”
“왜? 설마 윤예준 화가님을 질투하는 건 아니겠지?”
샬롯과 필립이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큰 활약을 펼친 사람만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고는 해도 꼭 그 자격이 영화인으로 한정된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화가였다.
대중적으로는 화가로 알려진 내가 그곳에 이름을 올리게 된 건 큰 이슈를 몰기는 했다.
“나만 알고 싶은 화가였는데,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모두가 알게 되니 좀 시원섭섭해서 그래요.”
“에이. 미국에 처음 알려진 게 샬롯 덕분이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이상하네.”
필립이 위로하겠답시고 끼어들자 샬롯은 어림도 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하긴. 처음에 윤예준 전시회 보러 가자고 꼬셨을 때 그렇게 요지부동이셨던 감독님에 비하면 내가 빨리 알아본 편에 들긴 하죠.”
“......옛날이야기는 이쯤 하지.”
그 말에 필립은 헛기침을 했다.
샬롯은 어느덧 중견 배우가 되어 있었다.
미모는 여전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벤 존스 감독님이 예준 화가님을 그렇게 추천했다던데. 감독님은 안 하셨어요?”
“나도 했지. 아마 그 친구보다는 내 추천 덕분에 성사된 걸 거야.”
“에이. 설마.”
아벤 존스라면 남미 세르반티노 비엔날레에서 만났던 그 <화이트 미러> 감독이었다.
차가운 표정에 굉장히 솔직한 표현이 특징적인 감독이었는데, 샬롯의 말에 의하면 나와 개인적인 연이 있는 필립보다는 그의 추천이 객관적이어 보였기 때문에 명예의 전당에 나의 별을 설치할 수 있었을 거라고 했다.
아벤 존스가 얼마나 신뢰감을 주는 인물인지를 생각하면 그럴듯했다.
필립은 존스와의 비교에 조금 불쾌해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샬롯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명예의 거리 교차로에 도착했다.
나의 별은 그 교차로의 정중앙에 놓여 있었다.
나와 필립, 샬롯이 차에서 내리자 시상식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윤예준 씨! 이번에 명예의 거리에 있는 2000명의 영화인 반열에 이름을 올리셨는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필립 감독님의 차기작에도 함께하시는 겁니까?”
“에플사 차기작 디자인에도 참여하셨다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들고 계신 물건은 뭡니까?”
저마다 자신의 질문을 하는 기자들 틈으로 내 손에 들려 있는 물건을 보며 의아해하는 기자들도 있었다.
나는 명예의 거리에 나의 별이 설치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 안료와 붓을 먼저 떠올렸다.
“아, ‘생명의 노랑’이다!”
“<생명의 해바라기>에 사용된 그?!”
뒤늦게 생명의 노랑을 알아본 기자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물론 들고 온 건 야광으로 발전시킨 것이었지만 말이다.
아벤 존스의 추천이 결정적이었다고는 해도 나의 이름을 명예의 거리에 새길 수 있었던 건 <바이탈> 덕분이었다.
<바이탈>과 더 어울리는 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붓에 안료를 묻혀 별에 생명의 노랑을 칠하기 시작했다.
야광 생명의 노랑은 나의 별을 더욱 독보적으로 눈에 띄게 할 것이었다.
또 유명인들이 이 생명의 노랑을 처음 접하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일단 알려져야 사용될 테니까 말이다.
별에 붓을 대자마자 기자들이 모여들어 사진을 찍었다.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는 덤이었다.
“역시. 나도 한 기행 하는 사람이지만 윤예준 화가님만큼은 아니라니까. 명예의 거리 별 위에 그림을 그리다니. 안 그래요, 감독님?”
“그렇긴 하지. 그래도 너무 기죽지는 말라고. 윤예준 화가님은 꾸준하지만 너는 갈수록 심해지잖아.”
필립의 질타에 샬롯은 콧방귀를 뀌며 다시 차를 향해 걸어 나갔다.
예준과 함께 다니면 이게 편했다.
