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상상은 현실이 된다 (2)
스티븐은 가방에서 VR고글을 꺼내 내게 건넸다.
큰 가방을 지고 왔기에 거기서 뭐든 꺼낼 줄은 알고 있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이 VR고글을 휴대폰만큼 상용화하기 위해 매년 큰돈을 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보여드리는 이 ‘에플고글’이 가장 차세대 VR고글이죠.”
많은 기술이 집약되어 실현된 에플고글은 거의 헬멧만 한 크기였던 기존의 고글에 비하면 경량화에 크게 성공한 모양새였다.
수영선수들이 활용하는 수경 정도의 크기에 시력의 영향을 받지 않게끔 발전시켜놓은 상태라고 했다.
그걸 착용하자 VR리모컨을 동기화하라는 문구와 함께 식당 내부가 흑백으로 내다보였다.
무채색의 스티븐이 반짝거리는 VR리모컨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VR에 적용할 수 있는 틸트 브러쉬 어플리케이션이 이미 오래전에 개발된 상태인데, 어디 활용할 곳이 없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기술입니다. 그런데 VR고글 경량화에 성공함에 따라 이 틸트 브러쉬도 적용이 가능해진 상태죠. 그런데 어떻게 적용을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스티븐은 VR리모컨을 대신 동기화해준 뒤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어플리케이션 하나를 대신 실행시켜주었다.
자수를 뜬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인지, ‘퀼트 브러쉬’라는 이름의 어플리케이션이었다.
“이 어플을 켜고 리모컨으로 이렇게 움직이면……”
스티븐이 리모컨을 움직이자 무채색의 3차원 공간을 캔버스 삼아 입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림 솜씨는 참담했지만, 그가 회화적인 질감으로 하나씩 구현해낸 꽃과 나무 등은 그야말로 혁신적이었다.
왜 그토록 VR고글을 경량화시키는 데에 큰돈을 쏟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퀼트 브러시의 화두는 그것의 대중화에 있는 듯했다.
그가 보여주는 3D 공간 미술은 굉장히 혁신적이었지만 모든 감상자가 VR고글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미술이라는 건 확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게 경량화에만 성공한 건가요? 아니면 값도 많이 낮아졌는지.”
“둘 중 무엇도 아직 성공한 상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경량화되었고, 상대적으로 싸졌죠.”
기능은 성장했지만 값은 낮췄다는 뜻이었다.
“제 목표는 이 에플고글을 콘택트렌즈 수준으로 소형화하는 겁니다. 가격도 마찬가지고요. 혹자는 이 에플사의 스티븐 홀스가 전 세계인의 몸에 악마의 칩을 심고 싶어 한다고 주장하지만, 솔직히 그 정도의 대중화를 바라고 있기는 합니다. 그 목표가 지구 정복이 아니라 기술과 예술의 혁신일 뿐.”
뭐든 그 목적이 예술의 발전이라면 언제나 환영이었다.
“잠깐, 저도 그 리모컨 좀 써볼 수 있을까요?”
“아, 예. 좀 더 작은 펜으로 드리겠습니다.”
스티븐은 일반 볼펜 크기의 드로잉 리모컨을 건넨 뒤 자신도 에플고글을 착용했다.
그렇게 회색 김치찌개 위에 입체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며 스티븐에게 설명했다.
“그림은 꼭 화가만 그리는 게 아니잖아요. 누구든 지금 저처럼 설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곤 하니까요. 기업 미팅을 하든, 아니면 에플사에서 항상 하듯이 신제품 발표회를 할 수도 있는 거고요. 이 기술은 미술 방면에서 충분히 혁신적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수요를 자극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망설이고 계신 걸 그냥 하면 될 것 같은데요. 도전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법이니까요. 저희 아트밸리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와드릴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자 스티븐은 ‘망설이고 있던 도전’에 확신을 얻은 듯 가벼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엇을 망설이고 있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바로 다음 신상품 휴대폰을 휴대폰 형태로 디자인할지, 아니면 ‘고글’ 형태로 디자인할지.
***
본사로 복귀한 스티븐은 개발팀에 예준과의 대화를 전달하고 아예 새로운 개발 부서를 조직하도록 했다.
기존 예정된 신상품은 그대로 진행하고 연구 인력을 예준이 디자인한 차세대 고글 개발에 쏟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아트밸리로 향했다.
예준은 그때까지 여러 안경 디자인을 수집하고 있었다.
스티븐을 맞은 예준은 아트밸리 내에 있는 두 개의 섬과 해저터널을 비롯해서 솜니움 미술관, 미디어 아트센터를 둘러본 뒤 VR관으로 도착했다.