보통 때엔 모두가 샬롯에게 달려들어 귀찮게 굴었지만, 예준과 함께 있으면 이렇게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시상식을 마치고 나온 밤에 예준의 별은 독보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2000여 개의 별 중에서 가장 크고 두껍게 박혀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연히 예준이 칠한 생명의 노랑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진짜 빛처럼 반짝이는 예준의 별을 보며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윤 화가님은 어디에 계시죠?”
샬롯이 묻자 필립은 자신의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LA플뤠르 화훼 단지를 둘러본다는 문자가 마지막인데.”
그럼 아직 그곳에 있을 것이었다.
“역시 한시도 가만히 계시질 않네. 이번에는 꽃으로 어떤 예술을 하려고 그러시나?”
샬롯과 필립은 못 말린다는 듯 바로 차에 올라 화훼 단지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예준이 새롭게 만들었을 작품에 대한 기대감은 가누지 못했다.
LA플뤠르 화훼 단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꽃시장이었다.
“아, 샬롯 씨, 감독님! 여기예요!”
화훼 단지엔 각자 다른 계절에 피는 꽃들이 동시에 피어 있었다.
규모가 굉장히 컸고, 저녁 늦은 시간이었지만 다채로운 꽃들은 스스로 빛이라도 내는 듯했다.
농원 앞에 마련된 체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예준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상식 생중계 봤어요. 박수 소리가 가장 크던데요?”
“하하, 그렇던가요?”
“네. 그리고 샬롯 씨는 참석한 배우들 중 가장 예뻤어요.”
그동안 수많은 찬사를 들어왔던 샬롯이었다.
대부분의 공치사에는 얼굴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던 샬롯이었지만 예준의 칭찬에는 무방비하게 함박웃음을 짓게 되었다.
“그런데 생중계만 보고 있었던 건 아닌가 보네요.”
샬롯이 묻자 예준은 자신의 앞에 놓인 화관들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곳에 화훼 예술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고 해서, 저도 한번 해보고 있었어요. 이건 두 분을 위해 만든 화관이에요.”
<생명의 해바라기>를 떠올리며 만든 것인지 해바라기를 활용한 화관이었다.
필립은 그걸 받아들며 농장 주인을 돌아보았는데, 시선을 느낀 주인이 와서 말했다.
“프로그램이라고 할 것도 없었어요. 그냥 사진만 보여주면 완전히 그대로 만들더라니까.”
“에이. 잘 알려주셔놓고.”
“심지어 이 해바라기 화관은 자료에 있지도 않았죠.”
필립이 알기에도 예준이 처음부터 못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마 배우를 시켜도 바로 영화제에 갈 수 있을 정도일 것이었다.
그 분류가 예술에 속한다면 말이다.
“오, 이거 마음에 든다!”
머리에 화관을 쓴 샬롯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말했다.
“인별에 올리게?”
“당연히 올려야죠. 마음 같아선 윤예준 화가님이 만들어줬다고 자랑하고 싶지만 그럼 사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샬롯은 제가 찍고서도 아쉽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제가 찍어줄게요. 감독님도 서세요.”
예준은 필립과 샬롯을 세워놓고 카메라로 몇 장 찍어주었다.
결과물을 확인한 샬롯은 오늘 기자들에게 찍힌 사진 백 장보다 예준의 것이 낫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굉장히 반가운 해바라기 선물이네요. 감사합니다, 화가님.”
이제 해가 떨어진 지 오래되어 야심한 시각이 되어 가고 있었다.
슬슬 돌아가야 할 때였다.
“이만 가봐야겠네요.”
“뭐, 벌써요? 시상식도 같이 못 가서 섭섭한데……”
원래 시상식에도 같이 참가할 생각이었지만, 명예의 거리 생명의 노랑 덧칠로 인해 예준에 대한 관심이 너무 높아져 버렸다.
그 상태로 시상식에 참석했다간 시상식이 소란스러워질 것 같아 예준만 잠시 몸을 피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섭섭한 건 섭섭한 것이었다.