“일단 고글 디자인은 아트밸리에서 개발한 AI프로그램을 통해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안경 디자인을 분석해서 대략 방향성을 설정할 수 있을 거예요. 그보다 중요한 건 주머니가 아니라 코에 걸어두는 휴대폰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느냐는 거겠죠.”
수많은 VR 장치들 사이를 걸으며 예준이 말했다.
휴대폰은 너무 커서는 안 된다는 게 스티븐의 생각이었다.
크기도 적당해야 가지고 다니기 편안한 법이었다.
“지금 실리콘밸리의 연구원들이 고글에 휴대폰의 모든 기능을 일체형으로 탑재할 수 있도록 개발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개발은 당연히 성공하겠지만, 말씀드렸듯 경량화와 대중화가 관건이죠.”
장치 하나당 수백만 원을 쓰게 한다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적어도 휴대폰 하나 값으로 구매할 수 있도록 값을 낮추고, 그 모든 기능을 현재 에플고글의 무게 수준으로 유지하는 게 포인트였다.
이에 스티븐이 생각해낸 대안은 송수신기를 통한 경량화였다.
실제로 입력과 작업을 처리하는 장치는 따로 두고 에플고글의 화면은 그 작업물을 영상화시켜 영상을 수신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수신과 출력만 유지한다면 화면은 더 무거워질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까, 휴대폰은 따로 있고 에플고글은 그 휴대폰의 디스플레이 역할만 하도록 말인가요?”
“그렇죠. 본체가 될 디바이스는 기능에 따라 더 무거워지기는 하겠지만, 뭐, 직접 고객들에게 보급할 장치도 아니니 무거워져도 상관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기능 하나를 더 추가할 수 있겠네요.”
“네. 생각하고 계신 기능이 있습니까?”
예준은 따로 드로잉 리모컨이 없는 에플고글을 개발해달라고 했다.
뭐든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유감스럽게도 불가능했다.
리모컨 없는 VR고글은 마우스패드와 키보드가 없는 노트북이나 다를 바 없었다.
김치찌개 집에서 사용했던 퀼트 브러시는 3차원 공간에 그려지는 그림인 만큼, 에플고글이 드로잉패드 역할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글이 그 드로잉 리모컨의 위치를 감지하고 거기서 보내오는 신호에 맞게 일정한 선형, 색채를 표시하는 그 과정만 해도 장치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그 반대 의견을 개진해보았지만, 예준의 생각은 완고했다.
“저희 아트밸리의 미디어아트센터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기술 공유 정도는 해드릴 수 있어요. 꼭 필요한 기능이에요.”
“그렇습니까……?”
“네. 지난번에 식당에서 보여주셨던 드로잉 리모컨은 휴대하기도, 주기적으로 충전하기도 번거로웠어요. 그렇게 큰 가방에 들고 다녀야 하는 거면 고글을 경량화하는 의미가 없잖아요?”
예준은 거기에 미술 도구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을 추가로 꼽았다.
화가마다 활용하는 미술 도구가 제각각인데, 갑자기 그리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 VR 리모컨이나 터치펜으로 그림을 그리라면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오겠느냐는 것이었다.
미술 도구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이미 있는 미술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밖엔 없었다.
“퀼트 브러쉬를 사용할 때 미술 도구를 인식시키면 그걸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세팅이 되는 거예요. 실제 붓에는 물감이 묻어 있지 않지만 가상 현실 속에서는 묻어 있는 것처럼 되도록 말이에요.”
예준의 말을 한 번 곱씹어보았다.
모든 처리를 하는 장치는 따로 있고 에플고글은 출력만.
그에 더한다면 주변 공간을 공간감 있게 인지하게 해주는 카메라 정도만 더 부착하면 되었다.
초소형 카메라는 오히려 고전적인 기술이라고 할 만큼 완성된 상태고, 문제는 장거리 송수신인데……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도 통화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하는 휴대폰 회사가 아닌가……!’
예준은 가방에 넣고 다니기엔 충분한 무게라고 했지만 사실 가방에 넣을 필요도 없었다.
그냥 집 한구석, 어쩌면 그냥 에플 본사에서 본체를 관리해주기만 해도 되었다.
아예 본체를 따로 분리해둘 필요도 없을지도 몰랐다.
거대한 슈퍼컴퓨터에 해당 디바이스의 모든 연산 기능을 탑재해둔 상태로 사용자에게는 암호화된 계정과 에플고글만 공급하면 문제는 해결되었다.
예준이 덧붙였다.
“제가 과거 한국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서양화가 들어오기 전 과거 한국 화가들은 한국의 그 거대하고 장엄한 산맥을 어떻게 하면 캔버스에 담아낼 수 있을지 고민했던 모양이더라고요. 그 장엄함을 담아내기에 캔버스는 너무 작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했답니까?”
“그래서 캔버스를 키웠죠. 그래도 장엄함이 부족하다면, 더 키웠고, 더 키워서 그렸죠. 그림 한 폭을 한 사람이 채 옮기지도 못할 만큼 크게 말이에요.”
큰 그림은 서양에도 많았다.
동양과 서양이 그림을 크게 그린 이유는 다르겠지만, 솔직히 그림이 커지지 못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화가들은 과감하게 그것을 시도한 것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았습니다.”
예준은 AI VR프로그램과 태그 프로그램, 안경 디자인 딥러닝 자료와 3차원 영상 송수신 기술을 공유하는 대신 소정의 사용료를 받기로 했다.
600억 원이 족히 넘었다.
상용화된 에플고글을 상상하면 몇천억 원이 들어도 아깝지 않았다.
“지금까지 혁신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써온 것 같습니다. 지금 윤예준 화가님께서 이야기해주신 신상품 아이디어와 같은 혁신은 여태 없었어요.”
“스티븐 대표님이 이뤄놓으신 게 있으니까요.”
“이런 사용료 문제 말고, 혹시 더 요구하고 싶은 건 없으십니까?”
예준은 조금 고민하더니 말했다.
“개발에 성공하면 굉장히 많은 그림들이 쏟아져 나올 텐데, 아트밸리 예술가들이 그 작품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전용 클라우드를 만들어주세요. 관람료를 챙기고 싶은 사람들도 있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작품을 공유하고 싶은 화가들이 훨씬 더 많으니까요.”
그리고 그 클라우드를 통해 YJ스탬프하우스를 중심으로 제휴가 되어 있는 다른 미술관의 온라인 관람 서비스도 통합하고 싶다고 했다.
현재도 미술관마다 사이트가 있기는 하지만 UI가 다르고 사이트 접근도 번거로워서 한눈에 확인하기 번거롭다고.
확실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스티븐은 수락한 뒤 바로 계약서를 꺼냈다.
“새로운 예술 재료가 탄생하겠군요.”
계약서를 작성하며 스티븐이 말하자 예준이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예술 재료…… 그렇네요. 신상품에 예술 기능을 넣는 게 아니라, 아예 예술 재료가 될 것 같네요.”
이 예술 재료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지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사람들이 신상품을 예술 외적 용도로, 얼마나 창의적으로 사용해줄지 생각하면 출시가 간절히 기다려졌다.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
스티븐은 상품 개발이 완료되면 실리콘밸리 시연회에 나를 초대해주겠다고 했다.
초대에 응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고, 나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림 시연회를 선보여주겠다고 했다.
스티븐은 내가 3D 그림을 연습할 수 있도록 최신형 에플고글과 드로잉 리모컨을 선물했다.
드로잉 리모컨이 불편하다고는 했지만, 그동안 수십 가지 미술 재료로 그림을 그려본 나였다.
3D 그림은 어려운 축에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리모컨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모두가 나처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마 리모컨은 새로운 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모양이 천차만별로 바뀔 테니까 말이다.
개선이 시급했다.
‘이 리모컨이 없어도 그림이 그려진다면 무조건 성공하겠어……’
그렇게 신상품 공개를 기다리던 도중 <바이탈>이라는 제목의 필립 감독 신작이 개봉되었다.
개봉 즉시 대박이었는데, 샬롯 로렌스 주연에 카프탄, 카산드라가 연출로 참여한 작품이었다.
내가 원에게 도움을 줬던 작품 <생명의 해바라기>를 모티프로 했다는 소문이 널리 알려진 덕에 솜니움 미술관을 방문하는 사람도 다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나는 미디어아트센터에 들러 필립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아닙니다. 다 솜니움에서 그림을 제공해준 덕분이죠.”
필립은 이번에 <바이탈>을 통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스카 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 정도면 실패가 없는 감독이라는 뜻이었다.
작품마다 할리우드에서 불러주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 그리고 윤예준 화가님도 이번에 할리우드에 초청되셨습니다.”
“네? 제가요?”
내가 그의 영화에 직접 참여한 건 <시간을 거스르는 자>와 <아라비안 오아시스>가 다였다.
<바이탈>의 모티프가 된 <생명의 해바라기>에 붓을 대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으니까 말이다.
“네. 굉장히 명예로운 일인데요. 그동안 전 세계 예술 산업에 이바지하신 게 있는데, 당연한 일이죠.”
나의 노고를 알아주는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어떤 명목으로 할리우드에 초청받게 된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아트 도뇌르처럼 새로 상을 만들었을 리도 없을 테니.
‘설마……?’