화관을 선물해줬어도 제대로 된 축하를 못 해준 건 사실 아니던가.
“그럼 어떻게 할까요? 저는 상관없지만 두 분이 내일 일정이 있으실 수도 있어서.”
“이 근처에 유명한 나이트클럽이 있어요. 거기 가죠. 어때요?”
샬롯의 말을 들은 필립의 얼굴이 조금 구겨졌다.
“머리에 꽃을 꽂고 춤을 추겠다는 거야? 그거 완전 미친 사람 같잖아.”
“그럼요? 그 구역엔 원래 미친년들뿐이에요. OH클럽.”
샬롯이 ‘OH클럽’이라고 언급하자 필립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나이트클럽이라도 OH라면 무언가 다르다는 듯 말이다.
그곳의 무엇이 그렇게 다른지는 도착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음악 클럽은 구겐하임에서 경험해본 게 다였는데, 역시 진짜 클럽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차원이 다른 템포의 힙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친년이라는 샬롯의 표현을 그대로 빌릴 생각은 없지만, 그녀가 그렇게 말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곳엔 음악에 완전히 심취한 사람들뿐이었다.
예술의 섬 프로젝트 당시에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댄서들을 여럿 보았는데, OH클럽의 취객들이 딱 그들과 같았다.
“여긴 유명한 사람들 엄청 많이 와요! 하지만 취재는 불가능해서 기자가 없죠! 보세요!”
덩치가 큰 정장 차림의 남성이 한 기자를 상대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얼마간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기자는 자신의 카메라를 돌려받고 다시 클럽 바깥으로 나갔다.
기자가 없는 클럽이라면 샬롯 같은 인물들이 즐겨 찾을 만도 했다.
세 사람은 구석의 가장 넓은 테이블을 잡고 술을 시켜 마셨다.
과거엔 아직 미성년자였던 예준이라 술잔을 나눌 수 없었는데, 지금은 그런 제약이 없었다.
입에 칵테일을 한 잔 털어 넣던 샬롯이 말했다.
“전에 뉴스 보니까 화가님이 술은 잘 못하시는 것 같던데. 저희 주량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뉴스요? 아, 혹시 호주 와이너리에서 마셨던 거요?”
“네. 저는 백설공주 끝나고 슬럼프 겪을 때부터 유명 촬영팀 따라다니면서 마시던 내공이 있거든요. 그래서 어지간히 마셔서는 기별도 안 오는데.”
샬롯은 천천히 따라오라고 예준을 도발했다.
도발은 아니고 배려였지만, 왜인지 예준에게는 도발처럼 느껴졌다.
“주량으로 들이미는 무명 배우들이 너무 많아서 저도 꽤 센 편이 되었죠.”
듣던 필립이 목소리에 힘을 주며 거들었다.
예준은 칵테일 한 모금을 입 안에서 조금 굴려 향을 맡다가 가볍게 웃었다.
“그래요? 그럼 내기 하나 할까요?”
“내기?”
샬롯과 필립이 관심을 보였다.
“좋네요. 저 조건 생각한 거 있어요.”
그렇게 내기 내용이 정해졌다.
필립이 이기면 예준은 그의 차기작에 카메오로 출연해주기로 했다.
샬롯이 이길 경우엔 그녀의 개인 화보에 참가하고 말이다.
대신 예준이 이기면 AI FEEL U 펀딩 프로그램 홍보 영상을 두 사람이 찍어줘야 했다.
“저는 무조건 좋습니다. 이거 왠지 차기작은 기네스북에 오를 것 같네요.”
“기네스북이요? 왜요?”
“주연보다 카메오 분량이 훨씬 많은 영화로 말이에요.”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길 수밖에 없는 내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0대 초반 청년을 상대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웃던 필립은 정확히 1시간 뒤 만취한 샬롯의 옆자리에 곤히 눕게 되었다.
그들 모두가 뻗고도 주량이 넘치던 예준은 사이좋게 뻗은 샬롯과 필립의 모습을 증거로 카메라에 남겼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캔버스도 아닌, OH클럽 테이블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